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 첫 번째 이야기


# 태풍이 만들어 놓은 예술


수중에 돈이 떨어져서 일을 좀 하기로 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돈이 떨어지는 정도의 일이야 늘 있는 법이다. 오래 전, 내가 아직 유치원생 정도의 나이였을 때, 한 스님이 모래시계를 가져와서 엎었다 뒤집었다 하며 “이것이 세상이란다”하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헛소리’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아마 잊어버렸을 것이다. 황금 같은 청춘의 시기도 다 지나고,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유소년기의 삽화가 문득문득 하나씩 떠오르는 까닭이 무엇인지 내가 안다고 나서지는 못하지만, 사람이 아주 순정했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린 나이에 보거나 들었던 이야기는 그 사람의 영혼에 어떤 색깔이거나 혹은 소리로 새겨진다는 추측 정도는 하고 있다.

세상을 모래시계로 압축해서 보여준 그 스님이 내 영혼에 새겨놓은 것은 아마도 공(空)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내 소유로 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이상하리만치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연애에 실패하고, 결혼도 실패하면서 집착이라는 것이 나를 얼마나 악독하게 상처주며 갉아먹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소유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무엇을 갖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수중에 돈이 떨어져서 무엇인가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직업으로 삼지는 못했다. 설령 직업으로 삼는다 해도 그 직업의 대강을 알면 뭔가가 참을 수 없어져서 그만두곤 했다. 그만두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어제와 같은 절차를 거친 뒤에 어제와 같은 길을 걸어서 어제와 같은 차를 타고 어제와 같은 일을 하고 어제와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는 생활, 그 지긋지긋하게 완고한 패턴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단 하루를 산다 해도 기꺼이 모든 것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루하고 초조해서 더 이상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떠나야지. 익숙한 것을 버리고 낯선 것을 찾아서.

낯선 일은 항상 나를 흥분시켰다. 약간의 두려움과 떨림이 내 안에서 출렁거리며 ‘아, 살아 있다, 살아 있다’, 그렇게 큰소리로 외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늘 육지에만 있었다. 하늘에서의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 기회도 없었다. 바다에서 하는 일도 거의 해보지 못했다. 그런 기회도 없었다. 몇 년 전에 원양어선이라도 타볼까 해서 알아보았지만, 신규채용은 사십오 세 이하만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잠깐 절망한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절망은 내 취미가 아니었다. 아 이것 참 절망스런 일이구나, 싶어지면 얼른 그 자리를 떠나서 다른 것을 찾는 데는 내가 아주 익숙했다. 도무지 무엇을 한탄하고 원망하는 것은 내게 맞지 않았다. 설령 내 자신이 무엇을 아주 크게 잘못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해도, 반성의 시간이 끝나면 자괴감에 잡힐 틈이 없이 그냥 내달렸다. 그렇다 보니 돈이 떨어졌구나, 일을 좀 해야겠다, 싶으면 언제나 일이 생겼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일이 내게로 오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새로운 일을 만났다.


# 어둠속에 길을 나선다.


병원에서였다. 여름 한철 신선놀음이나 하자고 깊은 산 계곡의 물속에서 책을 읽었더랬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세 번째인가, 하여튼 읽었고 로렌스도 읽었고 연암 박지원도 읽었고 그밖에도 등등 꽤나 읽었다. 그런데 산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이었는지 낯선 균이 내게 침입했다.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까지 부어올랐을 때 병원을 갔더니 얼른 입원해서 본격적인 치료를 해야 한단다. 의사의 명령대로 입원을 했고, 병실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과 같은 날 퇴원을 했는데, 그 사람이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자기가 하는 일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육지가 아니었다. 바다였다. 바다 중에서도 갯벌, 달을 따라서 들어온 물이 가득 차 있다가 달이 떠나면 슬금슬금 드러나는 육지로서의 갯벌, 그러니까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공간, 원리를 알고 보면 신비스러울 것도 없지만 어쨌든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바다의 사람들’, 그들은 바다의 원리를 잘 안다. 아니 어쩌면 우주의 원리를 잘 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바다의 물이 들고 나는 시간은 물론이고 갯벌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굳이 우주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것의 성질을 마치 ‘집사람’이나 ‘남편’처럼 알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다도 아니고 육지도 아닌 그 갯벌 여기저기에 저마다 말뚝을 박고 ‘저기서 여기까지는 나’, ‘여기서 거기까지는 너’, 하는 식으로 구획정리를 하고 그 안에 종패를 뿌렸다. 모래알처럼 작은 종패는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벌 속에서 조개가 되고, 조개잡이는 그들의 생업이 되었다.

