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훈 기자의 서울 인근산 샅샅이 훑기> 북한산 서부능선





104년만의 가뭄 끝에 내린 달디 단 장맛비. 온 국민이 갈망했고 그토록 원했던 비님이기에 기쁨은 더했다. 서울 인근 양평에서 주말농장을 하는 가까운 지인의 흡족한 얼굴이 떠오른다. 평소 지독한 가뭄 땜에 작물이 말라 죽어간다고 하소연했었는데….

다음날인 흐릿흐릿한 일요일 아침. 북한산 족두리봉 자락아래 불광역은 그야말로 초만원이다. 오늘만큼은 바짓가랑이에 먼지 가득 담을 일 없어 많이들 몰려 나왔나보다.



일전에 기자가 한번 동행했던 ‘재경남해군미조면산악회’(회장 김두오)와 두 번째 산행이다. 낯익은 몇몇 회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장미동산 거북약수터에서 재집결하여 인원 점검 및 산행코스에 대해 산악회 임원진의 설명이 곁들여지고 이어서 긴 행렬이 움직인다.

장미동산 언덕 팔각정 쉼터까지의 숨 차는 오르막길도 오늘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바닥에 흙먼지도 없고 물기를 머금은 주변의 나무들은 싱싱함을 더해준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이 다시금 마음을 울린다. 눈물 젖은 두만강만 심금을 울리는 게 아닌가 보다.



정부의 가뭄대책 예산으로 책정된 700여억원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어제의 소나기. 어느 정치지도자가 이렇게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한없이 기분 좋은 산행길이다.

장미능선에 펼쳐진 행렬들이 마치 명절날 고향 가는 귀성인파를 연상시킨다. 탕춘대 성암문에 들어서니 구기동 방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일행을 반긴다.



잠깐의 휴식을 뒤로 하고 탕춘대 능선을 올라간다. 흐린 날씨로 인해 직사광선을 받지 않아 더더욱 상쾌함이 배가된다. 습도는 다소 높지만 속도를 조금 내어본다. 10여 분을 사정없이 내달으니 이마에 약간의 땀방울이 모아진다. 뒤돌아보니 일행들 안중에 없다. 여기는 비교적 단조로운 코스니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이번엔 등짝에 땀방울 수집하러 내달린다. 제법 숨이 가빠온다. 옛 탕춘대 매표소 입구에서 비로소 속도를 멈추고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얼려온 차디 찬 물이 몸속을 스며든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기다린다.

눈앞에 보이는 족두리봉에도 사람들이 많이 붙어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앉은 딱새가 내심 불안한 듯 하늘로 치솟는다. 잠시 후 일행들과 합류하여 향로봉을 향한다. 우리 거시기한 편집장, 최근 들어 기자에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형님, 또 탕춘대, 향로봉, 비봉입니까? 북한산의 다른 코스는 눈에 안 들어옵니까.”



“오늘만 시원하지, 한 여름 땡볕에 험한 봉우리 타는 게 그리 쉬운감.”

학교도 여름방학이 있고 기업도 하계휴가가 있는 법인데, 이 나이에 내가 이 정도면 됐지 더 얼마나…. 나이가 벼슬은 아니라지만(눈을 약간 흘기면서 얘기를 해야 먹힐 건지).

마침 미조산악회의 7월 산행 스케줄이 전반기 결산 및 하기휴양 삼아 간단히 트레킹 코스를 돈 후 근처 물가에서 식사를 하는 걸로 잡혀 있다니 멀리 가고 싶어도 못가는 신세다. ‘차마고도’를 지나 향로봉 오거리에서 왼쪽계단을 따라 각황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곳 또한 평소의 흙먼지는 간데없고 뒹구는 낙엽에 레드카펫 밟는 기분이다. 굳이 베니스나 칸, 베를린 영화제에만 등장하는 레드카펫이 다는 아니지 않은가(뒷동산 타면서 가져다 붙이기는).





얼마를 내려가니 계곡의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얼마만의 고향산천 물소린가. 맑고 깨끗이 정제된 물들이 졸졸졸 흘러내린다. 이 물이 지나가면 다음 물이 다가오고. 우리네 흘러가는 인생살이와 너무도 흡사하다. 갑자기 풍류가 그리워진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노라….”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했다는 시조 ‘청산은 내 뜻이요’다. 이 대목에서 막걸리 한 사발 목추김해야 하는데. 에그, 조금만 참자.

