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별이 된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



# 어렸을 때 한아름이 넘던 소나무는 지금도 한아름이 넘는데....


시인 기형도가 그랬지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고. 그에게 빚진 마음으로 저는 이렇게 써보려 합니다. ‘어머니를 잃고 나는 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면 방에 있을 수가 없어 마당으로 나섭니다. 마당으로 나서면 또 마당에 있을 수가 없어 고샅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들판을 헤매고 있노라면 목마른 노래가 귓전을 파고듭니다.

슈만의 연가곡집에 수록된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제 마음이 그 노래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푸른빛이 하나도 없는, 황량한 모래벌판에 몰아치는 바람 속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한 사내의 뒷꼭지에 제 얼굴이 붙어서 대롱거립니다. 서투른 망나니가 휘두른 장검에 모가지가 베어지기는 했는데 완전하지를 못해서 그렇게 대롱, 대롱, 대롱거리는 가 봅니다.

어느새 9개월이나 흘렀습니다.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세 번이나 뜨고도 말 한 마디 없었던, 말 한 마디 할 틈도 없이 서둘러 가버리신 어머니의 해낙낙이 웃는 얼굴이 장례식장 도처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날 조문을 오신 어떤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산은 어디에 있느냐고요. 선산은커녕 묘지로 쓸 만한 땅뙈기 한 평 가진 게 없는 저로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 옛 집터의 감나무는 홀로 의연하건만


하지만 다행히도 제 입은 금방 열려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은 불에 태워 산자락에 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말이 제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주었지요. 그러자 그분께서 그러시더군요. 아, 화장해서 다시 매장하시게? 그 말을 듣고 처음 알았습니다. 화장은 화장대로 하고, 매장은 또 매장대로 하는 새로운 장례풍습이 생겼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고향 매산은 청포도가 탱클탱글하게 익어가는 그런 꿈속 같은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곳곳에 깔린 고인돌 때문에 쟁기질도 다 못하고 괭이와 삽으로 흙을 파야 했던, 도처에 널린 고인돌 위에 고추를 널어 말리면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고인돌 밑에 들어가서 만화책을 읽었던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서당 훈장을 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아우들 셋을 데리고 처음 들어와서 만든 마을이지요. 마을 이름도 할아버지의 호 매촌을 따서 매산이라 하셨답니다.

지금 매산 마을은 그 자리에 없습니다.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마을은 통째로 이전을 했지요. 할아버지 사형제가 마을을 일군 지 백 년도 채 안 돼서 마을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신 것만으로도 배가 터지게 불렀던 할아버지는 변변한 땅뙈기 하나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으셨습니다. 할아버지 사후에 그 제자들이 몰려와서 비석이라도 하나 세우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러셨다지요. 비석은 무슨, 막걸리나 한 잔씩 하십시다.

부전자전이라고 했던가요. 재산은 물려받지 못했어도 호탕하게 웃는 넉넉함만은 빠짐없이 물려받은 남자를 남편으로 둔 덕에 어머니는 아주 일찍부터 가장의 임무를 떠맡아야 했습니다. 파먹을 만한 땅뙈기가 태부족이다 보니 양재기 장사에서부터 메리야쓰 장사, 플라스틱 장사 등등 사람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광주에서 떼어다가 팔면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열세 살에 시집와서 마을이 사라지기 직전인 일흔여섯에 중증치매 선고를 받고 삼 년여 뒤에 아주 눈을 감았으니 마을과 운명을 함께 하신 셈이지요. 아, 그러고 보니 일흔아홉, 흔히 말하는 그 아홉수에 걸리셨던 것일까요.


# 고향 옛집터의 화장실 흔적


“수복이 쟤도 마누라가 있었다면, 그랬어도 어머니 모시고 살 수 있었을까? 그렇게는 안 되었을 거여, 잉?”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의 따뜻한 봄날에,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오신 고모님께서 저를 보시며 그러시더군요. 그때 저는 살짝 반감이 들었습니다. 왜 안 된다는 거죠?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냥 헤헷, 웃고 말았습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질 까봐 두려워서였지요.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노인을 제3의 잉여적 존재로 파악하고 가능한 한 입에 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었는가, 하는 가슴 아픈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웃음꽃이 만발한 자리에서 불쑥 내놓을 만한 화제는 못 된다는 것을 제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은 농촌에도 밤에 밖으로 나가면 가로등이 휘황찬란해서 마치 어디 작은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합니다. 별을 보고 싶어도 보기 어려워진 세상이 되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이렇게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가? 

