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6.16 희망과 연대의 날 함께 걷자! - 송경동





1996년 4월 17일, 브라질 북부 엘도라도 카라자스에서 19명이 죽었다. “토지개혁을 위해 걷기”에 나선 ‘땅없는 농업노동자 운동’(MST) 회원들이다. 땅도 집도 없는 이들이 경작하지 않는 마카세이라 농장을 점거한 뒤, 토지 수용을 요구하며 주도인 벨렝을 향해 걸었다. 아이와 어른, 여성과 남성 3500명이 살 땅이었다. ‘토지개혁과 이주 국가협회’가 주정부와 교섭하는 데 힘을 실으려 1500명이 길을 떠났다. 걸으며 호소하는 일, 그게 전부였다. 농장에서 출발해 8일째 되는 날, 서쪽과 북쪽에서 포위해 온 헌병대는 손에 쥔 건 깃발뿐인 이들에게 총을 쐈다. ‘엘도라도 카라자스 학살.’ 해마다 그날이면 사람들은 그 자리 찻길을 19분 동안 점거한다. - 한겨레 칼럼 중에서, 2009.4.13 / 박수정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가 막히다. 지금은 그 색이 많이 바랬지만 중국 혁명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쫓기던 홍군은 대륙을 종횡단하는 ‘만리장정’에 나섰다. 1년간이나 계속된 행진 끝, 1935년 가을 대륙의 끝인 섬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처음 출발한 인원의 13분의 1에 불과했다.

1940년대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위한 베트남 인민들의 고행은 더했다. 간신히 프랑스를 밀어내자 이번엔 미군이 들어왔다. 하늘과 지상 모두 제국주의자들의 것이었다. 베트남 인민들이 맘을 놓고 걸을 수 있게 허락된 길은 땅 밑, 지하뿐이었다. 그렇게 파들어 간 일명 구찌터널의 길이는 240km였다.

1956년 11월 25일, 쿠바 혁명을 위해 85명의 전사들이 ‘그란마호’를 타고 폭풍의 바다를 향해 떠났다. 7일 만에 간신히 쿠바에 도착한 후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살아 남은 사람은 12명뿐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들의 고단한 걸음들이 모여 1959년 1월 1일, 쿠바 혁명이 이루어졌다. 일국 혁명을 넘어 세계 혁명을 꿈꾸던 체게바라는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떠났다. 처음엔 콩고였고, 두번째는 볼리비아의 험준한 산악지대였다. 전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라는, 그가 걸었던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를 보자. 그는 의사이며, 혁명가였지만, 시인이기도 했다.

적의 급습을 받은 동지 하나가 상황이 위급하다며 지고 가던 상자 두 개를 버리고 사탕수수밭 속으로 도망가 버렸다하나는 탄약상자였고또 하나는 구급상자였다 그런데 총탄에 중상을 입은 지금의 나는그 두 개의 상자 가운데 하나밖에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과연,의사로서의 의무와 혁명가로서의 의무 중에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나는내 생애 처음으로 깊은 갈등에 빠졌다너는 진정 누구인가?의사인가?아니면, 혁명가인가?지금 내 발 앞에 있는두 개의 상자가 그것을 묻고 있다나는결국 구급상자 대신탄약상자를 등에 짊어졌다

- “선택” 전문

대원들은 모두 물이 부족해 자기 오줌을 받아 마셨다 동굴 속에 감춰둔 비상식량과 의약품도 다 발각되었다 사살된 다른 부대원들의 시체들이 강물 위로 떠내려 왔다 돌아가는 정세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대원들도 가끔씩 사냥을 하며 밀림 속을 배회할 뿐이었다 난 더욱 악화된 천식발작으로 말꼬리를 붙잡고 행군해야 했다 게다가 불시에 극심한 호흡장애까지 일으켜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대원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 가슴을 힘껏 쳐야 숨통이 트였다 숨통이 트이면 이번엔 또 복통이 찾아와 바닥을 기었다 대원들도 모두 영양실조와 병에다가 전의마저도 상실한 듯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부지할 마지막 기회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다!

