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혹 알거든 그 할머니에게 가는 길을 내게 좀 알려줘봐, 응?
엄마, 혹 알거든 그 할머니에게 가는 길을 내게 좀 알려줘봐, 응?
  • 승인 2012.04.2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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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흐드러진 동백꽃


엄마.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집을 나섰던 건 아니에요. 처음부터 작년의 그날을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추억해 보자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던 것도 아니에요. 처음에는 그저 마당 한쪽에 어린 쑥이 그득하게 올라와 있어서 말이에요. 저걸로 쑥국이나 좀 끓여먹자, 생각을 했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칼을 들고 나서는데 홀연 작년 이맘때의 풍경이 눈앞에 삼삼해지더군요. 충청북도 옥천,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여기까지 내려온 누이와 함께 했던 그날, 그날의 너무도 화창했던 날씨와 새소리, 무더기로 떨어져 있던 동백꽃, 떨어진 꽃잎을 밟고 서서 엄마에게 과자를 먹여주던 누이의 손길, 휠체어에 앉은 채로 내내 꾸벅꾸벅 졸기만 하던 엄마, 등등 이런 그림들이 마구 떠올라서 눈앞이 어지럽더라고요.

누이, 누이는 그렇지요. 만나면 항상 반갑지요. 반갑지 않을 이유가 도대체 없는 사람이란 말이거든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온갖 이야기로 밤을 새다시피 하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옥신각신 서로가 잘났다고 잘난 척을 하지요. 싸움은 아니에요. 싸움 같지만 절대로 싸움은 아닌 그런 미묘한 놀이는 사실 형제거나 남매거나 자매지간이 아니면 누리기 어려운 지상 최대의 즐거움이랄까, 뭐 그런 게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지켜보는 엄마도 아따, 아따, 소리만 할 뿐 말리거나 나무라지도 않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우리는 그날 길을 나섰어요.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청소를 하겠다고 걸레를 들고 나서는 누이에게 뜯으러 가자, 해서 각자 칼 하나씩을 들고, 비닐봉지도 각자 하나씩 챙겨 들고,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서 마당을 나섰지요. 내리막길을 위태위태하게 휠체어 바퀴가 덜덜덜 소리를 내며 달리다시피 했지요.

그런 속에서도 엄마는 잠을 자고 있었지요. 누이는 옆에서 “엄마 뭐해? 또 자?” 소리를 꽥꽥 질러대며 웃고 있었고, 그리고 나는, 글쎄, 나는 뭐라고 했었던가. “냅둬야, 우리 엄마는 아기가 되어버린 걸 뭐.” 그런 소리를 내며 역시 큰소리로 웃고나 있었던가 어쨌던가. 항상 조용한 마을 고샅에 웃음소리가 낭자하니 마을 사람들이 놀랐던가, 집집마다에서 얼굴을 빼꼼이 내밀고 쳐다보며 아주 재미있다는 듯 웃어주고 있었지요. 


# 후두둑 떨어져 버린 동백꽃


아무튼 내리막길을 지나고 평지, 편안한 평지를 지난 다음에는 얼추 이백여 미터에 달하는 오르막길이 시작되었지요. 그때부터는 엄마의 휠체어가 점점 무거워져 갔지요. 온 몸의 근육을 다 동원해도 나 혼자서는 아슬아슬하게 두려워서 땀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어요. 아차 실수해서 손잡이라도 놓치게 되면 엄마는 속절없이 저 아래로 마구 내려가 버리고 말 테니까요.

그리하여 누이가 뒤에서 밀고 내가 앞에서 끄는 구도가 되었지요. 마치 무슨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라도 끄는 듯이 말이에요. 울지 않는 아이처럼 순하게 잠들어 있는 엄마를 가끔 살피면서도 안 보는 듯이 딴청을 부리면서, 그렇게 어렵게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웃고 있었지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도 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이며 떠들어대고 있었지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그날 우리를 그토록 요란하게 떠들어대게 했을까요. 무엇이 누이와 나로 하여금 엄마를 굳이 휠체어에 태워서 그토록 멀리까지 쑥을 캐러 가게 했던 것일까요. 쑥이야 평지에도 얼마든지 있고, 그렇게 멀리까지 나가지 않아도 지천에 깔려 있는데 말이에요.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멀리까지 쑥을 캐러 갔던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휠체어 나들이가 되었지요.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된 엄마를 보며 집에 휠체어를 들여놓고도 겨우 마당 구경이나 몇 번 시켜드렸을까. 그랬는데 그날은 누이가 왔다는 구실로 그렇게도 멀리까지 땀을 뻘뻘 흘려가며 나갔던 것이지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날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서 그렇게 멀리까지 나가게 했을까요. 새삼 그것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날의 마지막 나들이 며칠 뒤에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셨고, 그리고 돌아가셨으니 안 궁금하면 그것도 이상하다 해야겠지.


