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 최덕신장군의 흔적인 밤나무

엄마, 나는 지금 아주 유쾌한 감옥에 갇혀 있답니다. 내가 좋아서 내 발로 걸어 들어온 곳이니 불쾌할 이유가 없지요. 유쾌한 곳에 앉아서 감옥을 느낀다는 것은 얼핏 형용모순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나는 생각해요. 요새는 자발적인 가난도 있거든요. 물론 자발적인 가난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자발적인 감옥에 비해 한 수 높은 차원일 수는 있어요. 그렇다 해도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이곳은 글쎄 앞을 봐도 산이요 옆을 봐도 산이요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란 말이거든요.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활빈당 같은 류의 병사를 한 백여 명쯤 숨겨두고 훈련을 시키며 자급자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지가 있는데 이 분지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곳은 아는 사람은 알고 찾아올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은 거의 절대로 찾아내기 어려운 그런 첩첩산중인 거예요.

이 첩첩산중의 특정 구역을 지정해서 인삼 씨앗을 심었는데요. 삼씨가 싹을 틔우고 나와서 자라면 이른바 장뇌삼이라 해서 비싸게 팔린다네요. 산림청에서는 산양삼이라고 부른다는데 아무튼 이 삼밭에 열쇠를 가진 사람 외에는 들어갈 수 없게 펜스를 치고 감시카메라를 설치했어요.

펜스 안에는 컨테이너를 들여놓았지요. 감시카메라가 보내오는 영상을 들여다보며 도둑의 유무를 판독하는 일종의 분석실이랄까, 감시초소 본부랄까, 뭐 하여튼 그런 곳인데요. 그런 중요한 곳을 주인이 아무 중요할 이유가 없다고 팽개쳐둔 거예요. 그것을 내가 전기료 정도만 내주기로 하고 빌려 쓰기로 한 거예요.


# 밤이면 이렇게도 완벽한


아 이것 참, 삼밭 주인이 중요한 삼밭을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얘기를 그만 해버리고 말았는데요. 이 점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살짝 언급을 한다면 뭐랄까, 글쎄 삼밭에서 삼을 찾아보기가 아주 어려운 거예요. 잡풀만 무성한 거예요. 앞으로도 삼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거예요.

삼은 다른 풀들에 비해 경쟁력이 약해서 살아남기가 어렵다는군요. 잡풀이 너무 없으면 장뇌가 못 되고 그냥 인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안 되고, 잡풀이 너무 많으면 삼이 싹을 틔웠다가는 그냥 죽어버리고, 그래서 사람이 잡풀을 어느 정도는 뽑아줘야 하는데 산속에서 풀을 뽑는다는 게 이게 완전히 정신 나간 짓이라고, 주인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또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마을마다 한두 사람씩 선정해서 이백 평씩, 혹은 삼백 평씩, 그렇게 소규모로나 하면 의미가 좀 있을 거예요. 이렇게 대규모로 한 곳에 집중해 놓으면 한 사람이 이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결국 사람을 사서 해야 한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데, 그 인건비를 어떻게 감당하겠냐고요.”

그래요. 이 삼밭은 주인이 자기 손으로 자기 돈을 들여서 만든 것이 아니에요. 산림청에서 국고를 들여 산 주인과 협의 하에 시행한 사업이라네요. 내가 봐도 이것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전봇대를 마흔 개 가까이나 새로 박아서 전기를 끌어들이고, 산 하나를 통째로 빙 둘러 펜스를 설치하고 감시카메라까지 장치하는 이런 일은 사실 영세한 농민 개인은 엄두도 내기 어렵지요.

공무원도 자기 돈이 들어가는 일이라면 이렇게 함부로 일을 벌이지는 않았겠지요. 오죽하면 일종의 특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산주마저 헛웃음이나 실실 뿌려대며 미쳤어, 미쳤어, 그런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을까요. 사람이 억지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이게 참 노자가 그토록 경계하라고 일렀던 작위(作爲)로구나 싶어서 씁쓸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 개인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일종의 횡재를 한 셈이겠는데 말이에요. 


# 옛사람의 선명한 흔적


그래요. 횡재도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딨겠어요. 이런 깊은 산 속에, 아침이나 저녁이나 계곡의 물  소리가 애인의 속삭임처럼 정답고도 시원하게 들리는 속에서 초라한 텐트도 아니고 다섯 평 가까이나 되는 컨테이너에 전기시설까지 갖춰져 있다니, 이건 완전히 궁전이란 말이거든요.