- “절망” 전문

1973년 9월 11일은,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주저앉던 날과 더불어 인류가 잊지 못할 날이 될 것이다. 이날 세계 최초로 선거혁명을 통해 집권했던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망명하라는 이야기를 물리치고, 눈물을 흘리는 경비대들까지 모두 내보낸 후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대통령궁을 끝까지 지키던 아옌데의 마지막 라디오 방송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무너진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이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 아옌데의 마지막 방송 중에서

아옌데가 죽고 난 후 며칠 사이에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10만명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국립경기장 안에 갇혀 있던 빅토르 하라는 노래를 부르다 죽어갔다. 반란군은 기타를 뺏어 짓밟고, 하라의 두 손을 뭉개놓았다. 그러나 피를 흘리면서도 하라의 입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곧이어 총성이 울렸다. 아옌데의 벗으로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연애 시인이자, 혁명의 시인이었던 빠블로 네루다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9월 23일 운명했다. 네루다의 관을 메고 가는 길은 죽음을 각오한 길들이었다. 옆과 뒤로 중무장한 군인들이 사람들을 향해 총을 겨눈 채 따라왔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한 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빠블로 네루다 동지는!”

순간 모두의 눈망울에 굵은 이슬방울들이 솟았다. 결코 물러 설 수 없는 길이 모두의 생에는 있는가 보았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빅토르 하라 동지는!”

빅토르 하라의 이름이 쿠테타 이후, 공개적으로 처음 불려지는 자리였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제 목이 갈라지는 울음에 섞여 절규가 되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동지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그리곤 그 노래가 들려 왔다. 1871년 3월 파리꼬뮨 이후 모든 노동자 민중의 노래. 전 세계 인민의 노래가 되었던 인터내셔널가였다. 빈틈없이 무장한 군인들이 먼저 와 묘지 반대편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총구가 모두를 겨누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목메어 외치며 뛰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은 군사 쿠테타 이후 최초의 반정부 시위로 기록되었다. 그 후 피노체트를 역사의 법정에 세우기까지 근 30여년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 졸고, <빠블로 네루다 평전>(가제, 미출판) 중에서

이게 우리의 지난 시대 걸어왔던 역사의 길이었다. 지구상의 어떤 땅의 근대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전 시대 인류의 눈물과 한숨, 가슴 찢어짐, 고통. 헌신과 희생에 의해, 강철 같은 꿈에 의해 오늘 이 정도나마의 평화와 평등이 가능해졌다. 그들 모두에게, 나의 나들에게 감사한다. 조금은 야만적이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작년 우연찮은 계기에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의 버스>에 함께 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우리 스스로 응원하고, 과찬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불의는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군부독재가 아닌 자본의 독재시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제 용산에서처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폭력에 의해 죽어가지 않고, 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럽게 죽어간다. 태연스럽게 죽어간다. 살았던 것 같지도 않게 죽어간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국군묘지에도, 4.19묘지에도, 5.18묘역에도, 솔밭산 공원에도, 모란공원에도 묻히지 못한다.

그들은 생계형 자살이나, 현실적응불응자나 의지박약자 정도로 처리된다. 따져보면 ‘학살’인데 드러나는 것으로는 ‘자살’이거나, ‘돌연사’이다. 굳이 쌍용자동차 22분의 노동자 가족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은 그들이 죽은 게 아니라, 사는 것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우리 모두가 죽어 있다. 현대판 신인 자본의 유령만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6월 16일, 토요일.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행진 “함께 걷자”>와 <집회할 자유! 연대할 권리!>가 1박 2일로 진행된다. 작년 희망의 버스를 함께 했던 분들께 다시 만나고 싶다고 호소한다. 다시 한번 걸어보자고, 다시 한번 모여보자고 호소한다.

