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홍매


엄마. 내가 취직을 해버렸어요. 꿈을 꾸듯이, 뭔가에 홀린 듯이, 바람이라도 난 듯이 그냥 직업을 하나 얻고 말았어요. 오래 생각해 온 일도 아니고, 돈을 버는 방법보다는 안 쓰고 사는 방법이나 궁리해 온 나로서는 그리 절박하게 인식되고 있지도 않았던, 그래서 오랜 세월 취직 걱정을 해 온 사람들에게는 은근 미안스럽기조차 한, 그런 결정을 해버리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과정이 뭐랄까,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었다고 할까, 전광석화였다고나 할까, 내 자신도 어리둥절하고, 나를 아는 사람들도 어리둥절해 하는 뭐 그런 일종의 사건 아니 사태였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완전한 하나의 사건, 아니 사태라 해도 무난한 그런 일이었어요.

고창에 ‘문화연구회’가 있거든요. 정부의 하부기관 노릇을 하는 문화원의 사업과는 방향이 완전히 다르거나 경쟁관계인 그런 모임인데요. 회비를 내는 회원은 백여 명에 이르지만 실제로 연구활동에 적극 나서는 사람은 이십 여명이나 될까, 암튼 매년 두세 차례 정도 연구발표를 하는데 이번에는 김성수 일가와 관련된 것이었지요. ‘삼양염전 간척사업이 자연경관에 미친 영향’이 첫 번째 주제발표였고, 두 번째는 ‘서양인의 눈으로 본 김성수 일가의 재산형성 과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삼양사 소작답 양도투쟁’에 관한 내용이 발표되었는데요.

앞에 두 가지 주제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짜깁기하거나 보완하는 정도라서 그리 큰 울림은 없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주제는 그 당시 사람의 육성으로 보완된 것이라서인지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왜 80년대 후반에 고창 사람들이 고려대학교로 몰려가서 벌인 대규모 농성 사건 있었잖아요. 그때 앞장서서 사람을 끌어 모으고 협상을 주도했던 사람이 김재만이라는 분이에요. 그 양반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옆동네 활뫼라는 저수지 앞에 생존해 계시는데 연세가 90대 고령이세요.

그 양반이 그때의 분노가 아직도 남아서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는데 말이에요. 그 양반의 말씀을 듣다 보니 국민에게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절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김성수씨 동생 김연수씨가 일제 하에서 중추원 참의를 하는 등 호의호식을 하던 시절에 갯벌매립 사업권을 얻어냈단 말이거든요. 이 매립사업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농지가 만들어졌어요. 김연수씨는 그 어마어마한 농지를 자기 개인재산이라고 주장하며 인근의 농부들에게 소작을 놓았지요.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어요.


# 고창 문화연구회


해방 뒤에 뭐가 있었나요. 여러 가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일은 아무래도 농지개혁을 들어야겠지요.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마지못해 채택한 정책이긴 했지만 어쨌든 농지개혁은 모든 농민들에게 거대한 희망을 주었던 게 사실이잖아요. 농지는 농민이 소유해야 한다, 이런 말처럼 희망스러운 말이 농민에게 또 무엇이 있겠어요. 그런데 김성수씨 일가는 이 법을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었지요. 엄연히 농사를 짓고 있는 농토인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농토가 아니라고, 갯벌이라고 등록을 해놓고 농지개혁법을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지요. 이것은 김성수씨가 이승만 정권 하에서 부통령을 지내는 등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테고 말이에요.

아무튼 김재만씨의 기억에 따르자면 그랬다네요. 김성수씨 일가의 대변인격인 삼양염전 사장이 5년 뒤에 다시 얘기하자, 해서 5년을 기다렸는데 다시 5년 뒤에 얘기하자, 하는 말이 나왔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5년, 10년, 이렇게 기다린 세월이 30년을 넘어 40년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농민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불만을 토로하기만 했을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까닭에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는 거예요. 게다가 그때는 자칫 잘못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기도 했었지요.

그렇게 대책없이 기다리기만 하던 시절의 어느 날, 그러니까 80년대 후반에 열혈남아라고나 할까, 의인이라고나 할까, 암튼 한 청년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지금 민주당에서 최고위원을 하고 있는 이인영씨가 고창으로 농활을 나왔다가 주민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거예요. 피 끓는 청년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의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렇게 해서 농민들이 마침내 조직을 결성하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대부분 시큰둥했었다네요. 새파란 젊은 것들의 말을 듣고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심사들이겠지요. 그때 앞에 나서서 이 마을 저 마을, 온 마을을 쏘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또 설득한 사람이 바로 김재만씨였어요. 피 끓는 젊은 학생 이인영이 방향을 제시하고, 중년의 힘깨나 쓰는 김재만씨가 활동부대를 결성하는, 요새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환상의 콤비라고나 할까, 투톱체제가 이루어지면서 작은 고장 고창의 소작답 투쟁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된 거예요.