답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답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굳이 답이라고 한다면 발전을 위한 발전이라고나 할까. 사람은 이제 완전히 뒷전으로 밀렸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런 날은 또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정지용의 ‘향수’를 읊조려 보기도 하고, 김수철이나 서유석의 어떤 노래들을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한없이 걷다 보면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데 그 눈물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아,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 남편 회갑에 친구들을 불러 춤추는 어머니


눈물, 이 눈물에 땀방울이 섞이면 그 냄새가 아주 독특해집니다. 이 독특한 냄새 속에 어마어마한 이야기기 내장되어 있지요. 바람이 심한 날 고인돌 사이를 걷고 있노라면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차례로 하나씩 얼굴을 내밉니다. 자글자글 끓는 뙤약볕 아래서 아이를 등에 업고 엎드려 밭을 매는 어머니의 “아따 먼놈의 보래기가 이렇게도 많다냐”하는 목소리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늦은 봄날 보리밭에서 풀을 뽑다가 발견하는 꿩의 당혹스러움은 또 어떤가요. 낌새가 수상하면 천둥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날개를 파닥이며 달아나는 것이 꿩의 특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새끼들 때문에 날개를 펴지는 못하고 보리밭 사이로 새끼들을 인도하며 허둥지둥 걸어서 달아나는 것입니다.

명절 즈음이면 밀주 단속반원들이 참으로 착실하게 단골처럼 들이닥치곤 했었지요. 때문에 엄마들은 뒤안의 대숲이나 밤나무 아래 땅을 파고 술항아리를 묻곤 했습니다. 재주 좋게 기술적으로 잘 묻은 사람네는 들키지 않고 명절을 아주 잘 치를 수 있었지만, ‘재수가 옴붙은’ 사람네는 단속반원들에게 들켜서 벌금을 내라는 벼락같은 통보를 받아야 했습니다. 명절에 술값을 아끼느라 술을 담그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려 국가재정을 충당하는 참으로 옹졸한 정부의 옹졸한 실용주의 세상을 어머니는 살아 오셨던 셈이지요.

한겨울에 들이닥치는 산림계 직원들의 소란은 또 어떤가요. 우리 마을 매산은 산을 뒤로 하고 있었지만 산주는 우리 마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산주는 머슴을 풀어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땔나무 채취하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막아내곤 했지요. 자기들 땔 것도 모자라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해가고 남은 것들을 긁어다가 겨우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땔감이 모자랍니다. 모자라다 보니 가끔 산으로 몰래 들어가서 생솔가지를 해오는 겁니다. 그것도 운수 좋게 기술적으로 하는 사람은 따뜻하게 겨울을 나지만, ‘재수 옴붙은’ 사람네는 들켜서 또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누가 여기에 집이 있었다고 믿으랴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평생을 보내신 우리 고향 매산은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게으른 울음을 우는’ 그런 마을은 아니었습니다. 소를 키울 정도의 재력이 있는 사람은 두세 명밖에 안 되었고, 그나마도 일은 일대로 시키고 새끼는 새끼대로 받자는 생각에 황소가 아닌 암소들만 키우고 있었지요. 그 두세 마리 암소가 마을의 논과 밭을 모두 갈아서 농사를 다 지었습니다. 해가 뜨기도 전부터 해가 꼴깍 질 때까지, 땅거미가 어스름할 시각까지 암소는 땅을 갈고 송아지는 그 뒤를 따라다니며 메에, 메에, 배고프다고, 젖 달라고 소리를 질러대곤 했지요.

그렇게도 궁벽한 산골, 돌무덤뿐인 마을이건만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손님들은 어찌 그렇게도 많이 찾아왔던지요. 커다란 쇠꼬챙이 같은 것을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쿡쿡 찔러대다가 마을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을 사서 땅을 파곤 했던 사람들, 한참 나중에야 그들이 이른바 도굴꾼이라는 것을 알고 “뭐시여, 그것들이 도둑놈들이었단 말이여?”하고 어른들은 채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댔지만 아이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손님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둑’들은 너무도 신기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으니까요. 라디오라는 것을 들고 다니며 세상은 ‘지금 여기’뿐만 아니라 저 멀리 어디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으니까요.

도굴꾼들이 찾아오지 않는 겨울에는 도박사들이 찾아와서 아이들을 또 신명나게 해주었지요. 마을이 외진 산 밑에 위치한 까닭에 겨울이면 여기저기서 도박사들이 방을 빌려달라고 찾아오는데 그들의 씀씀이는 어찌 그리도 호쾌하고 웅혼하던지요. 방을 비워주고 남의 집에 가서 자고 오라는 명분이기는 했지만, 갓난아기에까지 지폐를 척척 빼주는 그들은 먹는 것도 우리와는 영 달랐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담배꽁초만이 아니었습니다. 손도 안 댄 닭다리에 돼지고기 수육에 두부 같은 것들이 수북하게 남아서 아이들을 미치고 환장하게 해 주었지요.