물론 멧돼지 때문에 살짝 겁이 나긴 해요. 예전에는 멧돼지와 정면으로 만나고 싶다는 그런 객기도 제법 있었지만, 산속에 혼자 있고 보니 마음이 싹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밤에는 컨테이너 문을 잠그기 시작했는데요. 혹시 멧돼지가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말이에요. 그렇게 문을 잠그고 나니까 이제 완전히 감옥이 됐다 싶어지면서 내 자신이 어찌나 우습던지, 그래서 다음 날은 안 잠궜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은 다시 잠그게 되더라고요.

처음에 한 사나흘은 그랬지요. 왔다갔다, 갈팡질팡, 그야말로 정서불안에 걸려 어쩔 줄을 몰라했어요. 사람 한 명 볼 수 없고, 라디오나 뭐 그런 매체와 접속할 일도 없고, 그래서 말할 일은 물론이고 말을 들어볼 일도 통 없으니까 은근히 걱정스러워지더라고요. 야 이거 이러다가 한국말을 잊어버리고 이상한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거 아냐? 해서 혼자 뭐라고 마구 지껄이기도 했었지요. 노래도 불러보고, 생각나는 시도 몇 수 큰소리로 읊어보고, 책을 큰소리로 읽어보기도 하고, 기타 등등 그렇게 한국말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내심 애를 쓰기도 했어요.


# 무당개구리 사는 곳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찾는 사람이 있었던 거예요. 사람이 살다가 떠난 자리에 뽕나무를 심어놓고 가꾸는 사람도 가끔 찾아오고, 주말이면 삼겹살이다 뭐다 잔뜩 싸들고 계곡을 찾아드는 낯선 이들도 심심찮게 있고 말이에요. 그래요. 여기 이 계곡이 제법 깊어요. 지난 봄 그 극심한 가뭄에도 이 계곡은 마르지 않았다더군요. 하긴 그래서 사람이 사는 마을도 있었겠지요.

한 삼십 년 됐다네요. 도시 바람이 불어서 사람이 하나둘씩 떠나고 마지막으로 마을 이름 자체가 공문서에서 사라진 게 말이에요. 지금은 사람이 살았었다는 증언이라도 하듯이 곳곳에 돌담이 조금씩 남아 있지요. 돌을 깎아서 만든 절구통이 뒹구는가 하면 돌확이 흙속에 묻혀 있기도 하지요. 드문드문 눈에 띄는 그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저 깊은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해요. ‘인걸은 간 데 없고’ 하는 어떤 싯귀 같은 것 말이에요.

지금은 수돗골이란 이름으로 통한다는군요. 수돗물을 말할 때의 수도가 아니고 도를 닦는다는 뜻의 닦을수(修)자에 길도(道)자를 쓰는 그런 수도라는 거예요. 내가 봐도 그렇긴 해요. 굳이 그렇게 마을 이름을 티나게 짓지 않았어도 이곳에 오래 있으면 뭔가가 정화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긴 그런 느낌이 좋아서 내가 여행을 중단하고 여기 이렇게 들어앉기로 했던 것이겠지요.

달이 밝은 밤에 밖으로 나와서 사방을 둘러보면 거대한 왕릉을 둥그렇게 배치한 것 같은 고만고만한 산들이 한눈에 쏙 들어오지요. 중뿔나게 높은 봉오리도 없고, 형편없이 낮은 봉오리도 없는,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산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유하고, 어쩌면 그렇게도 묘한가 싶으리만치 그냥 그렇게 서 있는 거예요. 마치 어떤 대단한 석수쟁이가 무엇인가 큰 뜻을 품고 하룻밤 새에 뚝딱뚝딱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놓은 것처럼 말이에요.


# 돈은 엄청 들었지만 삼은 안보이는 삼밭


그것 참 이상도 하지요. 낮에 보면 산 뒤에 또 산이 있는 식으로 이를테면 첩첩산중이란 말이거든요. 그런데 밤이면 그렇게도 마치 어깨동무라도 하듯이 나란히 둥글게 정겨운 모습으로 보이는 거예요.

둥글게 나란히 있는 것 같으면서도 첩첩으로 서 있는 이 산비탈에 밤나무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요. 그래서 가을이면 알밤을 주우러 몰려오는 사람들과 다람쥐의 경쟁이 아주 치열하게 전개된다 하더군요.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어느 산을 가더라도 밤나무가 많긴 하지요. 그래서 밤꽃이 필 무렵이면 소설가들의 상상이 야한 쪽으로 쏠린다는 말도 있긴 하지요.

그런데 이곳의 밤나무는 드문드문 하나씩 있는 게 아니에요. 아주 그냥 계획적으로 심었다는 티가 팍팍 날 정도로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어요. 그래요. 이곳의 밤나무는 우연히 그냥 씨앗이 떨어져서 나온 게 아니라 계획적으로 심어놓은 것이에요. 이 계획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우리의 저 비극적인 육이오와 닿아 있다네요.

