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당귀


엄마. 지난달이었지요. 아주 기막히게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어요. <위클리서울> 커버에 ‘박카스 아줌마는 왜 늘어날 수밖에 없는가?’라는 제목이 실려 있었는데요. 처음에는 이게 뭔 소린가 했지요. 박카스 아줌마, 늘어난다, 왜, 이렇게 삼등분을 해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어요.

내가 그런 버릇이 좀 있단 말이거든요. 책이든 기사든 논문이든 제목에서 뭔가 추론 가능한 것이 잡히지 않으면 여간해서 페이지를 못 넘긴단 말이에요. 그런 버릇은 사실 일종의 전략이긴 해요. 제목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나를 잡아당기지 않으면 그냥 건너뛰는 것 말이에요. 한참 읽다가 실망해서 중단하고, 그래서 입맛을 쩝쩝 다시며 벌떡 일어서 버리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아예 안 보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여기니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어쨌든 말이에요. 박카스 아줌마에 관한 기사의 제목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영 오리무중인 거예요. 박카스 아줌마가 늘어나는데 그게 뭐 어째서 취재를 했단 말인가, 그리고 박카스 아줌마란 또 뭔 소리지? 뭐 이런 정도에서 한 뼘도 나아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렇게 되면 건너뛸 수도 없는 것이란 말이거든요. 무조건 읽어야만 해요.

그래서 일단 페이지를 넘겼는데요. 오, 이런 세상에 이게 뭡니까. 한눈에 쏙 들어오는 활자들이 이렇게 돼 있더라고요.

서울 종묘공원 일대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는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가 급증하고 있다는 첫 문장에서부터 극빈층 생계형 박카스 성매매,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 150여 명 추정, 전업주부로 살다가 생계해결 위해 노년기에 발담근 경우도, 인간답지 않게 살아온 인생 억울하지만 다른 방법 없어, 등등의 소제목들이 내 눈을 마구 흔들어놓고 있더라고요.


# 자료사진, 기사와 관계없음.


왼쪽에서 한 문장, 오른쪽에서 두세 문장, 그렇게 대충 훑어보다가 그만 신문을  덮고 말았어요. 가슴이 순간적으로 꽉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더라고요. 일단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대접 마셨지요. 그 뒤에는 방안을 한참이나 오락가락했어요. 그야말로 주마등같은 것들이 눈앞으로 홱홱 지나가더군요.

생각해보면 내가 종로 일대의 공원들과는 인연이 매우 깊단 말이거든요. 팔십년대의 그 엄혹한 시절이 내게 준 추억이이지요. 최루탄에 절어버린 몸뚱이를 이끌고 봉천동 사글세 집까지 갈 수가 없어서 일단 무조건 공원으로 스며들어가서 밤을 세곤 했단 말이거든요. 밤이 깊어지면 통행을 금지하는 시절이었으니까요. 밤에만 그랬던 것은 아니에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한국 최초의 대형서점인 종로서적이 근처에 있었단 말이에요.

그 책방에 들어가서 돈 주고 책을 사지는 못하고 몇 시간씩 선 채로 책 한 권을 다 읽어치우곤 했단 말이거든요. 책 한 권을 도둑으로 다 읽고 밖으로 나오면 심신이 아주 그냥 파김치가 되어서는 하늘이 핑핑 돌고 땅은 마구 일어서고 난리가 아닌 거예요. 그러면 나는 비틀걸음으로 근처의 공원으로 가서 장의자에 발랑 드러누워 하늘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한참을 누웠다가 가끔 할아버지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기도 했던 거예요.

바로 그곳, 그 자리에서 오늘날 먹고살 방법이 묘연해져 버린 아줌마 아니 할머니급 여인들이 박카스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할아버지들의 관심을 유도한다지 뭐겠어요. 많으면 삼 만원에서 적게는 세상에, 삼 천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격으로 자신의 몸을 판다는 거지 뭐겠어요.

그러면 이 아줌마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기사에 따르면 젊어서부터 유흥업소 일을 해온 사람도 있지만 대개가 식당 일도 못할 정도로 몸이 부실해져버린 도시빈민들이라네요. 그러면 이 도시빈민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요. 도시가 도시로서의 기능을 정지하지 않고 계속 팽창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 몸으로 일해 온 사람들, 그러니까 사실상 도시를 부양해온 사람들이 도시빈민들이란 말이거든요.


