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조광환 선생님의 동학농민혁명 이야기





“장년의 농민군이 선두에서 나이 십사오 세쯤된 아이 한 명을 업고 진 앞에 나섰는데, 아이는 푸른색 홀기(笏旗)를 쥐고서 마치 지휘하는 것과 같았고 그 깃발을 따라 수많은 농민군들이 질서 있게 움직였다. 선두에서는 날라리를 불고 그 다음에 ‘인(仁)’자·’의(義)’자를 새긴 깃발 한 쌍이, 또 다음에는 ‘예(禮)’자ㆍ’지(智)’자를 새긴 한 쌍이, 또 다음에는 흰색 깃발 두 개가 뒤따랐는데, 그 중 하나는 ‘보제(普濟)’라 썼고, 다른 하나에는 ‘안민창덕(安民昌德)’이라 썼다. 다음의 황색기 하나에는 ‘보제중생(普濟衆生)’이라 씌어 있었고, 나머지 깃발에는 각 고을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다음은 갑옷에 투구를 쓰고 말을 타고 검무를 추는 자가 한 명, 그 다음에는 칼을 가지고 걷는 자 네다섯 쌍, 다음에는 피리를 불고 북을 두들기며 붉은 관복을 입은 자 두 명, 다음에는 두 명이 또 날라리를 불고, 다음의 한 명은 벼슬아치들의 관모를 쓰고 우산을 가지고 도인의 복장을 하고 나귀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소매가 좁은 옷을 입고 관모를 쓰고 우산을 가진 대여섯 명이 나귀를 타고 있는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고 따랐으며, 그 다음에는 두 줄로 만여 명의 총수(銃手)가 뒤따르는데, 모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에 두른 수건은 다섯 가지 색깔로 색이 각기 달랐으며, 총을 가진 사람들 뒤에는 죽창을 든 자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걸으면서 휘어지고 꺾이며 ‘지(之)’자를 또는 ‘구(口)’자를 만들면서 진세를 배열하였는데, 모두들 어린아이가 잡고 있는 푸른색 기가 지시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대개 적들은 어린아이 중에서 키가 작고 교활한 아이를 뽑아서 진중에 두고 며칠동안 미리 어떤 것을 펼칠 것인가를 가르치고 그럴싸하게 신동이라고 하여 보고 듣는 지모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것도 모르고 참으로 신인(神人)인 줄 여겼다.”

그 후 함평에서 장성으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때마침 월평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관군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불의의 기습으로 40~50명이 희생되었다고 전봉준은 그 공초에서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내 혼란을 수습한 동학농민군은 병기를 거두고 조금 물러났다가 곧바로 삼봉 위로 올라가 진을 배치하였는데, 마치 학(鶴)의 모양과 같았습니다.

농민군은 위에서 아래로 관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시 후 커다란 대나무로 만든 통을 밀고 나왔는데, 둥그스름한 닭의 집과 비슷한 것이 수십 개였습니다. 밖으로 창과 칼이 삐죽하게 꼽은 것이 고슴도치 같았고 아래에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아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관군은 총탄과 화살을 쏘았지만 모두 대나무 통에 차단되어 버렸습니다. 농민군은 대나무 통 뒤에서 총을 쏘며 따라오다가 고함을 지르며 뛰어들었습니다. 홍계훈의 진영은 멀리서 빤히 바라보면서 도와주지 못한 채, 그들이 사방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구경만 할 뿐이었습니다.

농민군은 도망치는 관군을 계속 추격하여 30리 지경까지 추격 끝에 「구르프포」 1좌 「회선포」 1좌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관군은 구르프포와 회선포 등 무기를 잃은 것 외에 대관 이학승과 병정 5명이 전사했습니다. 오지영의 「동학사」는 이 날 동학농민군의 전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영솔장 오하영 이방언 등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영광읍으로부터 협로로 빠져 장성 지계에 도달하자 홀연 산북편 길에서 홍장 후군 1대의 병을 만나 싸우게 되었다. ……동학군은 진중에서 미리 준비 하였던 대로 만든 「장태」수십 대를 산의 정상으로부터 내려 굴리며 관군을 사격함으로 미쳐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시살을 당하여 홍진 장관 이효응 배은환 2명과 관병 100명을 몰살시키고 대포 2문 「구르프포」「회선기관포」 각 1문과 양총 100여 개를 빼앗다.
「대장태」라고 하는 것은 청죽으로 얽어 닭장 같이 만든 것으로 그 밑에 차바퀴를 붙인것이며 그 속에는 군사가 앉아 총질을 하게 된 것으로 이 장태를 만든 사람은 장홍접주 이방언임으로 그 별호를 이장태라고 불렀다. 동학군들이 장성싸움에서 얻은 대포와 양총을 거두어 가지고 그 자취를 감추어 가면서 전주로 향하여 들어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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