그러면 김성수씨 일가는 긴장했을까요? 아니었다네요. 처음에는 참 별 꼴 같지도 않은 것들이 몰려와서 지랄한다, 하는 뭐 그런 반응이었다는 거예요.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협상테이블이 꾸려지는데요. 이때 농민측 협상대표가 김재만씨였어요. 영리한 학생들이 협상까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학생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해서 협상의 모든 과정을 김재만씨가 책임져야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김재만씨를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슬프고 화나게 하는 일이 벌어졌었다네요.


  # 김재만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말이에요. 이게 참 묘한 것이잖아요. 처음에는 긴가민가 시큰둥해하던 농민들이 말이에요. 고려대학교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면서 기자들을 만나고 정부 관계자들을 ‘구경’하고, 등등 그런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어떤 확신을 갖게 되었던가 봐요. 그리고 그 확신은 욕심으로 이어지고, 그리하여 대다수 농민들은 무상양도를 주장하는 식의 아주 급격한 혁명 상태에서나 가능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네요.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유상양도마저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무상양도를 요구하면 협상은 어려워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농성은 장기화되는데요. 어쨌든 결과는 시중가격의 이십 퍼센트 선에서 매각처리하는 방식의 말하자면 유상양도로 결정이 되었는데요. 이것을 주도한 사람은 당연히 김재만씨였지요.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김재만씨는 오늘까지도 의심을 받고 있고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김성수씨 일가로부터 땅을 완전히 공짜로 빼앗을 수도 있었는데, 그런데 김재만씨가 뒷돈을 받고 시중가격의 이십 퍼센트를 지불하게 되었다는 게 대다수 농민들의 의심이라는 거예요. 이게 고령의 김재만씨를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잠못 이루게 하는 것이고요.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부들부들 떨리는 음성으로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는 김재만씨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 눈에서 절로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사람의 세상이라는 게 이게 그렇잖아요. 도둑의 증거를 잡기는 쉽지만 도둑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기는 아주 어려운 거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도둑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으니 이게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잖아요. 아무튼 나는 그때 그랬어요. 절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여기저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한 사람을 발견했지요.

세상에, 그 자리에서 글쎄 미당문학관 사무국장을 했던 선배 한 분을 만났지 뭐예요. 내가 고창에 처음 왔을 때는 한 달에 두세 번씩 만나기도 했지만 글쎄 뭐라고나 할까, 미당의 삶과 행적에 관한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차츰 소원해져서 얼굴 본 지도 벌써 육칠 년이 된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런데 이 양반이 그날 나를 보고는 그렇게도 반가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따로 자리를 만들었지 않았겠어요.


# 마당방죽에서 건진 도롱뇽


# 언제 꽃이 피어 씨앗까지 영근 민들레


# 히아신스


그 자리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온갖 얘기들을 나누었지요. 어떻게 사느냐고,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듣고 있었다고, 선배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어머니가 별나라로 떠나버리신 뒤로 더 이상 무엇을 할 의욕이 생기지를 않는다고, 어떤 출판사에서 요양원이나 노인병동에 관한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왔을 때 덜컥 그러자고 해 버렸는데 일 년이 지난 아직까지 손도 못 대고 있다고, 그나마 구두계약이라서 다행이라고, 계약금이라도 받아썼더라면 큰일날 뻔했다고, 등등 그런 이야기가 내 입에서 중언부언 나오고 있었던가 어쨌던가, 어느 순간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야아 큰일났다. 어쩌냐. 너 그러지 말고 취직 한 번 해볼래?”
“취직이요?”
“사람이 굶어 죽으면 안 되는 것이잖아. 너는 정말로 굶어 죽으면 안 돼야 인마.”
“어헛 참, 뭔 느닷없는 말씀을.”

그랬어요. 처음에는 참 많이 황당했어요. 굶어죽는다는 말도 그렇고,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말도 그렇고, 뭔가 울컥울컥 눈물이 나려 하면서도 황당했어요. 그런데 그게 또 그렇더라고요. 선배의 말을 듣다 보니 내 마음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더라고요. 그럴까. 취직이라는 것을 한 번 해볼까.