# 작년에 보고 또 보는 후배 트렉터


하여튼 궁금하고, 또 궁금해서 작년에 휠체어를 밀고 끌며 갔었던 그날의 그 길을 따라서 집을 나섰던 거예요. 마치 무슨 순례라도 하듯이 말이에요. 쑥을 뜯어서 쑥국을 끓여먹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로, 마당을 나와서 내리막길을 걷고, 평지를 걷고,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서, 동백이 송이채로 뚝뚝 떨어지는 동백나무 아래를 서성거렸지요.

누이가 엄마에게 과자를 먹여주었던 바로 그 동백나무 아래, 그 아래로 내 몸이 들어가는 순간 그날의 풍경이 홀연 떠올라 오면서 아, 그때가 딱 이맘 때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랬던 거예요. 엄마가 세살바기 아이처럼 손에 숟가락을 든 채로도 꾸벅꾸벅 졸고, 그 어떤 소란에도 일 없다는 듯이 쿨쿨 잠이나 자고 있었던 그때가 바로 일 년 전의 이즈음이었던 거예요. 슬픔이었을까. 가슴 저 안쪽에서 가느다란 뭔가가 밀려 올라오는데 누군가 멀리서 알은 체를 하더군요.

트렉터로 밭을 갈러 나온 이웃 마을 후배였지요. 그를 보는 순간 내가 그만 뒤로 자빠질 뻔했어요. 왜냐구요? 왜냐구요?
작년의 그날도 그가 그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단 말이거든요. “어머니 모시고 소풍 나오셨는가비요, 잉?” 작년에는 그가 그런 말로 알은 체를 했었지요. 옆에 어머니도 누이도 없는 금년에는 이런 말로 알은 체를 하더군요. “아따 형님 한가하신게비요, 잉?”

도대체 이게 무슨 우연의 일치란 말이냐. 어이가 없었지요. 하도 황당해서 대꾸도 제대로 못하고 버벅거리다가 말았지요. 그렇게 허둥거리던 중에 그 할머니를 발견했어요. 작은 배낭을 등에 지고 씩씩하게 산길을 걷고 있는, 먼 옛날의 외할머니를 연상케 하는 할머니를 발견한 순간 아무 생각도 없이 그 뒤를 따랐지요.


# 절하는 자세로 일하시는 할머니


# 가시는 걸음걸음


아직 고사리가 본격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하나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요. 할머니는 빠르게 씩씩하게 걷다가 고사리를 만나면 허리를 굽혀 그것을 꺾고 있더군요. 우리 앞 동네 어떤 아주머니는 고사리 철에 한 달 동안 고사리만 꺾어서 일 년을 살다시피 한다는데 이 할머니도 그런가보다, 혼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뒤를 따랐어요.

“꼬사리? 아니여. 꼬사리는 눈에 뵌께 꺾는 것이고.”

마침내 할머니를 따라 잡아서, “고사리도 아직 별로 없는데 뭔 고사리를 꺾는다고 벌써부터 나오셨대요?”하고 짐짓 너스레를 떨었더니 할머니가 그러시더군요. 고사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서 그냥 갈 수 없어 부록으로 꺾는 것일 뿐이라고, 진짜 목적은 벌초라고, 벌초를 하러 나온 것이라는 거예요.

“벌초요? 아니 뭔 벌초를?”

어이가 없다는 소리를 내고 나서 보니 할머니의 배낭 속 살림이 요란하더라고요. 낫도 있고, 작은 톱도 하나 있고, 호미도 있고, 술병도 하나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있고, 술잔도 있는 것 같고, 심지어 건어물 안주까지 갖춰져 있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내가 그냥 말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산소를 찾아가는 한식도 지났고, 추석은 더더욱 아닌데 할머니 혼자서 벌초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여쭤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묻고, 듣고, 또 묻고, 또 듣기를 되풀이했지요. 물론 고사리도 꺾었지요. 마음먹고 고사리를 찾지는 않았어도, 고사리는 나 여기 있어요 하는 듯이 자주자주 눈에 띄더군요. 꺾어서 할머니의 배낭 속에 넣어드렸지요. 벌초할 산소 앞에 도착하면 또 그 일을 많이는 아니고 조금씩 도왔지요. 할머니와 나는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급하게 친해져 갔지요.

벌초할 산소가 많기도 하더군요.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그렇게 군데군데 묻힌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많기도 하더군요. 하나같이 ‘시’자가 들어가는 무덤들이었지요.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심지어는 시큰아버지까지, ‘시’자가 안 들어가는 무덤은 할머니가 ‘영감태기’라고 표현한 딱 하나뿐이었어요.