조개잡이는, 그것은 ‘우라지게도 가난하고 고생스럽고 처절한’ 생업이었다. 초기에는 그랬다. 적어도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조개잡이는 가난의 상징이 아니었다. 고생스럽기는 해도 처절하지는 않았다. 처절은커녕 그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마을은 고창에서 가장 잘사는 동네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 한 번 작업을 나갈 때마다 사람을 고용한다.

호미로 조개를 캐는 것이 아니었다. 물대포 같은 것으로 조개를 흔들어 깨워서 혼수상태로 만들어놓는 방식이었다. 가사 상태로 흙탕물 속에 둥둥 떠 있는 조개를 바구니로 가뿐가뿐 건지는 방식으로 작업 방식이 진화된 까닭에 일곱 명 정도의 팀을 짜야만 한다. 바로 그것, 일곱 명 중의 하나로 내가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그저 단순하게 새로운 일을 만나서 새로운 일을 하러 간다, 하는 그런 즐거운 마음으로 갔던 내게 그것은 단순한 노동의 현장이 아니었다. 그랬다. 나는 놀랐다. 아주 크게 놀랐다.


# 달리는 트렉터에서 보는 갯벌


새벽에 떠난 그 바다, 그 갯벌에서 나는 뜻밖에도 광야를 느꼈다. 물론 이육사 같은 시인들이 말하는 ‘광야’는 아니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광야, 이를테면 서부영화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또는 기차를 한 번 타면 몇날며칠을 달렸어도 목적지는 아직 멀었다고 하는 그런 대륙적인 감각으로서의 광야를 나는 그 바다의 갯벌에서 느꼈다.

지평선이 거의 없고, 수평선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지형적인 조건은 솔직히 말해서 답답하다. 이른바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있어 물리적인 제약을 감수해야만 한다. 육지에서는 동서남북 어느 쪽을 바라봐도 산이나 혹은 건축물이 있어서 눈길을 막아버린다. 바다에서는 동해를 제외하면 아주 난바다가 아닌 이상 올망졸망한 섬들이 너 어디 가느냐는 듯이 시선을 차단해 버린다.

지형적인 조건이 이런 지경인데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삼팔선이란 이름의 실체도 없는 것이 허리를 뚝 잘라버린 까닭에 대륙적인 차원의 기차여행조차도 불가능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가난이란 말이냐. 천형이라도 앓는 듯이 옹색한 공간에서 끙끙거려야만 하는 이 가난한 유산을 툴툴 털어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내가 세상을 살면서 딱히 무슨 불만은 크게 없었지만, 여행과 관련해서는 그런 식의 뭐랄까, 불만이라기보다는 분노가 있었다.

섬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건만 섬에서 태어난 것 이상으로 비행기나 대형 선박이 아니면 국경을 넘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 여행을 한다고 나서봐야 기껏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정된 공간을 맴맴 돌다가 말아야 한다는 것. 손수 운전을 하던 자전거를 타던, 도보여행을 하던 무엇을 하던 내가 자발적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방식의 여행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 그것도 무슨 우주적 원리에 따라 금지된 것이 아니라 유치하게도 정치적 담합에 따라 금지되어 있다는 것, 이런 사실을 감지하는 데서 오는 치욕스런 분노가 늘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그 오래된 분노가, 그 치욕이, 그 슬픔이 그렇게도 한 방에 말끔히 날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보지 못했다. 그랬다. 그것은 환상 같은 현실이었다. 살다 보면 돈이 떨어질 때도 있듯이, 그런 꿈같은 행운을 만나는 수도 있는 법이다.

아, 내가 지금 너무 흥분해 있는 것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조리에 맞게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렇다. 조개잡이에 참여하기로 한 첫날 나는 다섯 시 이십분에 집을 나섰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다섯 시 사십 분까지 하전리 갯벌체험장 앞에 도착해야 했다. 그곳에서 아줌마들과 함께 트렉터를 타고 갯벌로 나간다는 거였다.


# 돌아오는 길 중간에 잠시 쉬기도 한다.


아직 어두운 시각이었다. 여기저기 도처에서 경운기와 트렉터가 시동을 걸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엔진 소리가 사뭇 에로틱했다. 에로틱, 그랬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 그것은 살아 있는 소리였다. 어디에 얼마나 많은 트렉터가 있는지는 당연하게도 내가 몰랐다. 나는 그저 동네 전체가 살아서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길을 나섰다. 전라북도 고창군과 부안군 사이에 펼쳐진 광활한 갯벌, 곰소만이라고도 하고 줄포만이라고도 하는 그곳의 갯벌은 순수한 흙이 아니다. 사구(砂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운 떡가루 같은 모래와 흙이 섞여진 까닭에 갯벌이면서도 밟으면 푹푹 들어가는 ‘뻘’이 아니라 스펀지를 압축한 것처럼 부드럽게 단단하다. 그리고 멀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멀다.

