생생 역사 현장 탐방 14 - 근대종교문화유산 3 성공회 성당․정동제일교회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에서 인용하며 유명해진 문구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도 문화유적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방화로 소실된 국보 1호 남대문의 부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위클리서울>은 서울 인근의 유적지를 직접 찾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호부터는 근대에 건축된 종교문화유산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각 종교계 뿐 아니라 사회 전반과 국내 건축물 양식 변화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선 성공회 대성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소개합니다.


서울 정동 일대는 근대화 과정에서 들어온 서구 종교들의 집결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로 근처 언더우드의 ‘새문안 교회’는 국내 개신교의 모체 교회였으며 주미대사관 앞쪽 구세군 중앙본부는 전국적으로 펼쳐지는 ‘자선냄비’의 사령탑이었다.



구세군 중앙본부 앞쪽 도로는 덕수궁 뒤편을 둘러싼 돌담길과 연결돼 좋은 산책로를 만들어 준다. 멀리 석조전의 위용과 함께 고풍스런 고궁의 맛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5분 정도만 걷다보면 작은 삼거리가 있는 곳에서 붉은 벽돌의 ‘정동제일교회’를 만날 수 있다.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가 장로교를 대표한다면 ‘정동제일교회’의 초석을 다진 아펜젤러는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미국 감리교 선교사였다. 1885년 4월 한국에 들어온 아펜젤러는 1902년 순교하기까지 이 곳의 초대 목사로 활동했다.



기독교 선교에 큰 영향을 끼친 아펜젤러는 교육과 성서번역, 신문, 청년 등의 분야에도 관심이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 신학문과 신교육이 시작된 곳이다. 정동제일교회 위쪽에 위치한 배재공원과 배재빌딩 자리가 그 터다.



1885년 8월 아펠젤러가 이겸라, 고영필 두 젊은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게 계기가 됐으며 이듬해 6월 고종황제가 직접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



1898년(고종 광무 2년) 준공한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건물로 본래는 십자형 115평이었는데 1926년 증축하면서 양쪽 날개 부분을 넓혀 현재는 175평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쪽 부분만 늘렸기 때문에 원래 모습엔 손상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벽돌을 주로 해 지었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낸 고딕양식으로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하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반영된 것이다. 교회당의 종은 장식 없는 내부 기둥들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전형적인 북미 계통의 교회 건물이라는 평가다. 교회 마당엔 100주년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성공회의 얼굴 ‘성공회 서울성당’

정동제일교회를 빠져나와 돌담길과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을 끼고 돌면 우리나라 성공회의 얼굴인 성공회 서울성당 건물을 만날 수 있다. 1890년(고종 27년) 우리나라에 온 성공회는 초대 교주 코프의 전도활동으로 기초가 잡히자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가 성당을 건립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영국인 딕슨의 설계로 감독관 브로크가 1922년 공사를 시작했으며 자금 부족으로 1926년 5월 부분완공했다. 미완성인채로 70여년 동안 사용하다 1994년 교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증축공사를 하고 1996년 현재 모습으로 준공했다고 한다.

3층으로 된 성당 건물은 경사진 곳에 라틴십자형 삼랑식 구조로 지어졌으며 낮은 쪽에 반지하 소성당을 뒀다. 1층 대성당엔 7개의 베이(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는 단위 공간)가 있으며 내부 기둥엔 배흘림(엔타시스)을 사용했다. 기둥 위론 목조트러스 지붕틀을 얹고 지붕에 기와를 이었다.


이 건물은 완전한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국내에서 유일하다. 내부 제단의 모자이크와 공간 구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서양 건축 기법에 한국 전통 양식이 가미된 흔적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처마장식과 창살문양, 기와지붕, 스테인드글라스의 오방색은 건축 당시 한국인들의 정서를 얼마나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것들이다.

기초부와 뒷면 일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나머지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해 지었다. 건물 전체에 공간상 높낮이를 다르게 해 율동감이 있다. 종탑부는 중앙 큰 종탑과 작은 종탑이 생동감있게 연결돼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학교에 온 듯한 느낌까지 든다.

민중화 항쟁 표지석이…

성공회 서울성당을 한바퀴 돌아 뒤편을 탐방하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이 곳에서 시작됐음을 알리는 표지석과 경운궁 우이재가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1997년 1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6월 항쟁 진원지 표지석엔 ‘6월 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덕수궁의 또 다른 이름인 경운궁 우이재(등록문화재 제267호)는 1905년(광무 9) 경운궁을 고칠 때 세운 것이다. 당시 양이재는 함희당이란 건물과 연결돼 있었으며, 행각과 꽃담으로 에워싸 홍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홍원 일대는 1906년부터 1910년까지 황족과 귀족들의 자제 교육을 담당한 수학원으로 쓰였다.











원래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이었으며 내부엔 온돌방과 마루가 있었다. 건물 지붕엔 용머리를 얹어 격조를 높였다. 성공회는 1912년부터 이 곳을 임대해 쓰다가 1920년 건물을 사들인 후 옮겼다. 현재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함희당은 1960년대에 헐렸으나 양이재 뒤편에 복도각 일부가 남아 있다.

김승현 기자 okkdo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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