# 백합


그러면 그런 중년 혹은 노년기 여성들의 성을 단돈 삼 천원이나 혹은 삼 만원에 구매하는 남자 노인들은 또 어떤 사람들일까요. 아, 이건 참 어려운 문제인데요. 이런 문제들을 나 혼자서 자문자답 식으로 했던 건 아니고요. 엄마, 나는 지금 여행 중이에요. 엄마의 소녀 시절을 찾아보고 싶어서 말이에요. 장성에 와 있어요. 지금 이 글은 장성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 장뇌삼 기르는 사람의 컨테이너 안에서 쓰고 있어요. 어쨌든 그 기사를 본 뒤로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리고 그 반응을 살피고, 토론까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이야기를 나눴어요.

어떤 사람은 매우 독특한 사례 하나를 제시하더군요. 몇 년 전 어느 지자체에서  모자라는 농사인력 수급을 위해 도시의 노숙자들을 끌어들이기로 했었다나요. 기획에서 실행까지 제법 많은 경비를 들여서 도시의 노숙자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여기저기 각종 작물들이 자라는 곳에 투입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전이 지나고, 오후 간식이 끝난 뒤에 보니까 구십오 퍼센트 이상이 도망을 가 버리고 없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긴 농사인들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노숙자들의 마음에 어떤 빛이 되어줄 수는 없겠지요. 과거에는 흙에서 나온 것들이 함부로 버리거나 짓밟아서는 안 되는 신성한 생명이었지만, 오늘날의 농산물은 막바로 돈으로 환산되는 그저 하나의 물질일 뿐이란 말이거든요. 게다가 온 종일 땀 흘려 일을 해봐야 몇푼 되지도 않는 일당을 받게 되어 있고, 그러니 도시의 소비생활에 익숙한 노숙자들이 농사일에 맛을 들일 수는 없었던 것이겠지요.

그 이야기와 도시 노인층의 성매매는 사실 뭐 그리 큰 관련도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 주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토론을 했지요.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농사일은 못하겠다는 심리는 언제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는가 하는 뭐 이미 답이 나와 있는 토론이었어요. 이른바 시장경제가 심화되면 될수록 서민층은 일할 맛을 못낼 것이라는 저 유명한 이론 말이에요.


# 땅만 마르지 않으면 옥수수는 열린다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짐 자무시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이 생각나더군요. 자본 위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사회에서 서민층 젊은이들은 사기도박을 하거나, 경마나 경륜 등 사행성 시장에 온 몸을 던지거나, 마약판매 조직이나 조폭들이 실수로 떨어뜨린 뭉칫돈을 줍거나 하기 전에는 절대로 큰돈을 만져볼 수 없다는, 벌어들일 수도 없다는 메시지가 은근히 깔려있는 게 영화 <천국보다 낯선>이란 말이거든요.

오래 전에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그때 나는 머릿속이 어찌나 크게 뻥 뚫리는 것 같았던지, 그냥 땅을 치면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댔지요. 왜냐하면 나는 그때 내가 도시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있다는 공포에 잡혀 있었으니까요. 왜 그런 공포가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는가 하면, 사실을 말하자면 그 이전까지의 나는 그런대로 모범적인 국민이었단 말이거든요.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권장하는 적금을 넣고 있었으니 말이에요.

적금을 계약할 때마다 내 나름의 목표가 있었지요. 최소한 창문이 두 개 정도는 있는, 샤워기가 딸린 화장실이 있고, 부엌과 방이 완전 분리된 전세방을 갖는다는 목표 말이에요. 2년 정도 적금을 불입하고, 만기가 되어 그것을 타면, 그때 바야흐로 그런 방으로 내가 이사할 것 같아서 적금을 계약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2년 만기가 되었을 때 보면, 내가 목표로 했던 방으로 내가 이사를 가려면 다시 또 2년 정도를 새로운 적금에 매달려야만 가능하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러면 2년 뒤에는 정말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모르지요. 아무도 몰라요.

그 이상한 속임수 같은 현실에 실망해서 나는 그만 적금 탄 돈으로 술을 마셔버린단 말이거든요. 나름 근사한 방을 구하려 했는데 돈이 너무 모자라니까, 2년 뒤에는 틀림없이 차고도 남으리라 여겼는데 차고 남기는커녕 모자라니까 이게 온전한 정신으로는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는 거예요. 미쳐버리고 싶지만 미쳐지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일단 술에 나를 맡기고 나중에 후회하는 되돌이표 속으로 빠져드는 거예요.


# 물만 줘도 열리는 토마토


그 지독한 되돌이표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던 거예요. 도시는 서민들을 식량으로 자신의 몸집을 불린다는 것을 말이에요. 내가 현실에 실망하고 절망해서 술로 탕진하고 있을 때의 그 술값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아 정말이지 미칠 것 같더라고요. 그런 미칠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부터 나는 이제 도시 탈출을 꿈꾸게 되었던 것인데요.

