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것이 잘 돼야 내 것도 오진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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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2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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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 -세번째

# 소금창고와 염부의 사택


우리는 오늘도 어제와 같은 트렉터를 타고 어제와 같은 갯벌을 달렸다. 어제 갔던 길을 오늘도 가고 있었지만, 길은 이미 어제의 그 길이 아니었다.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려놓고 다음날 아침에 보면 모두 사라져 있듯이, 어제 그토록 많은 트렉터와 경운기와 사람들이 왕래를 했음에도 바다는 어느새 그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해봐” 하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오늘은 이른바 ‘두 탕’을 뛰는 날이다. 아니다 참, ‘세 탕’이다.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이것 참 계산이 복잡하다. 달력에 적힌 날짜로만 보자면 하루에 이틀을 산 셈이 되지만, 시간으로 치자면 삼십여 시간 동안 사흘을 살아낸 셈이 된다. 요컨대 하루 반 동안 세 번, 그러니까 사흘을 출근한 셈이 되는 것이다.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 다섯 이십 분에 출발해서 한 시간 십여 분 정도 작업을 하고 여덟 시 무렵에 돌아왔고, 오후 네 시 삼십 분에 다시 또 트렉터를 타고 갯벌로 나가서 이십여 분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다가 두 시간 정도 작업을 하던 중에 물이 밀물듯이 들어와서 주문량도 채우지 못한 채로 작업을 끝냈다. 집에 돌아오니 아홉 시가 넘어 열 시가 다 됐다. 너무 피곤해서 몸을 씻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로 그냥 잠에 떨어졌다가 네 시간 뒤에 일어나서 또 출근 준비를 했으니 이게 뭐냐. 계산을 어떻게 해야 잘한 것이 되는가 말이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런 식으로 정신없이 겹치는 때가 있단다. 조금을 지나고 무쉬를 지나 한물, 두물, 세물 즈음의 바다는 새벽과 아침 사이에 한 번, 그리고 늦은 오후와 저녁 사이에 또 한 번 그렇게 사람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아주 어중간한 시간에 갯벌을 발가벗겨 보여주곤 한다. 절반은 어둠이고 절반은 밝음이라고나 할까. 작업을 하기에는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고, 작업을 안 하기에는 중개업자들의 주문이 이미 들어와 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물이 나가 있는 시간도 짧다. 물 나갔다 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물이 들어와 있는 형국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사태인 것 같지만, 그러나 갯벌의 사람들에게 진퇴양난 같은 것은 없다. 주문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주문이 들어와 있는 이상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따위 잔머리 굴리기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그냥 바다로 들어간다.


# 아이그,저걸 으째야 쓰까잉~


어둠 속을 달리던 중에 깜빡 딴 생각을 하다가 수렁에 트렉터가 빠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사태가 두려워서 주춤거린다면 이미 갯벌의 사람들이 아니다. 트렉터나 경운기가 바닷물에 잠기는 것쯤이야 뭐 그리 낯선 사건도 아니고, 이 사람의 머리와 저 사람의 머리, 이 사람의 근력과 저 사람의 근력이 합해져서 문제 해결을 본다는 무언의 약속이 되어 있고 보니 그런 사태가 한 번 발생할 때마다 신뢰와 우정은 돈독해져 간다. 도무지 뭐가 무서워서 무엇을 못 한다거나 주춤거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믐이 임박한 즈음의 새벽하늘에는 옛 시인들이 여인의 눈썹이라 표현했던 하현달이 새초롬하게 떠 있고, 그 앞뒤로 큰 별 작은 별들이 너냐 나냐 하는 식으로 옹기종기 모여 무슨 소꿉놀이라도 하는 것 같다. 별 중에는 유난히 큰 별이 하나 있어서, 그 별과 하현달을 동시에 보고 있자니 불현듯 터키라는 나라가 생각난다. 그 나라의 국기, 국토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까닭에 세계사나 지리 공부를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로 하여금 아시아권이냐, 유럽권이냐, 하는 고민을 하게 하는 나라, 그런데 그 나라의 국기는 왜 그렇게 새초롬한 달 하나에 별이 또 하나일까, 하는 새삼스런 궁금증이 슬몃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한갓진 잡념을 끌어안고 있을 여유는 내게 이미 없었다. 트렉터는 여전히 ‘트렉터스럽게’ 덜컹거렸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확인이라도 해보자는 듯 껑충 뛰어오르는가 하면, 요새 유행하는 ‘말춤’이라도 추듯이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리다가 다시 어딘가로 꼬나박히듯이 내려앉는다. 그때마다 내 입에서는 “와따 이것이 뭐냐, 오매 죽겄네”따위 소리들이 절로 튀어나온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놀이동산에서 청룡열차를 탄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니다. 청룡열차와는 차원이 완전 다르다. 청룡열차가 내게 주는 그것이 심리적인 놀라움이라면 갯벌을 달리는 트렉터는 육체적인 아픔이다. 가슴 근육이, 갈빗대가, 엉덩이가 아프고 덜덜 떨린다. 이십 일을 넘어 한 달이 다 돼 가는데도 내 몸은 갯벌을 달리는 트렉터에 적응을 못하고 그렇게 자발을 떨고 있었다.