종패를 뿌려놓은 곳까지 만약에 걸어서 간다면 아마 가는 데만 두세 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예전에는 경운기를 타고 다녔다. 요즘은 형편이 나아져서 트렉터를 타고 다닌다. 갯벌 여기저기에 말목이 박혀 있는데 모르는 사람은 그 용도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는 사람에게 그 말목은 길이다. 그래서 하나도 헤매지 않고 잘 다닌다. 그렇게 해도 실제 작업을 하는 시간은 3시간 삼십분 정도밖에 안 된다.

그것도 길어봐야 그 정도다. 짧은 때는 두 시간 남짓이다. 빠지는 물을 따라서 출근을 했다가 들어오는 물에 쫓겨서 퇴근을 하는 셈인데 그 시간이 모두 합해서 길면 다섯 시간 정도고, 짧으면 고작 네 시간여다. 그러면 하루 스물네 시간 중 남는 시간은 어디에 쓰나? 자유다. 하고 싶은 대로 아무것이나 하든 말든, 낮잠을 자든 말든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해를 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 썰물일 때만 작업을 하니까 시간은 알겠는데 그 시간 이후에도 아무 다른 일을 안 하고 그냥 퇴근을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 다섯 시간 노동을 하는 직업도 있다고? 첫날 출근을 하는 나의 주요 관심사는 겨우 그 정도였다. 다섯 시간 노동으로 하루 일과를 마친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믿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뭐 그런 의심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어둠을 뚫고 트렉터는 달렸다. 평지를 벗어나고, 갯벌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트렉터는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조금 뛰다가 말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진동은 더욱 심해졌다. 가슴 근육이 무슨 줄넘기라도 하듯이 수축과 팽창을 요란하게 반복하고 있었고, 갈빗대가 모조리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서 방황하는 것 같았고, 엉덩이가 너무 아파 더 이상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흡사 길들이지 않은 야생말에 올라탄 채로 무작정 끌려가는 것 같았다.


# 초보자에게 갯벌 전용 강의를~


온 몸이 덜덜 떨리고, 머릿속은 어질어질하고, 내가 이거 죽으러 가는가보다, 하는 터무니없는 공포의 시간이 얼마나 지난 뒤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 꾹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좌우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던가. 그렇게 나는 보았다. 광야를. 아니 그것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었다. 그렇게 나는 보았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저 멀리로 나타난 ‘산적’들을 보았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산적 나부랭이가 아니라 실크로드를 왕래하는 대상(隊商)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불쑥불쑥 나타난 트렉터가 어느 지점에서부터 하나의 길을 찾아서 모여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것이 트렉터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당나귀와 낙타와 말들로 이루어진 고대의 무역업자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모여서 하나의 연대를 형성하던 트렉터는 다시 흩어지며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패튼전차군단, 어느 순간 나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을 그린 어떤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랬다. 그것은, 흩어졌다가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트렉터의 행렬은 멀리로 아스라하게 볼 때 전차군단 같았다. 미지의 행성에서 불시착한 외계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첫날만 그런 환각 내지 공상에 빠져든 것은 아니었다. 하루를 지내고 이틀, 사흘, 나흘을 보냈어도 내 눈에 보이는 그림은 축소되지도 않고 현실세계로 안착하지도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날이 가면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다. 그랬다. 확대. 나는 그 갯벌에서 지구를 보고 있었고, 우주를 보고 있었다. 감히 말하자면,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 사막의 낙타부대를 연상케 하는 트렉터


갯벌만큼 지구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물이 나가면 사람이 들어가고, 물이 들어오면 사람이 나온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삶도 아니고, 사회주의적 삶도 아닌, 우주적 차원의 삶이라고 보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바닷물은 저 혼자서 들고 나는 게 아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몸으로 느낄 수도 없는 달과의 교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달이 지구를 그리워하고, 지구가 또한 달을 그리워하는 데서 오는, 저절로 탄생하는 삶의 노래, 그리움의 노래. 그것을 우리는 밀물이라고, 또는 썰물이라고 부르며 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바다의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우주적 차원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아, 얼마나 다행인가. 이러한 갯벌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혹시라도 어느 똑똑하고 미련한 정치인이 나타나서 새만금처럼 이것도 막아버리자고 오만이나 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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