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 내내 정권 홍보기관 자처한 방송사, 기자들 더 이상 못 견뎌”
“지난 4년 내내 정권 홍보기관 자처한 방송사, 기자들 더 이상 못 견뎌”
  • 승인 2012.05.1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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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진단 연속인터뷰> 박우정 민언련 이사장-1


검열 저항하다 경향신문서 해직,옥살이, ‘말지’ 초대편집장 맡기도
90년 이후 언론 정치권력 아닌 자본 통제로 질적인 변화 이뤄져
확대됐던 언론자유, MB 정권 들어와 80년대와 같은 장악에 돌입
낙하산 통해 방송 장악, 권력 비판과 감시 기능 원천적으로 무력화







한국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보안법 사범 증가, 노동 탄압, 생태환경 파괴 등의 문제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신공안정국’에서 파생된 숱한 문제들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위클리서울>은 2007년부터 국가보안법, 남북관계, 노동 인권, 생태 환경, 교육 등의 문제와 관련 각계 인사들과 연속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그동안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 ‘야생초 편지’의 황대권 씨, 재야인사 김낙중 선생,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김상봉 전남대 교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송환’의 김동원 감독, 김세균 서울대 교수, 강기갑 민노당 대표, 노회찬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 정세현 이종석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우종 덕성여대 명예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 선생, 박원순 변호사, 장석춘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정지영 감독, 이상돈 중앙대 교수, 손호철 서강대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교수,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고은 시인, 이한열 열사 모친 배은심 여사, 박창근 관동대 교수, 배우 최종원 문성근 권해효 씨, 김용택 시인, 지율스님, 박인배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 강정구 동국대 교수,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 박재동 화백, 문정인 연세대 교수,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 손혁재 한국NGO학회 회장,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박경석 장애인철폐연대 대표, 가수 안치환 씨, 김두관 경남도지사, 안종주 박사, 김정헌 공주대 명예교수, 이근행 전 MBC노조 위원장,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문재인 변호사, 서정민 한국외대 교수,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이진석 서울의대 교수,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이호철 작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유홍준 명지대 교수, 강남훈 교수노조 위원장,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정연주 전 KBS 사장,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장석웅 전교조 위원장, 윤기돈 녹색연합 사무처장, 박순성 동국대 교수, ‘하얀 정글’의 송윤희 감독, 신율 명지대 교수, 강병화 고려대 교수, 정혜신 정신과전문의, 이은봉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 김명곤 전 문광부 장관,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조헌정 향린교회 목사,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방송인 김미화 씨, 조화순 목사, 정동익 사월혁명회 의장, 안도현?신경림 시인 등 230여 명의 사회 각계 인사들과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이번호에는 MBC와 KBS, YTN, 연합뉴스, 국민일보 등에 재직중인 언론인들이 현 정권의 언론장악에 맞서 최장기 파업을 진행하는 등 작금의 언론상황과 관련, 박우정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이사장(도서출판 ‘길’ 대표)과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박우정 이사장은 80년 당시 신군부의 언론검열에 맞서 투쟁하다 경향신문에서 해직됐고 감옥살이까지 한 해직기자 출신이다. 이후 ‘말지’의 초대편집장을 지냈다. 말지는 87항쟁에 불을 지핀 ‘비합법 지하 기관지’였다. 이 때문에 박 이사장은 당시 전두환 정권 하에서 쫓겨 다니는 신세였다.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멤버로 활약했고, 지난 2003년 퇴임했다. 이 같은 이력 때문에 박 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지금까지 한국 언론투쟁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언론자유 운동의 역사를 보면, 가장 큰 원류가 74년에 있었던 동아투위, 조선투위 등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었다. 그 운동을 벌이다 많은 분들이 해직 당했다. 동아에선 100명 넘게, 조선에선 30명 넘게 해직되었다. 이후 전두환 군사독재 항거해 싸우다가 근 1000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해직됐다. 이번 후배들의 파업 역시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서 싸워온, 장기간 언론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맥락의 연장선이다.” 

