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밥값으로 머윗대 벗기는 엄마


어떤 사람이 그랬지요. 인간의 뛰어난 자질은 회상의 능력이라고, 아주 뛰어난 사람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회상한다고 말했지요. 세상에,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겪어보지도 않은 미래를 상상도 아니고 회상을 한다니. 백 퍼센트 완전 거짓말 같은 이 말이 나를 자꾸 끌어당기는 이유를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을 거예요.
 
잠에서 깨고도 눈을 뜨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지요. 새소리가 들리더군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아직 여섯 시는 안 됐고 다섯 시는 넘었겠다,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요. 그러고도 한참을 눈감고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다가 깜짝 눈을 뜨고 말았어요. 잠에서 깨고도 한정 없이 눈을 감고 있기란 사실 어려운 거잖아요.

아직 해는 안 뜬 것 같더군요. 해가 뜨면 햇살이 화장실 창문을 거쳐 부엌을 지나 방안의 시디 케이스에서 딱 부딪쳐 멈춘단 말이거든요. 6월부터 9월까지 여름 한철은 항상 그래 왔어요. 그래서 굳이 시계를 안 봐도 시간을 알아요. 그래서 어떤 날은 해뜨기 전에 얼른 일어나야겠다, 하고 후딱 일어나기도 하지요.

하지만 오늘은, 눈을 뜬 채로 가만히 있었지요. 마루 저 녀석이 또 날아가는 새를 보고 짖어대는구나, 그런 생각도 하고, 울타리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를 듣고는 아, 교회의 사무장이 오늘은 출근이 조금 빠르구나, 그런 생각도 하고, 등등, 그러니까 아무 쓸데없는 생각만 열심히 해대면서 가만히 누워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날은, 글쎄 뭐, 딱히 무슨 이유를 찾아볼 필요나 있을까? 열심히 찾아본다 한들 이유라는 것이 나와 주기나 할까? 그래요. 이런 날은, 그냥 현실을 보면서도 현실이 아니라고 슬쩍 비켜가고 싶은 거예요. 현실을 비켜나서 미래를,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누구한테서 들어본 적도 없는 ‘죽음 뒤의 일을 회상’해보고 싶은 거예요.


# 밥값한다고잔디뽑는엄마


엄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날개는 달았을까. 별은 손에 넣었을까. 내가 한때 당신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는 있을까. 그래서 훗날 내가 ‘그곳’으로 갔을 때 나를 알아보고 작은 미소라도 지어줄 수 있을까. 만약에 나만 엄마를 알아보고 엄마는 나를 못 알아본다면 나는 어떻게 하지?

엄마.
살면서 이런 말을 해야 할 날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사람도 있을까? 아 진짜, 이런 말을 해야 하다니. 이런 말을 해야 하는 날도 있을 수 있었다니.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응? 엄마, 아이 씨이, 엄마, 엄마아. 오늘이 엄마 제삿날이라고요, 제삿날. 알어?

사실은 나도 잘 몰랐어요. 보름쯤 됐나. 그때 어느 날 철이가 전화를 해 와서 한참을 옥신각신 했지요. 내일이 엄마 제사라고, 그래서 내려온다는 거예요. 깜짝 놀랐어요. 나는 음력 날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철이는 양력을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과학적으로 손가락을 꼽아보기로 하자면 양력으로 하는 게 삼백육십오일 일 년에 부합하겠지만, 엄마는 양력을 낯설어 했으니까, 엄마가 익숙한 음력으로 엄마의 제삿날을 정하고 보니까 약간의 혼란이 생긴 거예요. 게다가 올해는 윤달까지 끼어 있었단 말이거든요.

아무튼 이제 그날이 왔어요. 엄마의 제삿날, 나는 아침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빗자루질도 하고, 걸레질도 하고, 천장에 거미줄도 좀 걷어내고, 등등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그냥 누워 있고만 싶은 거예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해가 뜨건 말건, 새가 울건 말건, 바람이 불건 말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그냥 있어 버리고 싶은 거예요.
“써글놈, 믓허냐.”

천장에서였을까? 아니면 마당에서? 하여튼 문득 그런 소리가 들리더군요. 아니 어쩌면 듣고 싶은 소리였던 것인지도 몰라요. 엄마가 씩씩했던 시절에 아들을 나무라던 그 소리. 벌떡 일어나서 앉았지요.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젖 안 뗀 아이처럼 모로 누운 채 입술이나 씰룩이고 있어서 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화장장에서


김소희 선생의 상주아리랑을 골랐지요. 진도아리랑도 있고, 밀양아리랑도 있고, 정선아리랑도 있고, 많고도 많은 아리랑 중에서 하필 상주아리랑은 고른 이유는 그냥, 오늘 같은 날은, 어쩐지 그게 적합하다 싶어서 말이에요. 그것을 무한반복으로 설정해놓고 청소를 시작했지요. 빗자루를 들고, 걸레를 빨고, 천장에 거미줄도 좀 걷어내고, 여기저기 도처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내려앉아 있는 먼지도 닦아내고, 그러면서 김소희 선생을 따라 상주아리랑을 불렀지요.

