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망신고 하던 날, 내 귓속으로 종일토록 들려오던 이상한 음악소리…
엄마 사망신고 하던 날, 내 귓속으로 종일토록 들려오던 이상한 음악소리…
  • 승인 2012.08.1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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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깊은 산속의 새벽


엄마. 아직도 나는 장성의 어느 산골짜기 장뇌삼 기르는 사람의 컨테이너 안에 자빠져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희한하게도 이 깊은 산골짜기까지 전기가 들어오고 있거든요. 인터넷은 안 되고, 휴대전화도 잘 안 터지지만 전기는 들어와요. 그래서 노트북을 열고 한글문서 정도는 쓸 수가 있는 거예요.

돌아보면 인생이란 참 이상도 하지요. 작년 겨울부터 엄마의 첫 제사만 끝나면 집을 나서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집을 나가서 미친놈처럼, 독하게 실연이라도 당한 사내처럼,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에 나오는 사내거나 혹은 슈만의 연가곡집에 수록된 사내처럼 되는대로 아무 데나 마구 돌아다니자고 결심을 했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집을 나와서 겨우 하는 짓이 엄마의 소녀 시절을 찾아보겠다고 허둥거리는 뭐 그런 것이었지요. 엄마가 황룡댁이니까, 장성의 황룡강 부근을 뒤지고 다니다 보면 엄마의 소녀 시절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뭔가가 슬그머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던 것일까, 아무튼 이 숲속의 컨테이너를 발견하고 주인의 승낙을 얻은 뒤로는 그만 여기서 나가고 싶지가 않아져 버린 거예요.

그래요. 나는 외갓집에 대한 추억이 하나도 없어요. 어느 해인가 홍수로 황룡강이 범람하면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절간으로 들어가셨고, 장차 내 엄마가 되는 소녀 유봉춘은 열세 살 나이에 큰댁에 맡겨졌다가 다음해 열네 살로 결혼을 했다는, 그런 어디 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전설만 내 기억에 무슨 오래된 도서관의 낡은 책갈피처럼 남아 있지요. 그 점이 나의 첫 번째 결핍이었을까, 아니면 미증유의 어떤 에너지였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은 그러더군요. 외갓집에 대한 추억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여성성에 대한 결핍일 수도 있다고, 그래서 내가 그토록 여자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는데 그것 참, 믿어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터무니없다 싶기도 하고, 어느 쪽으로도 나를 규정할 수가 없는데요. 규정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 능소화


어쨌든 나는 여기에서, 새소리와 물소리밖에 안 들리는 이 컨테이너 안에서 무엇인가 아주 신기한 어떤 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것을 끝내고 나면, 아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엄마의 소녀 시절을 찾아 나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그런데 뭐라고나 할까. 이 깊은 산골에서조차 엄마와 함께 했던 날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말이에요. 그래서 뭐 괴롭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렇다고요.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반추하다 보니 문득 아, 벌써 일 년이구나, 싶더라고요.

엄마의 사망신고를 하던 날이 말이에요. 7월의 어느 날이었으니까 이즈음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요. 정확한 날짜는 내가 기억을 못해요. 술이라도 엄청나게 마셔댄 것처럼 필름이 끊겨버렸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있지요. 엄마의 사망신고를 하던 날, 그날 내 귓속으로 종일토록 들려오던 이상한 음악소리를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장마도 어지간히 끝나고 불볕이 내리쬐기 시작할 무렵이었지요.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요. 아니 가르쳐 주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랬어요. 엄마 사망신고를 했느냐고 묻고 있었어요. 아니라고 했더니 또 그러더군요. 해야 한다고. 얼른 하라고. 한 달이 넘도록 신고를 하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된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과태료고 뭐고 그딴 게 무서울 이유 있겠느냐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또 그러더군요. 한 달 넘으면 과태료 얼마, 그렇게 정해진 게 아니라 누진이 된다고. 오일마다 얼마씩 올라간다나 십일마다 얼마씩 인상이 된다나, 하여튼 과태료라는 것이 계속 올라간다나 봐요. 그리고 또 그러더라고요. 기초노령연금 수령을 목적으로 사망신고를 몇 달씩 지연하는 경우도 있다고, 그런 사람들을 잡아내는 전문가들이 또 있다고, 그러니 한 달 내에 사망신고를 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거예요.

“아 참 세상 살기 힘들구나. 뭐냐 이거?”