# 바닷물 속을 달리는 경운기


그러면 같은 트렉터 안에서 같은 길을 달리고 있는 아줌마들은 어떤가. 전쟁터를 달리는 말 등에서 잠을 자는 노련한 장군의 이미지를 나는 아줌마들에게서 보고 있었다. 그렇게도 태연하고, 그렇게도 의젓하고, 그렇게도 안정감이 있을 수 없었다. 사람이 말 등에 올랐을 때는 자기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말의 흐름에 따라야지만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줌마들은 이미 그런 경지에 올라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억, 소리 한 번 나오지 않았다.

갯벌의 여인들, 그들은 참으로 많은 세상을 살고 있었다. 조개를 잡는 것은 그네들의 직업이면서도 직업이 아니었다. 그들의 직업은 ‘살림꾼’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야기꾼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조개잡이만 하는 게 아니라 농사를 짓기도 하고, 모싯잎으로 송편을 만들어서 파는 곳에 가서 송편을 빚기도 하고, 해태 양식장에 가서 포자 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안 청소도 해야 하고 밥상을 차리기도 하며, 빨래도 해야 하고 등등 하루 동안 처리해내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래서 갯벌의 여인들은 늘 잠이 모자랐다. 그래서 그들은 트렉터에 올랐다 하면 십여 분 정도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이 고개를 수그린 채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그렇게 잠시 쪽잠을 이룬 뒤에는 그들의 주특기인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트렉터를 타고 갯벌을 달리는 약 사십여 분의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 이 시간을 아줌마들은 참으로 잘도 활용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놈의 태풍이 사람 여럿 죽여놨어 잉?”
“참말로 누가 아니라제.”
“아이 그 말이 내 말이랑게.”


# 돌아갈 시간 막바지 작업


수확의 계절이 되면서 아줌마들의 주된 이야기 거리는 단연 태풍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지도 한참이어서 이젠 옛 이야기가 되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태풍이 지나간 직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예측하기도 어려웠던 상처가 여기저기서 마구 드러나고 있었다. 논바닥의 벼들은 영글도 안 든 채로 나 다 익었어요, 하는 투로 누렇게 물만 들었고, 밭고랑에 콩이며 팥들은 내용이 차기도 전에 가을이 와 버린 까닭으로 껍데기만 잔뜩 매달려 있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농작물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해서 어디에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지만, 바다에 이르면 상황이 아주 복잡했다. 지난 해 태풍이 몰고 온 폭우로 소금이 죄다 녹아버리는 바람에 염전 사람들의 피해가 막심했었다. 가두리 양식장 같은 데는 피해가 발생하면 죽은 고기도 있고 등등 피해의 증거가 있지만 소금은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서 만든 소금이 도로 바닷물이 되어버렸다고 한탄하는 소리만 전설처럼, 어디 낯선 나라의 이야기처럼 거리를 떠돌 뿐이었다.

게다가 작년의 경우 소금값이 그야말로 금값이 되는 바람에 염전 사람들의 심리적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소금이 가진 놀라운 치유력이 알려지면서 한국 소금이 덩달아 널뛰듯이 올라버렸다. 그 바람에 농민들의 쌀처럼 가격이 거의 묶여있다시피 해온 소금이 순식간에 네 배, 다섯 배까지 치솟았다. 염부들은 이제야 ‘우리에게도 살만한 세상이 주어지나 보다’고 가슴이 풍선처럼 마구 부풀어 올랐지만, 세상에, 태풍이 몰고 온 폭우가 소금창고를 통째로 삼켜버릴 줄이야.

“어매 죽겄네. 다 날아가 부렀어라우.”

