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스펜스 기숙학교의 마녀들





19세기 말 인도. 열여섯 소녀 제머 도일은 요즘 엄마랑 사이가 좋지 않다. 본국인 영국에 보내달라고 졸랐지만 엄마가 꿈쩍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머와 엄마는 봄베이 시장으로 외출했다가 또다시 언쟁을 벌이고 엄마는 갑자기 제머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화가 나서 무작정 내달린 제머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엄마가 암흑의 괴물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환상을 목격한다. 헐레벌떡 시장으로 되돌아간 제머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불미스러운 엄마의 죽음 이후 제머는 영국의 기숙학교인 스펜스로 보내진다. 사교계에 내보낼 우아하고 순종적인 신붓감을 양성하는 이곳은 사실 소녀들의 은밀하고 견고한 패거리 문화에 지배되어 있으며, 25년 전 화재 사고 이후 폐쇄되었다는 부속건물 이스트윙은 어딘가 미심쩍다. 한편, 제머는 인도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인도인 청년 카르틱의 감시의 시선을 느낀다. 제머는 가난한 고아 소녀 앤과 룸메이트가 된다. 훌륭한 집안과 뛰어난 미모로 학생들 사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필리시티와 피파 일당의 계략으로 도둑으로 몰릴 뻔한 앤을 지략과 배짱으로 구해주면서 제머는 그들의 눈에 띄게 된다. 필리시티와 피파 일당에게 이끌려 한밤중에 클럽 입회식을 치르던 제머는 예배당에 갇히고, 간신히 탈출하던 길에 낡은 일기장을 손에 넣는다. 그것은 바로 25년 전 화재로 죽었다는 메리 다우드의 일기장이었다.

한편,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환상이 불쑥불쑥 찾아들고, 카르틱은 제머에게 환상을 보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다. 결국 제머는 카르틱을 추궁해 그가 템플 기사단, 아서 왕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비밀결사 라크샤나의 일원이며, 자신에게 이계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때문에 사악한 어둠의 화신 키르케의 표적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제머는 일기를 읽어나가면서 메리도 자신과 같은 환상을 보았으며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카르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만나기 위해 이계로 들어간 제머는 엄마로부터 이계가 원래 선한 마법에 의해 성립된 세계였으나 메리와 새러가 저지른 무서운 죄로 인해 마법의 힘을 잃고 닫혔다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비밀클럽을 결성한 필리시티, 피파, 앤, 제머는 자정이면 숲속 동굴에서 회합을 가지고, 메리의 일기를 읽어가며 갑갑한 속박에서 잠시나마 놓여난다.

결국 제머는 친구들을 데리고 빛의 문을 통과해 이계로 간다.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게 지상최대의 목표인 삶으로부터 떠나온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이 실현되는 그곳에서 해방감을 만끽한다. 그렇게 이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그들은 마법을 현실 세계로 절대 가지고 나가면 안 된다는 엄마의 경고를 무시하기에 이른다. 결국 이로 인해 키르케를 불러들이는 재앙을 초래하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 속에서 계속 일기를 읽어나가던 제머는 죽은 줄 알았던 메리가 자신의 엄마이며 키르케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 새러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이 책은 고딕 소설과 판타지라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두 장르를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기숙학교, 의문의 화재 사고가 있었던 고딕 저택, 소녀들의 비밀클럽…. 고딕 이야기의 전형적인 설정과 인물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코르셋만큼이나 억압적인 규범에 숨 막혀하는 빅토리아 시대 소녀들의 세계를 그리면서 동시에 판타지의 세계를 끌어안는다. 그러나 고전을 호러 장르로 패러디하면서 유머를 선사한다든가 단순히 장르의 기본 뼈대만 빌려오기보다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규범을 강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심령술과 오컬트에 심취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두 얼굴처럼 이질적인 두 장르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고 있다. 물론 ‘해리포터 시리즈’만큼 대단한 판타지 작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긴장감 넘치고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내용이 보는 내내 빠져들게 했다.

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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