내가 그런 것들을, 그러니까 취직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 도시를 떠나온 건데 말이에요. 자본주의를 피할 수는 없다고, 자본주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하는 시대의 분위기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고자 시골로 내려온 건데 말이에요. 아무튼 그렇더라고요. 그럴까, 그런 것이라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슬몃 일어나더라고요. 말하자면 환경을 좀 바꿔볼 필요는 있겠다 싶은 뭐 그런 생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랬지요. 취직을 한다면 어떻게 하죠? 하고, 선배에게 물었어요. 그러자 선배가 그러는 거예요.

“숲해설사 어떠냐. 아니면 문화해설사는?”
“에이.”
“지랄헌다.”
“아이 지랄이 아니라, 그게 그렇잖아요. 낯간지럽게 그런 것을 어떻게 해요.”
“틀을 깨야 한다니까, 안 깨면 너는 죽어야.”


# 벌들은 참 부지런도 하지~


# 수선


“죽어도 그렇지. 어차피 죽는 게 인간인데 뭘. 그리고 틀이라는 것도 반드시 깨야 할 것이 있고 깨면 안 되는 것도 있는 거잖습니까.”
“이런 써글놈 좀 보소.”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 했지요. 승부는? 당연히 후배인 내가 이겼고요. 선배는 대개 지게끔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선배는 다른 안을 내놓았지요.

“선운사는 어떠냐.”
선운사? 아아 선운사. 내가 고창에 와 있으면서도 선운사를 아직 제대로 모르고 있었단 말이거든요. 그래서 언제 보따리 싸들고 선운산 골짜기로 가서 한 일 년쯤 살아 보리라는 생각을 가끔 해 오고 있었단 말이거든요. 그런데 선배의 입에서 선운사 얘기가 나온 거예요. 나는 당연히 눈을 번쩍 뜨고 선배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그러자 선배가 그러는 거예요. 선운산 호텔 회장님을 잘 아니까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선배의 전화를 받았지요. 알아보니 자리가 있다 한다고, 오후 한 시에 약속 잡았으니까 당장 준비하고 집 나설 준비하라는 전화를 말이에요. 그렇게 느닷없이 취직을 하게 된 거예요. 그 일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관광지의 관광호텔은 겨울 한철 비수기라서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떠난다네요. 그리고 삼월이면 다시 눈앞에 다가온 성수기를 준비하느라 사람들을 새로 채용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호텔 보이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요. 아, 여기서부터는 다음에 따로 시간 내서 말해야겠네요. 왜냐하면 그게 벌써 과거형이 돼 버렸으니까요. 그 왜 사람 사는 게 그렇잖아요. 과거사가 되고 보면 이야기가 길어지잖아요.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지고요.

그러니까 엄마, 나는 지금 선운산 관광호텔이 아니라 집에 와 있는 거예요. 이십여 일 동안 호텔에 있었지요. 이십여 일 동안이나 있었으니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겠어요. 그래서 다음에 따로 하겠다고요.


# 춘란


# 터질 듯이 부풀어오른 목련


왜 호텔을 이십여 일만에 그만두었느냐고 한다면 글쎄, 뭐라고나 할까, 선운산 골짜기에 있으면서도 정작 선운산 골짜기를 볼 수가 없었다는, 느낄 수가 없었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어야겠지요. 그밖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갈증은 그것이에요. 선운산 골짜기를 속속들이 알고 싶어서 갔는데 선운산 골짜기에 있으면서도 선운산 골짜기를 볼 수가 없었다는 것 말이에요.

아무튼 엄마, 그렇게 다시 집으로 왔는데요. 와서 보니 세상에, 봄이 벌써 마당에 가득 들어차 버렸더라고요. 그 사이에 비가 와서 물이 찬 방죽에는 도롱뇽들이 알을 낳았고, 산개구리들도 알을 낳아서 아주 작은 올챙이들이 꼬리를 치고 있더라고요. 민들레도 그새 꽃을 피웠고, 수선화도 벌어졌고, 토방 아래 심어놓은 히아신스에는 아랫집 할아버지네 벌들이 몰려와서 가득 붙어 있고, 아아 참말로 이게 참말인가 싶더라고요. 길지도 않은 세월 고작 이십여 일이었는데 말이에요. 그 사이에 세상은 이렇게도 크게 변했더라고요.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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