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노래를 따라 부르며 청소를 하고 있다 보니 인생이란 게 참 그렇구나 싶기도 하더군요. 이글이글한 뙤약볕 속에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지고 죽음의 동산을 뻘뻘 올라가는 게 인생이구나 싶어지면서 눈물 한줌이 울컥 쏟아지더라고요. 그것을 손으로 받았지요. 받아서 혀에 대고 맛을 보았지요. 찝찔한 그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소설가 박상륭 선생의 작품 ‘뙤약볕’이 생각나더군요. 이어서 ‘죽음의 한 연구’가 생각나더군요. 아, 그것은 정말 대단한 소설이었지요. 너무나 엄청나서, 지금 다시 읽으라면 아마 못 읽을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열정이 그때만 못하니까요.

그래요. 소설 한 편을 읽는데도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지요. 하물며 인생 전반임에랴. 그래요. 열정, 이 단어는 엄마의 생애와 막바로 연결이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내 기억으로 엄마는 삼십대 중반까지만 해도 잔병치레가 많았지요. 거의 아무것도 못하고 앵두나무 밑에 우두커니 앉아나 있었어요. 가끔은 토끼들 풀 먹는 모습을 한나절씩 지켜보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그 시기를 지낸 뒤의 엄마는 이상한 ‘열정의 덩어리’가 되어갔지요.


# 이때가 가장 좋았던 듯


하루라도 일을 안 하면 밥도 굶어야 한다는 생각, 그렇다고 자식들에게까지 그것을 권하지는 않는, 엄마 혼자서만 마치 당신 자신에게 무슨 형벌이라도 부과하듯이 밤이면 밤, 아침이면 아침, 낮이면 낮, 겨울이면 겨울에 할 만한 일을 찾고 여름이면 여름일을 찾아서 했던 엄마는, 엄마는 기어이 중증치매라는 거의 백퍼센트 기억상실, 아니 세 살 바기 어린애가 되어버린 와중에서조차 밥값을 해야 한다고,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늘 안절부절 못해 하셨단 말이거든요.

엄마가 죽음의 선고를 받았을 때,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엄마의 그 모습이 눈에 자꾸 어른거려서 내 안의 무엇인가가 자꾸 찢어지더라고요. 얼마나 자기세뇌를 지독하게 해버렸으면 그렇게 자식을 자식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오빠라고 하면서 까지도 밥값을 해야 한다고, 일도 안 했는데 무슨 밥을 먹느냐고, 그런 말이, 응? 아이고 참 내, 지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의 입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엄중하게 도덕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녹음기처럼 되풀이할 수도 있는 것인지, 나는 그런 엄마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툭하면 허허허, 웃어대곤 했었단 말이거든요.

그때의 그 웃음,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도 큰소리로, 그렇게도 원 없이 지속적으로,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웃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엄마,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엄마와 함께 했던 그 삼 년여의 눈물 나는 세월이 내게는 결국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 이상한 시간 속으로 나는 지금 들어와 있는 거예요.

장례식장에 쭈그리고 앉아서 줄곧 했던 생각도 그것이었지요. 아이러니, 역설, 인생이란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날 필요도 없는, 웃으면서 울고, 울면서 웃는 것이로구나. 이것이 인생이로구나. 어느새 <현비유인고흥유씨신위>가 되어버린 엄마의 사진 속 얼굴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란 도대체 그것 말고 무엇이 또 있었을까, 응? 어쨌든 사람들은 부지런히 오고, 그리고 가고 있었지요.


# 엄마의 오른손


그 옛날 엄마가 뙤약볕에서 죽어라고 농사지어 놓은 고추를 삼백 근도 넘게 팔아준다고 가져가서는 소식을 딱 끊어버렸던 친척놈 하나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조문이랍시고 왔더군요. 그놈의 전과는 사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내가 명색이 결혼이랍시고 하던 날, 서울의 지인들이 보내준 봉투까지 시침 딱 떼고 ‘인 마이 포켓’ 해버린 그런 못된 싸가지도 있고 등등 숱하게 많지요.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요. 그놈을 만나면 대번에 허리를 분질러 놓겠다고, 오래 전에 이미 각오를 해놓고 있었건만, 그날 얼굴을 보는 순간 그런 감정은 하나도 안 일어나고 불쑥 이런 소리가 나와 버리더군요.

“여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건 도무지 내 말이 아니었지요. 내 스타일도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나는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더군요. 그래요. 그것은 내 말이 아니었어요. 엄마의 말이었어요. 나는 단지 엄마에게 내 입을 빌려주고 있었던 것일 뿐이에요. 미워해야 할 그놈이 술을 마시고 껄껄거리며 술잔을 나한테 건네고 있을 때, 그때 갑자기 엄마를 만져보고 싶더군요. 머리를 빗기고, 손톱을 깎고, 발을 씻기고, 빤쓰도 갈아입히고, 꽃자주색 주름치마에 연두색 블라우스를 입혀서 휠체어에 태우고 가까운 어디로 꽃놀이라도 가고 싶어지더군요.