# 백련


내가 그렇게 투덜대고 있는데 이 사람은 키득키득 웃어대고 있더군요. 그렇게 웃는 소리로 또 한 가지 알려주더군요. 사망신고 전에 반드시 어머니 명의로 된 통장을 들고 관련 은행을 찾아가서 잔금을 죄다 인출해야 한다나요.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통장이 정지된다고. 정지된 통장이 제 기능을 다하려면 형제자매 모든 이들의 승인이 있어야 된다고. 그거 엄청나게 성가신 일이라고. 그러니까 일단 통장의 잔액을 죄다 인출하고, 그런 뒤에 병원으로 가서 엄마의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그 뒤에 면사무소로 가서 비치된 사망신고 양식에 따라 기재만 하면 사망신고 접수 완료, 이렇게 된다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사흘인가 나흘 뒤에 그렇게 했지요. 그 사람이 가르쳐준 대로, 착실하게, 아주 착실하게 농협에 들러 어머니의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죄다 찾았지요. 그 돈을 찾아들고 나오는데 뒤가 어찌나 간지럽던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부지런히 걸었지요. 그래요. 그것은 뭐랄까, 내가 용서받지 못할 어떤 범죄행위의 주역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달까, 그때부터 나는 아마 서서히 인사불성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을 거예요.

지금 되돌아서 생각해보면 그래요. 장례식은 그래도 뭔가 분위기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참석한다는 느낌이 있고, 그래서 그리 큰 거부감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의 죄의식이라든가 범죄의식 같은 것도 없지만, 사망신고는 이게 온전히 나 혼자서 처리해내는 거란 말이거든요. 법률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기는 해도 어쨌든 내가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란 말이거든요. 자발적이라는 거, 이게 그날의 내게는 아주 심각한 무슨 범죄행위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거예요. 이유야 어쨌든 엄마의 죽음을 내가 나서서 공식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일종의 청원을 하는 것이란 말이거든요

그래요. 정말이지 그날의 나는  너무 이상했어요. 내가 나인 것 같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도 사람 같지가 않고, 나무도 나무 같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무슨 떠오르는 것도 없으면서 그냥 이상하기만 한 거예요. 너무 이상해서 여기저기 마구 휘젓고 다녔지요. 이상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다녔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선운사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더라고요.

선운사, 도대체 나는 왜 여기를 온 것일까? 의아해서 한참을 하늘이나 보고 있었지요. 물론 선운사 쪽에 아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긴 해요. 그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 내 영혼을 끌어당긴 것인가? 아니에요. 아무도 생각나는 얼굴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나는 왜 선운사 근처에 와서야 정신이 돌아왔는가. 다시 의아해서 한참을 허둥거렸지요.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그것이었어요. 고창자수박물관.


# 수련 혹은 노랑어리연


그 박물관의 주인 박봉희씨.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지요.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이 언제인가. 고창에 내려와서 얼마 안 되어서였지요. 결혼이랍시고 하자마자 헤어짐을 겪은 내게 여자의 심리랄까 뭐랄까, 하여튼 여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부의 대상이었던 시기였어요.

그러니까 그때 나는 자수를 좀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바느질은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와 관련이 깊은 영역이니까, 바느질도 보통 바느질이 아니라 자수라는 것은 이게 그렇잖아요. 고도의 심리적인 어떤 것이 배어있게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그곳을 찾아갔던 거예요. 자수란 무엇이냐. 수를 놓고 있을 때 여자는 어떤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냐, 그런 등등의 질문이 내 입에서 나오고 있었지요. 그러자 그녀는 그러더군요.

“오늘 말이에요. 서정태 선생님 아시죠? 떡이랑 반찬이랑을 좀 가져다 드려야 하는데 같이 갈래요?”

나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지요. 서정태 선생은 그때 전북일보 사장직을 내려놓고 사촌 형인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를 지키고 있었지요. 아무튼 그랬어요. 그녀는 그런 식으로 나의 요청을 밀어내 버리더군요. 그 뒤로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몇 번 마주치기나 했을 뿐, 자수를 공부하고 싶다는 나의 바람은 충족되지 못했어요. 하긴 내가 계속 쫓아다니며 졸랐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는 있었겠지요. 그런데 뭐랄까, 설명하기 어렵게도 나는 그날 그곳에 다녀온 뒤로 자수를 배우겠다는 생각을 더 이상은 안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뒤로 십 년, 그래요, 헤아려보니 처음 만난 게 벌써 십 년 가까이 됐더라고요. 그러니까 엄마의 사망신고를 했던 그날 나는 십여 년 만에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았던 거예요. 그곳은 사실 박물관이란 간판을 붙여놓고 있긴 하지만 손님을 상대로 차를 팔기도 하면서 생을 꾸려가는 살림집이기도 하거든요.


# 산속의 컨테이너


모르겠어요. 내가 왜 그 집을 그날 찾아갔는지는 나도 몰라요. 어쨌든 그녀는 많이 변했더군요. 특히 그녀의 딸아이가 엄청 많이 변했더군요. 십여 년 그때 아주 어린 소녀였던, 그 여리고 작은 손으로 과자를 직접 구웠다고, 손님 대접한다고 내놓던 그 아이가 어느새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수줍어서인지 도도해져서인지 하여튼 나한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스파게티를 만들었다고, 나한테는 먹어보라는 말도 안 하고 혼자서 먹고 있더군요.