육이오, 그 남북전쟁의 와중에 전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양민들이 무더기로 희생되었었는데요. 이름하여 공비토벌 작전이었지요. 구체적인 명칭으로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이었다고 하더군요. 그 작전을 구상하고 진두지휘한 사람이 최덕신 장군이지요. 내가 한때 양민학살 관련 리포트를 쓴 적이 있거든요. 그때 최덕신 장군에 대해서 좀 공부를 했었지요.


# 사람은 갔어도 담장은...


풀과 나무를 제외한 모든 생명을 없애 버려라.

간단하게 정리를 하자면 견벽청야 작전의 핵심은 그것이에요. 건조물은 태워 없애고, 숨쉬는 것들은 모조리 죽인다는 것. 최덕신 장군이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할 당시에 배워온 것이라더군요. 그 작전을 수행한 부대가 저 유명한 11사단이지요. 11사단은 원래 있었던 부대가 아니에요. 정규군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급조한 것이에요. 때문에 일부 장교와 부사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대원이 반공청년연맹 같은 단체의 회원들이고,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지요.

아무튼 11사단의 전공은 혁혁했어요. 저 유명한 거창 양민학살에서부터 고창의 해리, 공음, 심원의 양민학살에 이르기까지, 아주 굉장한 무공을 세우고 마침내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되자 부대원들이 이제 사회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요. 당시만 해도 정부가 가난해서 현물로 보상은 못 하고 땅을 주었다네요. 어디어디에 쓸 만한 국유지가 얼마큼 있는데 이 땅을 부대원들이 향후 30년간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해 먹어라.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연금이랄까, 퇴직금이랄까, 하여튼 보상을 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11사단 병력 대다수가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산을 파고 밤나무를 심었다는 거예요. 생존해 계신 주민들의 말로는 그 기간이 2년이었다네요. 군인이거나 혹은 군출신 청년들이 떼로 몰려와서 2년여 동안 밤나무를 심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밤이라는 게 이게 심었다고 금방 수확이 되는 건 아니란 말이거든요. 밤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산을 내려가 버리고, 마침내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데요.

이게 국방부 공식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전하는 얘기로는 그래요. 그렇게 해서 수돗골이 밤나무골 비슷하게 되고 말았다나요. 덕분에 인근 주민들이 가을이면 알밤을 푸지게 주워 먹는다더군요. 밤꽃이 필 무렵이면 양봉업자들이 단골로 드나들기도 한다는군요. 바로 거기, 육이오 직후에 심은 밤나무숲이 손을 내밀면 닿을 듯이 지척에 우거져 있는 산 아래 분지에 내가 지금 와 있는 거예요.


# 왔다고 안내를 자청한 아랫마을 사람들


생각하면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하기도 하지요. 내가 최덕신 장군의 생애에 대해 공부를 한 지가 아직 오 년도 채 안 되었는데 이곳에 와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나니 그렇더라고요. 허헛 참 이건 또 무슨 인연인가 싶더라고요. 왜냐하면 최덕신이라는 이름 석 자 앞에서 내가 참 많이 놀랐었거든요. 젊은 시절에는 그토록이나 반공을 외치며 학살을 직업처럼 해온 사람이 말년에는 북한으로 가서 조평통 부위원장까지 지냈으니 이게 대체 무슨 비극인가, 희극인가 싶어서 말이에요.

그래요. 최덕신 장군은 훗날 박정희 체제 하에서 외무장관도 하고 유신학술원 회장도 하고 등등 기타 그야말로 요직을 두루 거쳤지요. 그러다가 대통령 박정희와의 불화로 미국 망명을 가고, 미국에서 다시 북한으로 망명을 가는데 거기서도 요직을 거치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뭐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요. 문제는 최덕신 장군 휘하에서 양민학살을 감행했던 사람들이 말이에요. 공비가 출몰하는 지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던 그 수많은 아마추어 병사들 말이에요. 그 수많은 사람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단 말이거든요.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괴로웠을 것인가. 장군의 명령을 따라서 총을 쏘았는데 그 장군은 훗날 자신이 죽이라고 명령했던 사람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북한으로 가 버렸다. 그곳에서 또 장군 이상의 대우를 받는다. 아 이게 대체 뭔가. 나는 그때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이러고도 내가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등등의 괴로움이 그 당시 부대원들에게 없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거든요.

그러나 어쨌든 뭐 그들도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겠지요. 오십년대 초반의 일이었으니까 벌써 육십 년, 태반이 죽었거나 병석에 누웠거나 건강하다 해도 아주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가야 할 날만 기다리고 있겠지요. 인간의 삶이란 게 본디 그렇게 되어 있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한 번 더 그런 질문이 가능한 것이겠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죽음 앞에서 후회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의연할 수 있는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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