# 처음 발견했을 때


# 이거 오갈피 술이여


가을에는 뱀도 무섭고, 멧돼지도 무섭고, 말벌도 무섭고 칡넝쿨도 너무 많이 우거져서 벌초할 엄두를 못 낸다는군요. 아들이 둘 있는데 큰아들은 미국에서 세탁소를 하느라 정신도 없고, 비행기삯도 아까워서 십 년이 넘도록 한국에 올 엄두를 못 내고 있다는군요. 작은아들은 교통사고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벌초는커녕 산소 구경도 못 해본다네요. 예전에는 벌초만 전문으로 해주는 사람에게 맡겼는데 이제는 돈을 너무 많이 달라 해서 엄두를 못 낸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벌초를 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아닌게 아니라 작년 추석에 벌초를 안 한 흔적이 역력하더군요. 풀들이 제 키를 온전히 간직한 채로 우두커니 서 있거나 쓰러져 있었어요. 그것을 할머니가 낫으로 착착착 베어서 한쪽으로 밀어내는데 “야아 참 잘 하시네” 소리가 내 입에서 절로 나오더군요. ‘영감태기 죽고 십칠 년’이라네요. 그러니까 십칠 년 동안 혼자서 일을 해 오셨다는 얘기가 되는 거예요.
연세를 여쭤봤지요. 대답을 듣고는 속으로 놀랐어요. 놀라서 생일도 여쭤봤지요. 그 대답을 듣고는 기함을 할 듯이 놀랐어요. 세상에, 이게 뭔 일이란 말입니까. 내 입에서 같은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지요.

“야든? 정말로? 생일은 이월 하고도 열엿새 날? 정말로?”

엄마, 엄마가 말이에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홉수에 이르러서 그 아홉수를 못 넘기고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니까 일흔아홉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금년에 딱 여든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엄마의 생일이 정월 지나 이월이잖아요. 날짜는 보름 하루 지나 열엿새, 그게 맞잖아요.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화창한 봄날에 벌초를 나선 할머니가 딱 그만큼이라는 거예요. 엄마가 태어나신 그 해의 그 달 그 날에 할머니 당신도 세상에 나오셨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고요. 이게 대체 뭔 조화속이란 말이냐고요. 어찌케 이런 일이, 응? 어찌케 이런 일이 백주 대낮 산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냐고요.

“오메 그리여-어"

할머니가 대뜸 반말을 하시며 내 손을 잡더군요. 할머니의 그 반말이, 그 손길이 어쩌면 그렇게도 촉촉하게 가슴을 스미고 들던지 그만 울컥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지요. 할머니는 배낭을 뒤지기 시작했지요. 플라스틱 술병이 나오고, 종이컵이 나오고, 비닐로 꽁꽁 싸맨 쥐포가 나왔지요.


# 벌초 하러 왔당게


# 한잔 하더라고 잉~


오갈피로 담근 술이라네요. 오래 전에 ‘영감태기’가 마당에 심어놓은 오갈피 열매를 따서 손수 담근 술이라네요. 오갈피술이 위장에 좋다고, 많이 마셔도 속 안 상하니까 많이 마시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자꾸 술을 권하시네요.

색깔은 복분자술처럼 생겼는데 맛은 영판 다른 오갈피술을 마셨지요. 할머니 한 잔 나 한 잔, 그렇게 마시고, 또 마셨지요. 마시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도 없는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었지요. 그게 그렇더군요. 큰 것(?) 하나를 건지고 나니 다른 것은 도대체 중요할 이유가 없어져 버리더군요. 그저 할머니와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른바 수다라고 것들을 잔뜩 떨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고 보니 술을 참 많이도 가져오셨더군요. 이 봄날 깊은 산속에 벌초를 나오면서 어인 술을 이리도 많이 가져오셨느냐고, 시비조로 내가 여쭤봤지요. 그러자 대번에 나온 할머니의 답이 이렇더군요.

“아 영감태기가 술을 오살허게도 좋아했당게.”

“그러니까 영감태기의 술을 제가 빼앗아 먹은 꼴이 된 거네요?”

“아녀, 아녀, 뭔 소리를. 자네를 안 만났으면 내가 시방쯤 술 취해서 찔끔찔끔 눈물이나 빼고 자빠져 있을 텐디 뭘.”

웃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함뿍 젖어 있더군요.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더군요. 그러니까 할머니는 진달래도 화사한 이 봄날에 벌초를 핑계로 산에 와서 울고 싶었던 거예요. 해마다 그렇게 해 오셨던 거예요. 그런데 나를 만나는 바람에 울 기회를 놓쳐버렸던 거예요. 그러니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하나요?

사실 따지고 보면 피장파장이었지요. 나는, 글쎄 나는 뭐랄까, 그새 고인이 되어버린 엄마와 함께 했던 작년의 일을 되짚어 보며 뭔가 청승을 떨고 싶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길을 나섰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할머니를 만나는 바람에 청승이고 뭐고 다 잊은 채로 수다나 떨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수다가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말이에요. 어찌나 가슴이 설레고 어찌나 마음이 하늘에 붕 떠 있었던 것인지 말이에요. 세상에, 할머니와 헤어지고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기록해놓은 것이 없는 거예요.

어디에 사시는지, 누구인지, 그런 아주 기본적인 인적사항은 하나도 여쭤보지 않은 채로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나 바보처럼 하고, 그리고는 그대로 헤어졌던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절묘한 우연이나 바래볼 뿐 내가 임의로 그 할머니를 찾아갈 수는 없는 그런 꼴이 되고 만 거예요. 나 원 참, 이게 무슨 정말로 바보같은 정신머리였던 것인지, 엄마는 알까? 알거든 그 할머니에게 가는 길을 내게 좀 알려줘봐, 응?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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