박 이사장은 현재 언론 통제의 상황은 대선 정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총선의 야당 참패는 근본적으로 야당의 무능, 거기에 리더십 부족 등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또 다른 핵심은 정책 선거가 아니었다는 지점에 있다. 공권력과 언론이 거의 야당을 흔들다시피 했다. 조중동은 민주통합당과 야권연대 김용민을 박살냈다. 연일 톱으로 보도하고 떠들었다. 김용민 심판론으로 몰고 가 민의를 왜곡했다. 방송은 새누리당을 도왔고, 때문에 야당의 무능과 지도력 부재가 함께 결합해서 이번 총선결과가 나온 것이다. 앞으로 대선도 언론의 여건이 중요하다. 보도환경을 보면 야권에 굉장히 불리하다.”

향후 언론 풍토를 바꾸기 위해선 언론 관련법의 개정이 시급하다고 했다. 박 이사장은 “향후 국회에선 어떤 정당이나 대통령 등이 언론사 경영진을 구성하는데 절대 개입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해야한다”며 “그야말로 사장 선출부터 이사진 구성까지 공공성이 담보돼야 한다. 지금처럼 여야 나눠먹기나 대통령 임명은 절대 안 된다. 정치권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막아야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박우정 민언련 이사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해직기자 출신이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자면.
▲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신군부가 들어서던 시기였다. 5.18 이후 보도 통제가 더욱 강화됐던 상황이었다. 당시 검열 철폐 운동을 벌였다. 많은 기자들이 그랬다. 기자의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향신문과 중앙일보가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다. 저는 당시 경향신문 기자였고, 검열 철폐 운동을 벌이다 80년 6월에 연행되었다. 80년에 해직된 기자들이 지방신문까지 합쳐 1000명 가까이 되는데, 그걸 전부 당시 보안사에서 작업했다. 당시 저는 실형을 살았고 동시에 해직되었다. 81년에 석방되었고, 84년까지는 생계를 위해 일반회사에 취직했다.
당시 경향신문 분위기를 떠올리자면 평기자 대부분이 기사거부 운동에 참여했다. 밖으로 나가 농성을 벌였다. 부장, 차장급 이상만 신문을 제작했는데, 전체 면수가 절반으로 줄어들 정도였다. 그 마저도 계엄사 검열을 받으면서 제작했다.

- ‘말지’ 초대 편집장이었다.
▲ 84년 언론운동협의회가 결성된다. 언협은 75년 해직당한 동아투위, 조선투위 그리고 80년 해직기자들 단체가 연합해 만든 가장 큰 언론운동 단체다. 송건호 선생이 사무총장이었고 어쩌다 제가 기관지 편집장을 맞게 되었다. 그 기관지가 바로 말지다.
요즘 같으면 온라인에 사이트 개설해 대안매체 만들면 되지만, 당시엔 페이퍼를 제작 배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페이퍼가 있었지만, 해직언론인들이 제대로 된 매체를 만들어 제도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부분들을 보도해야겠다고 결의했다.
당시 운동권 내에서 나오는 이야기, 제도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는 남북관계, 국제정세 등에 대해 보도했는데 반향이 대단했다. 그러나 말지는 합법 매체가 아닌 불법 매체였기 때문에 제작 배포도 비밀리에 추진되었고, 수사당국의 감시도 심해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엔 흔쾌히 인쇄해주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 다행히 우리 뜻에 동조하는 사업가를 만나 어렵게 배포하게 되었다.
이 말지가 나올 때마다 언협 소속 해직기자들은 돌아가며 구류를 살았다. 나중엔 구류를 담당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였다. 실제 제작하는 취재팀이 따로 있었고, 발행됐을 때 법적인 책임을 지는 담당자가 따로 있었다.