농촌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고요. 도시란 끝없는 소비의 연속이라는 거, 소비의 되돌이표 속에 인간이 꼼짝 못하고 갇혀 있다는 거, 그런데 그것이 모든 생명은 먹어야 존재한다는 식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구조인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 짜놓은 거미줄이라는 거, 이런 것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더라고요.

이를테면 명절 같은 때, 도시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가져오는 선물 보따리를 보면 대기업 제품 아닌 게 거의 없어요. 심지어는 참기름 한 병을 사도 도시에서는 대기업 브랜드 것을 사게 된단 말이거든요. 대기업 상표가 붙은 제품은 일단 믿어도 좋다는 국가 차원의 보증이 되어 있으니까 손이 자동적으로 그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국가와 대기업은 한패인 것일까요? 슬프지만 그렇게 밖에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 같아요.

대기업은 세금을 많이 낸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하고 큰소리를 치고 있고 국가는 또 대기업의 그런 큰소리를 맞다고 인정해주고 있단 말이거든요. 그런데 대기업이 내는 세금이란 것이 따지고 보면 죄다 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고, 서민들의 주머니에 일시적으로 들어갔던 그 돈이란 것도 결국은 대기업이 요구하는 노동을 죽어라고 해서 발생한 것일 뿐이란 말이거든요. 그러면 이게 뭐냔 말이에요. 이른바 서민이란 존재는 그렇게 평생을 대기업에 발목을 잡힌 채로 헉헉거리다가 늙어간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 거잖아요.


# 복사꽃을 보자고 심었는데 열매도...


그러면 늙은 뒤에는 어떻게 되나요. 앞서 말한 ‘박카스 아줌마들은 왜 늘어날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답이 되고 마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거잖아요. 노인들은 오늘날의 국가를 가능하게 한 일등 공신임과 동시에 오늘날의 대기업을 존속 가능하게 해준 일등 공신이기도 하단 말이거든요. 그런데도 국가는 서민층 노인을 ‘노인문제’라는 명칭을 붙여서 슬쩍 뒤로 미루고나 있고, 대기업은 아예 거들떠도 안 본단 말이거든요.

오래 전에 에밀 아자리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복을 가져온다 해서 노인을 아주 극진하게 대우한다….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그런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프랑스 사회의 빈민층 노인들에 대한 박대와 무례가 아마 극심했던 모양이에요. 그 무례를 열네 살짜리 소년이 알아차리고 이렇게 절규하듯이 말하지요.

“난 절대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되길 바라요. 정상인 놈들은 언제나 나쁜 놈들이니까.”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대기업이나 정부 당국자들의 눈으로 보자면 극빈층 노인들을 사람으로 예우해야 한다고 외치는 일부 인권운동가들이나 인도주의자들이 비정상이겠지요. 그래서 노인들을 해답 없는 문제로 치부하고 골치 아프다는 소리나 중얼거리는 것이겠지요.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부자되세요’에 두고 있는 한 이러한 태도가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요.

그런데 ‘부자’라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는 것일까요. 부자가 된 뒤에 그 부를 어떻게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목표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렇다 해도 부가 인간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도대체 한 송이의 꽃을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툭하면 외롭다고 몸부림을 치는 인간에게 부자 따위가 무슨 말라비틀어진 문어대가리라고 눈만 뜨면 경제, 경제 외쳐대며 사람들을 코너로 몰아가는 것인지, 자본제일주의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도 내놓지 않고 있단 말이거든요. 해답을 내놓을 생각도 없는 것 같고, 해답을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단 말이거든요. 그저 덮어놓고 나를 따르라, 하는 식이란 말이거든요.


# 산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개구리


우리가 굳이 세금을 내가면서 국가라는 체제 안에 갇히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도둑이나 강도가 무서워서일까요. 도둑이나 강도보다 무서운 것이 굶주림과 외로움이라는 것쯤은 이미 여러 설문이나 통계를 통해 증명이 되었단 말이거든요. 서로를 쳐다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뭔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드는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사전에 준비를 좀 해두자, 모든 사람이 나서서 그런 준비를 할 수는 없으니까 국가라는 이름의 대표기구를 만들어서 위임을 하자, 따지고 보면 이게 국가의 존재근거가 되는 거 아니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의 주변에는 지금 늙어서까지, 아니 늙으면 늙을수록 더욱더 서글픈 눈으로 이성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것 자체를 짐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차라리 처음부터 국가라는 틀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부질없는 질문이라도 해보지 않을 수 없다는 거지요.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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