입관할 시간이 되었다고, 내려가자고, 그래서 내려갔을 때, 그때 엄마는 거대한 냉장고에서 나오고 있었지요. 냉장고에서 절반쯤 얼려진 채로 나온 엄마의 손을 잡았지요. 만지면 금방 혈관이 드러날 것 같은 팔뚝을 문질러도 보았지요. 간지럼을 태우면 금방 웃을 것 같은 얼굴을 비벼도 보았지요. 이상하더군요. 굉장히 차가울 것 같았는데 하나도 안 차가웠어요. 차갑다는 느낌도 없고, 따뜻하다는 느낌도 없고, 그냥, 엄마라는 느낌만 있었지요.

동생들은 뒤에서 울고만 있더군요. 아무도 달려와서 엄마를 만져보지는 않고 그냥 울고만 있었어요. 무서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압도되었던 것일까요. 하긴 나도 어느 정도는 압도당하고 있었지요. 죽음이 죽음 같지 않은,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도 장례를 치른다는 느낌은 없고 무슨 큰 수술이라도 끝난 뒤의 병실에라도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그러고 보면 엄마는, 너무도 깔끔하게, 너무도 정갈하게, 미치게도 아름답게 눈을 감으셨어요.

병실에서 눈을 감고 있던 중에 떴다가, 또 떴다가, 한 번 더 떴다가, 그리고는 다시 안 뜨고 어딘가로, 마치 약속의 땅이라도 찾아가듯이, 그 어떤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익숙하게 가버리고 있었던 거예요. 무정도 하지. 그동안 그렇게도 줄곧 아들을 오빠라고 불러댔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라도 아들아, 수복아, 그렇게 불러주면 안 될 이유는 또 뭐야. 소리를 못 내겠거든 입이라도, 입술이라도 두어 번 달싹거려줄 수도 있는 거잖아. 그저 눈만 세 번 떴다가 감고는 그대로 그냥 가버릴 건 뭐냐고요.

그렇다고 엄마를 원망한다는 건 아니에요. 알아요. 나도 안다고요. 엄마가 만일 내 이름을 불러주었더라면, 자식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이름을 불러주었더라면 엄마의 장례가 그토록 담담하게 치러질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요. 엄마는 절간의 선승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선정에 들었을 때처럼 그렇게 눈을 감은 듯이 뜬 듯이, 숨을 쉬는 듯이 안 쉬는 듯이, 그 어떤 회한도, 원망도, 미련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도 담담하게 가셨지요. 가셔 버렸지요.


# 엄마의 왼손


화장장에서 만난 엄마는, 아, 그 모습은 참 괴로웠어요. 하지만 이내 평온을 찾았지요. 괴로운 깨달음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래요. 유리벽 저 안쪽에서 안내원이 마지막 인사를 드리라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보여준, 우유를 깨끗하게 말린 것처럼 뽀얗게 하얀, 매우 건조한 느낌의, 그새 한 바구니의 뼈로 변해 있는 엄마를 보면서 우리는 순간적으로 깨닫고 있었지요.

젖 안 뗀 늦둥이 아이처럼 칭얼거리기만 해온 자식들에게-이제 더 이상 너희가 기댈 곳은 없다, 각자 혼자서 가야 한다, 만져볼 생각도 말아라-이런 충고를, 경고를, 선언을 누가 하고 있었던 것인가. 어쨌든 우리는 그것을 알아버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말문을 잃고 천장이나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일 년, 제삿날이 왔다고 청소를 하는 둥 이것저것 마음을 쓰고 있는 내 머릿속으로 아주 신통한 생각 하나가 기웃거리더군요. 만져볼 수도 없는 엄마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 그게 뭐냐 하면, <현비유인고흥유씨신위>가 되어버린 엄마에게 이름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뭐 그런 것이에요.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나로서는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으니 존재사실조차도 전설적인, 어떤 경우에도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그 외할아버지가 엄마의 이름을 봉춘이라고 지었을 때는 뭐랄까, 그 마음에서 아마 화사한 꽃이 피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봉춘, 지금이야 그 이름이 겁나게 촌스럽다는 느낌도 있지만, 팔십여 년 전 그 당시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네이밍’이었겠는가, 만날봉(逢)자에 봄춘(春)자라, 아 좋다, 아무렴, 인간의 운명이란 모름지기 봄날 같아야지. 하셨겠지요.

바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나는 엄마에게 돌려드리고 싶은 거예요. <현비유인 고흥유씨>아닌, <현비유인 유봉춘>, 이렇게 말이에요. 그런데 아우들이, 그리고 엄마의 조카들이 나의 이런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까지는 내가 아직 모르겠네요. 만약에 그들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반대한다면, 내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을 거예요. 다음을 기약하며 일단은 포기할 생각이에요.

그런 뒤에 나는 이제 여행을 떠날 거예요. 엄마 없는 이 집에서 엄마를 생각한다는 것은 이게 글쎄, 엄마에게도 썩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니까 이제 그만 젖을 떼고 싶어서, 나로서는 처음 보는 어느 낯선 거리에서 나를 좀 키워 오고 싶어요.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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