도박사들의 방문이 잦아질 즈음이면 당연하다는 듯 경찰관의 발걸음도 바빠졌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도 구속돼서 감옥을 살았다는 소문은 없었습니다. 도박사 중의 한 명이 경찰과 공모해서 판돈만 전문적으로 쓸어간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아이들에게는 도박사들이 영웅이요 은인이었습니다. 동전 한닢 구경하기도 어려운 엄동설한에 지폐를 척척 빼주는 자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말입니다.


# 이 많은 바위들 틈에서 농사짓느라 들인 노고는...


어머니는 찾아오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밥을 해 주셨습니다. 도굴꾼이면 도굴꾼, 도박사면 도박사, 경찰관이면 경찰관,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밥을 해 달라면 밥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수고비가 얼마였느냐고, 어디에 썼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머니는 아마 민망한 미소를 띤 채로 눈을 깜빡깜빡 하시다가 그만 눈물을 글썽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어머니의 그 젖은 눈동자를 보며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합니다. 두 날개가 멀쩡한데도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새끼를 인도하며 허둥지둥 걸어서 달아나는 꿩의 이야기 같은 그런 이야기를 말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저는 제가 아직도 아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제가 어느새 어른이 돼버렸다고 한탄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린다고 집을 나와서 헤매는 사람을 어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왜 이리도 어머니와 관련된 무엇인가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보려 안간힘을 다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길을 나설 때마다 새로운 것이 발견되곤 합니다. 며칠 전에는 화장실을 새롭게 발견했지요. 어머니와 제가, 가족 모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했던 그 화장실의 흔적을 말입니다. 하긴 그 시절에는 명칭도 화장실이 아니었지요. 변소간이라 했었지요. 커다란 항아리를 묻고 울타리를 둘러서 ‘소망’이라 불렀던 변소간이, 그 시절의 그 항아리가, 세상에,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인돌 공원을 조성한 뒤로 마을의 형태조차도 완전히 사라져 버린 옛 마을터에서, 옛 집터에서, 어머니와 제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었던 변소간의 그 항아리를 발견한 순간의 제 마음은 뭐라고나 할까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해 두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 저는 몇 시간이나 그 항아리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 족제비들이 새끼를 자주 낳던 곳


작은 고인돌 두 개를 중심 기둥으로 삼아서 항아리를 묻고 돌과 흙으로 담을 쌓은 화장실이었지요. 지붕은 없었고 여닫는 문도 당연히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호박넝쿨이 무성하게 담을 휘감아 돌면서 주렁주렁 호박열매를 맺어놓곤 했지요. 한낮에는 커다란 호박벌이 호박꽃 속에서 왱왱거리고, 흐린 날에는 청개구리가 호박꽃에서 호박잎으로 건너다니며 뭐라고 잔소리를 했던가 수다를 떨었던가 하여튼 심심찮은 소리를 내주는 화장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깊은 밤에 호롱불을 들고 나와서 볼일을 본다고 쭈그려 앉은 채로 문득 고개를 들면 와락 달려드는 그것들, 뭐라고 말을 거는 것도 같은,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것도 같은 별, 별들의 무수한 눈짓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의 그런 밤이야말로 천국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의 그 화장실이, 그 변소간이, 그 항아리가 돌과 흙으로 가득 채워진 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항아리의 용도가 무엇인지, 고인돌 바로 옆에 항아리가 왜 심어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긴 그게 항아리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겠지요. 그것은 풀잎이 사라지는 겨울 한철에만 얼굴을 내놓고 봄이 오면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질 테니까요. 그래서였을까요.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제 마음에 보물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항아리, 거기에 살았던 사람만 알 수 있는 항아리, 그 항아리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면서 보았던 별들의 반짝거림,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그 별들이 다시 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뒤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갈팡질팡하던 제 눈에, 제 가슴에 별들이 꽉 들어차서 오늘도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 아이들의 놀티터요 도서관이었던 무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주 공간에 천억 개 이상의 은하계가 있다지요. 각각의 은하계는 저마다 천억 개 이상의 별을 품고 있다지요. 그러니까 별의 총합은 천 억 곱하기 천억 개가 되는 셈인가요. 과학자들의 이러한 연구를 믿는다면,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된다는 이야기도 못 믿을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죽어서 지구보다 크거나 혹은 작거나 지구만한 크기의 땅덩어리가 된다는, 아, 도무지 상상도 잘 안 되는 이야기를 저는 지금 듣고 있습니다. 벌써 별이 되어 있을 어머니로부터 말입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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