“아, 우리도 밥 먹을까요?”

딸이 밥 먹는 것을 본 그녀가 그러더군요. 그래요. 그녀와 그녀의 딸은 먹는 것이 다르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엄마와 딸이 각자 자기 음식을 만들어 먹는데요. 아이는 스파게티 같은 것들을 주로 먹고, 그 엄마는 온갖 나물에 된장국 그리고 아주 매운 고추를 된장에 찍어먹는 식사를 하더군요.

그 식사를 객으로 얻어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무슨 이야기 끝에 수련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녀가 수련에 대해 뭔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그게 글쎄, 내가 아는 수련과 그녀의 입에서 묘사되는 수련이 너무 다른 거 있죠. 요컨대 수련과 일반 연의 차이가 뭣인 줄 아느냐, 하는 질문을 그녀가 내게 던져놓고는 자기가 열심히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수련과 일반 연의 차이를 제법 안다고 생각하는 내가 듣기에 그녀의 설명은 영 아닌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는 체를 좀 했지요. 수련은 물수(水)자 수련이 아니라 잠잘수(睡)자 수련이라고, 실제로 수련은 오후 한두 시쯤 되면 꽃을 오므렸다가 다음날 아침 다시 연다고, 한참을 그렇게 떠들어댔더니 그녀가 묻더군요. 어떻게 그것을 그렇게 잘 아느냐고, 그래서 그랬지요. 내가 마당에 방죽을 하나 파놓고 맨 처음 심은 게 창포요 두 번째로 심은 게 수련이라고, 그래서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녀가 눈을 반짝 뜨면서 그러더군요.

“그 수련 나한테 나눠줄 수 있어요?”


# 황룡강 상류 장성호의 조정 경기장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뭐랄까, 말은 나눠줄 수 있느냐고 했지만, 반드시 나눠줘야 한다는 투였지요. 그녀의 집 앞에 돌확이 몇 개 있는데 거기에 수련을 기르고 싶다는 거예요. 수생식물은 원래 번식력이 왕성하니까 못 나눠줄 이유가 없는 것이란 말이거든요. 그래서 그녀와 그녀의 일을 거들어주는 또 한 여인을 데리고 집으로 왔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뭐랄까,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갑자기 무슨 보물창고라도 발견한 사람들처럼 별별 난리부산을 다 떨고 있지 뭐겠어요.

대밭에 죽순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는 야 죽순 꺾자, 죽순 꺾자, 하고 요란을 떨더니 머위대를 보고는 또 머위대를 뜯는다고 달려들고, 엄나무를 발견하고는 또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그쪽으로 달려가고, 그렇게 온갖 부산을 떨고도 무슨 에너지가 그렇게도 남아 있는지 방으로 들어와서는 또 온갖 잔소리를 해대는 거예요. 이 좋은 대청마루를 왜 이렇게 넝마로 만들어 놓았느냐는 둥, 천장의 서까래를 돌출시키기로 했으면 자주자주 손을 봐야지 거미가 그물을 쳐놓고 있으니 이게 집이냐, 흉가냐, 뭐냐, 등등 그렇게 끝도 없이 잔소리를 해대는데 말이에요.

허헛 참 내,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내가 그만 어안이 벙벙해져 버리더라고요. 할 말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당신들이 뭔데 남의 집 살림까지 간섭하느냐 어쩌고 그런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입이 안 열리는 거예요. 이 아줌마들이 미쳤나 싶기도 하고, 요새 뭔가 남자 때문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던 중에 만만한 나를 만나서 올타꾸나 하고 퍼부어대는가 싶기도 하고, 해서 그냥 눈이나 끔벅끔벅하며 실없는 웃음이나 실실 흘리고 있었는데요.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나를 계속 다그치는 거예요. 한참을 그러다가는 느닷없이 또 이런 소리를 하더라고요.

“수복씨, 우리 모싯잎 송편 사 먹으러 안 갈래요?”

그때 퍼뜩 그런 생각을 했지요. 아, 이 여자들이 진짜 미쳤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 나섰어요. 어쨌든 모싯잎 송편은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나가서 모싯잎 송편을 샀지요. 그것을 들고 저수지로 갔어요. 저수지 뚝에 앉아 모싯잎 송편을 먹으면서 또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나누었는지는 지금 거의 기억도 안 나는데요.

하여튼 그래요. 일 년이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날 그 여인들이 어쩌면 전략적으로 그렇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만약 그날 그녀들이 나를 그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나는 필경 엄마의 사망신고를 했다는 데서 오는 열패감을 견디지 못하고 밤에 술이나 퍼마시고 인사불성인 채로 며칠을 자빠져 있었을 테니 말이에요. 그래서 그날 그녀들이 내게 퍼부어댄 잔소리가 지금은 음악소리로 기억되고 있다는 거예요.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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