태풍이 지나간 며칠 뒤에 찾아갔을 때 염전의 주인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짭짤한 바닷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소금으로 신분을 변동하기까지의 과정을 내게 참으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던, 며칠 만나는 동안 소주도 몇 번 함께 마시고 해서 정도 깨나 들었던 사람이었다. 시커먼 소금창고 옆의 허름한 무허가 달동네 판잣집 같은 곳에 애 엄마를 살게 해서 미안하다고, 소금값이 올랐으니 ‘집 같은 집’ 한 채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즐거워하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다 날아가 부렀어라우”, 그 한 마디가 내 귓속에서 오랫동안 피리소리처럼 들렸다.


#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그때는 소금만 그렇게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바지락 농장에 와 보니 어패류도 그렇게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나가버린단다. 그랬다. 바지락 농장에서는 날아간다는 표현이 아니라 나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나간다. 어디로? 모른다. 일단 자리를 잡았다 하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바지락이 거대한 바람 속에서 어떤 종류의 고통을 얼마나 겪다가 어디로 가버리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내가 일하는 바지락 농장 주인은 말했다. 많으면 칠십 퍼센트, 적어도 오십 퍼센트는 피해를 본 것 같다고, 그래서 제대로 다 거둬들인다 해도 잘하면 본전치기나 하고, 조금 더 잘하면 자신의 수고비 정도나 건질 것 같단다. 그나마 그 정도는 다행인 편이었다.

이웃 농장의 바지락은 그 피해가 한눈에 그냥 봐도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손가락을 쫙 펴서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 바지락을 캐면 최소한 이십여 마리는 나와야 본전치기나 된다는데 이웃 농장은 그것조차도 아니고 글쎄 이게 고작 대여섯 마리밖에 안 나와주는 것이다. 아줌마들은 그 바닥을 볼 때마다, 지나칠 때마다 애간장이 타들어가는 표정으로 한두 마디씩 주고받곤 했다.

“아이고 이것이 먼 일이까아,”
“종패를 사천 만원어치나 뿌렸다는디.”
“아 작년에도 이 사람은 아예 작업도 못 하고 말았잖여.”


# 달리는 트렉터에서 태연히 쪽잠을


# 돌아갈 시간을 기다리는...



“나는 인제 그 사람 얼굴도 못 보겄더만. 내가 뭐를 잘못해서 그렇게 돼부린 것맨치 미안히서 말여.”
“그러엄. 그것이 그렇당게. 넘의 것이 잘 돼야 내 것 잘 된 것도 오진 법인디 으째야 쓸까 몰러.”
옆에 가만히 서서 아줌마들의 그런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내 마음이 슬슬 동요하곤 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흥분하고 있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주제였다고나 할까. 그랬다. 내가 아직 소년 시절이었을 때만 해도 그런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전라도 말로 ‘방천’이 났다 해서, 산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이 논둑을 무너뜨렸을 때, 동네 사람 대부분이 나서서 그 무너진 논둑을 복구하는데 누구 한 사람도 일당을 바라거나 품앗이를 한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와달라고 해서 온 사람도 없었다. 각자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다가 문득 아내에게, 혹은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한 마디 하는 것으로써 그날의 공동작업 참여가 결정되었다.

“아 쩌그 머시냐, 운동양반네 방천이 나가 부러서 깝깝허게 되았는디, 오늘 하래는 거그 가서 손을 좀 보태야 쓸랑 개비여.”

자기 자신의 몸으로 품삯도 없는 힘든 일을 해야 하는데도 마치 남의 일처럼 간단하게 내놓는 그런 식의 한 마디가 전부였다. 하긴 무슨 말이 더 필요할 것인가. 사정상 일손을 직접 보태지 못하는 사람은 막걸리를 보내거나 안주거리를 보내기도 한다. 요새 한참 유행하는 재능기부와도 차원이 다른, 무엇을 주면서도 준다는 의식이 없는, 준다는 의식은커녕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인식하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결국 네가 있어서 내가 너를 볼 수 있다는, 그래서 외롭지 않다는, 그러므로 내 것 못지않게 네 것도 중요하다는 얘기를 입이 아닌 온 몸으로 하고 있는 셈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런 이야기를, 그런 안타까움을, 그런 풍경을 나는 갯벌의 아줌마들에게서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듯이 다시금 보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그 일이 즐겁지 않으랴. 힘든 일이 어찌 힘들게만 여겨질 수 있으랴. 그렇다. 갯벌에서의 조개잡이는 사실 엄청나게 힘든 노동이었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해두자.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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