넓은 공터가 있는 삼거리에서 오른쪽의 냇물이 흐르는 좁은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돌다리를 지나면 나타나는 휴식공간. 평행봉도 있고 철봉도 있는 이곳이 오늘의 식당이다. 미조 산악회 여성 세프들의 산상뷔페가 자못 궁금하다. 오늘은 무엇이 기자를 경악시킬지 사뭇 귀추가 주목된다. 긴장감속에서 펼쳐지는 음식들. 그리곤 모두 말이 없다. 고사리나물, 고구마순나물, 가죽나물, 옻나물, 가지찜 등 각종 나물들, 장떡, 산적, 동그랑땡 등 전 종류. 특히 매운고추 간 것을 부추, 고추장과 함께 밀가루에 섞어 전을 부쳤다는 장떡이 인상적이다. 나중에 먹어보니 매콤하면서도 담백한 맛을 안기는 게 가히 안주용으로 일품이다. 여성 산행대장인 김민주 대원의 전설적인 작품이다.



방어찜(일명 히라스)은 모 대사관에 근무하는 최일범 대원의 단골메뉴. 지난주에는 다금바리찜을 가져와서 감동을 안겨준 장본인이다. 또한 대구찜, 코다리찜, 북어찜, 우럭찜 등 여러 가지 찜 종류들, 민물 참게로 담은 게장, 남해 죽방멸치에 꽈리고추를 버무린 멸치볶음, 족발, 그리고 바나나, 딸기, 토마토, 수박 등 후식용 계절과일들. 오이지와 김치는 필수. 쉼 없이 들려오는 시원스런  계곡의 물소리. 이러니 말이 없는 게 당연하지. 떠들어봐야 음식에 침밖에 더 튀겠는가.

남해사람들은 여타 지방출신들과 다른 점이 바닷가 해산물이 주류를 이루는 요리를 만들어서 오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론 산에서 김밥, 내지는 상추쌈에 돼지고기볶음 정도인데 이 분들은 향토특산물을 즐겨 먹는다. 가히 등산길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별미들이다.



김두오 회장님의 인사말과 김남순 총무의 경과보고 및 김민주 산행대장의 산행일지보고를  듣고 드디어 오찬이 시작된다. 기자, 젓가락이 어디로 튈지 몰라 허공을 두어 번 휘젓는다. 차려진 음식들 한번 씩만 맛봐도 반나절은 걸리겠다(심하다 심해…). 막걸리 한잔에 이런저런 정담(情談)들 나누면서 야외식당의 분위기는 무르익어만 간다. 두 어 시간여 식사를 마치고 각자 짐을 꾸린다. 직전 회장께서 한마디 하신다.

“지금 배도 부르고 시간도 이르고 하니 왔던 길로 다시 올라가서 하산합시다. 그래야 내려가서 시원한 뒤풀이 생맥주 한잔 들어갈 것 아니겠소.”

등산이 어려운 몇 사람을 제외하고 다시 올라간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서 홍은동에서 올라오면 나오는 탕춘대 길목으로 향한다. 몸속의 취기가 얼굴로 전해져 벌겋게 달아오른다. 기자, 평소 숙달된 조교인지라 별다른 고통을 못 느낀다.

선두, 일행들 취합하기 위해 아름드리 송백나무 숲에서 휴식한다. 힘은 들어도 모두들 얼굴이 밝다. 하기야 반가운 고향 까마귀 만났는데 청포에 몸 씻은 백로가 시비 건들 싸움이 되겠는가. 대원들 삼삼오오 모이니 다시 출발이다. 탕춘대 길목에서 장미동산길로 접어든다. 제법 땀이 난다. 저 건너 족두리, 향로, 비봉이 사모바위의 넓은 마당에 내려앉기라도 하듯 날갯짓을 하고 있다. 장미동산 끝물인 팔각정 쉼터에서 거북약수터로 내려온다. 뒤풀이 장소는 불광역 2번 출구 블랙야크 매장 2층의 ‘알바트로스’(02-383-7235) 호프집이다. 며칠 간 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날 수 있다는 알바트로스. 한국에서는 나그네 새로 불린다. 골프에서 파 5홀에서 두 번 만에 공을 홀컵에 넣었을 때를 알바트로스라 칭한다. 새가 공을 물고 멀리 날아와서 넣을 때만 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뜻이다. 테이블가운데 이동식 칸막이를 제거하니 30명 가까운 인원이 양쪽에서 마주보고 마실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진다. 술잔이 삽시간에 테이블에 도착한다. 모자(母子)가 운영한다. 말하지 않아도 호흡이 척척 맞는다. 다음을 기약하는 잔들을 부딪치며 오늘도 무대의 막은 서서히 내려오고 있다.

선임기자 jkh414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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