- 말지가 87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 말지에서 폭로한 특종은 86년 9월에 터진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사건’이다. 그 사건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이게 87년 4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발표되면서 87년 6월 항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그 문건은 한국일보 김주원 기자가 모아서 우리에게 넘겼다. 김주원 기자는 체포돼서 실형을 받았다. 저를 포함한 몇몇 사람은 수배가 떨어져 피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후로 말지 제작은 다른 사람들이 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국민적 열망으로 나온 신문이 바로 한겨레신문이다. 국민주를 모집해 창간운동을 벌였다. 저도 한겨레 창간멤버였고, 2003년 4월에 퇴직할 때까지 근무했다. 말지는 90년대 이후 합법화 되었고 언협의 손을 떠났다.
 
- 언론 관련 단체가 많은데, 민언련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 언협이 민언련의 전신이다. 그러니 민언련은 언론운동의 가장 깊은 역사가 서려 있는 운동단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언협의 운동주체는 해직언론인이었다. 민언련은 그 주체가 시민이다. 형식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언협은 순수한 운동단체였고, 민언련은 사단법인이다. 민언련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법적 지위가 달라졌다.
언론노조, 피디연합회 등이 현역 언론인 단체라면 민언련은 역사가 긴 순수한 시민들의 단체다. 물론 해직기자가 포함돼 있지만 실제 주체는 시민이다. 재정도 자급자족하고 있다. 90년도부터 일반 시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기자가 아닌 언론수용자들이 중심이 됐다.

- 최근 언론 상황을 과거와 비교해보자면.
▲ 기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늘 언론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비슷한 방법으로 장악했다. 다만 당시엔 남산으로 끌고 가는 등 고문과 탄압의 정도가 심했다. 정보부 사람이 직접 언론사 간부들을 찾아가 통제했다. 그 강도는 전두환 시절 가장 높았다. 전두환 정권은 과거 정권과 달리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언론을 장악했다. 그래서 이때는 ‘야당지’라는 게 없었다. 박정희 때만 해도 동아일보 등 정부에 비판적인 성격의 제도언론이 있었는데, 전두환 시절엔 완전 장악당한 것이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과 야합하는 형태로 언론의 모양도 변한 것이다.
이후 정권이 바뀌고 한겨레신문이 등장했다. 당연히 탄압은 있었지만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탄압을 못했고,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다. 그 탄압이란, 정권차원에서 주로 광고주에 대한 압박이었다. 어쨌든 전두환 정권 이후 노골성은 다소 와해되었다.
90년 이후 가장 질적인 변화는 정치권력의 통제가 아닌 자본의 통제라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고도화, 그리고 언론이 큰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자본과의 유착관계가 된다. 정치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장악 매개가 넘어간 것이다. 80~90%가 광고수익이니 말이다. 자본의 예속까진 아니어도 유착관계로 갈 수밖에 없었다. 중앙일보와 삼성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정권차원에서 보면, 김영삼 정권만 하더라도 언론자유가 보장되었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선 가장 폭넓게 보장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조중동과 대립각을 세웠지만 통제를 하진 않았다. 오히려 언론이 노 정권을 핍박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들어와서 확 바뀐다. 80년대 신군부 때와 같은 장악에 들어간다. 차이가 있다면 공권력에 의한 장악이 아닌 낙하산 투입이다. 정치권력과 밀착돼 있는 언론인들을 앞세워 방송사에 투입했다. 정연주 사장은 KBS 역대 사장 중에 KBS의 공영성과 독립성을 가장 발전시킨 사람인데, 근거 없는 중상모략으로 쫓아냈다. 그런 식으로 언론을 장악하는 가운데 MBC에선 엄기영을 몰아내고 김재철을 투입시켰다. 김재철 사장은 이명박 대선캠프엔 없었지만 이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였고 새누리당과도 밀착된 언론인이었다.
이렇게 되니 인사권, 편성권 등이 모두 장악된 것이다. 언론 본령인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 기능을 원천적으로 무력화시켰다. 그러면서 방송을 완전히 정부 홍보기관으로 전락시켰다. 4년 동안 그 짓을 하다 보니 그 안에 종사했던 기자나 PD들이 견디지 못해 파업에 돌입한 것이다. <기사 이어집니다.>

최규재 기자 visconti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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