허위를 가리기 위해 상품가치로 화려하고, 논리적으로 복잡하기만한 현실을 넘어 간명하고 소박한 미래를 생각하며 함께 걸어보았으면 좋겠다. 쌍용차 22분의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 모든 일상적 죽음, 구조적 죽음을 생각하며 걸어보았으면 좋겠다. 그날 오후 2시 22분에는 쌍용차 노동자가족들 22분의 죽음을 되새겨보는 22초간의 정지 묵상도 해보자고 한다. 작년 희망의 버스에 탔다는 이유로 지금껏 외로운 법정투쟁을 하고 있는 150여분의 기소자들에게도 응원의 목소리를 전하자고 한다.

평화로운 행진을 위해 언론사와 쌍용차 범국민대책위가 함께 공동 주최로 나섰다. 하지만 경찰들은 이런 평화마저 내줄 수 없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거나, 인도로 걸어가라고 한다. 코스를 줄이라고 한다. 장소를 바꿔 남산 올레길이나, 무슨 한강변이나 걸었으면 하는 눈치다. 그렇게 걸었다면 아마도 인류의 역사는 지금만큼 나아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 할까. 경찰과 정부는 작년에도 평화로운 사람들의 연대를 사회적으로 왜곡하고, 폭력적으로 막아서면서 오히려 국민들의 공분을 키워 주었다. 희망의 버스의 여파로 거의 총선은 야당의 압승으로 나아가는 기세였다. 놀란 구 한나라당이 환경노동위 의원들을 내세워 쥐새끼처럼 숨어 있던 조남호를 끌고 오고, 족치고 해서 간신히 우리를 잠재울 수 있었다.

걸을 바엔 좀 더 큰 꿈을 갖고 걸어 보았으면 좋겠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2400여명의 복직만이 아니라, 고작 ‘함께 살자’라는 상식적 요구일 뿐인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부분적 요구를 넘어 ‘모든 공장의 사회화’, ‘모든 자본의 공공화’ 뭐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꿈을 꾸며, 좀 더 아름답고 평등한 사회로 가는 큰 꿈을 안고 걸어보았으면 좋겠다. 이런 꿈꾸기가 무슨 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만 봐도 그렇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 - 대한민국 헌법 전문 중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고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하기 위해서 전체 사회 부의 90% 가까이를 소유하고 있는 1%의 부자들의 무한 독점은 근절되어야 한다. 900만의 비정규직 가족들은, 국민들은 ‘궁민’들이 되어 있다. 그들,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은 ‘영원히 확보’되지 않고 있다. 그들(노동자/민중=국민 대다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균등’이 아닌 ‘차별과 소외’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인 ‘궁민’들은 하루 먹고 살기도 버거워 밖으로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기회조차 없다. 전두환과 노태우만 헌정유린 세력이 아니었다. 진정한 헌정 유린 세력들은 사실은 이 시대의 독점 자본가들이다.

돌아보면 코미디 같은 세상이다. 일할수록 더 차별받고 가난해지는, 기본 산수도 안 되는 세상이다. 꿈꾸는 자들이, 제 정신을 갖고 살려는 사람들이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6월 16일 우리들의 행진은 철부지들의 걷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권위를 버리고 순박해진, 즐거워진 사람들의 걷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밝고 맑고 투명한 이들의 희망의 난장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행이 이젠 총을 맞지는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줄줄이 의문사 당하거나, 고문당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구속 수사보다 불구속 수사가 많다. 가난한 살림에 벌금이 가끔 무서울 뿐이다.

그런데 그 무엇이 두려우랴. 우리도 이젠 우리 전대의 인류들이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랬듯이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의 영원한 확보를 위해 다시 새로운 역사의 길로 나설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역사적 생명의 퇴화가 아니라 진화를 위해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인간다움을 이제 그만 꺼내들어야 하지 않을까. 부동산 투기에, 살인적인 물가에, 등이 휘는 교육비에, 버거운 의료비에, 최소한의 일자리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향해 함께 걸어라도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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