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네번째 이야기


# 라면이 있는,아주아주 양호한 간식시간


하루에 잘해야 세 시간 일을 하고, 짧을 때는 딸랑 한 시간 만에 끝나기도 한다는 말에 어떤 사람이 관심을 표명해 왔다. 자기도 그 일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아, 이런 오해가 생길 줄이야. 내가 보기에 그는 십 분도 못하고 나가떨어질 타입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공사장 막노동판에서도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둔 경력이 한 번도 아니고 두세 차례나 있었으니까. 편한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게 갯벌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난감했다.

작업 시간이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인 것은 맞지만, 날카로운 갯바람에 온 몸이 노출된 상태에서 치러내는 그 노동의 강도와 피로도만을 놓고 말하자면 아마도 여덟 시간 아니 열 시간 근무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운동 경기로 비유를 하자면 야구나 축구 같은 상대적으로 한가한(?) 종목은 절대로 아니고, 짧은 시간 동안에 젖 먹던 시절의 힘까지 끌어내야 하는 권투나 레슬링 혹은 이종격투기 쪽에 가깝다.

일단 작업 현장에 들어섰다 하면 잠시라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고, 힘들어 죽겠다고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서도 안 되며, 흙물이 눈에 들어갔다고 칭얼대는 것은 자유지만 작업조건이 너무 열악하다고 비판한다면 ‘촌놈’ 소리 듣기 십상이다. 화장실도 없는 작업장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혼자서 투덜대는 것 역시 자유지만 겉으로 드러낸다면 간단히 말해서 민폐에 해당된다.

“그렇게 힘드신데, 그 일을 꼭 하셔야만 되는 거예요?”

어느 하루 제수씨에게 나의 민감한 부분을 들켰다고나 할까, 하여튼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데를 분사식 소염제로 달래고 있을 때 예고도 없이 방문한 제수씨의 입에서 안타까워 죽겠다는 투의 그런 말이 나왔다. 그때 나는 갯벌에서 돌아와 목욕을 막 끝낸 참이었고, 온 몸에 소염제를 뿌려대고 있었다. 밖에서 그 소리를 들은 제수씨는 내가 아마 모기에 물린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얼굴을 마주했을 때 제수씨는 “지금도 모기가 있어요?” 하고 있었고, 나는 얼떨결에 그동안 감추고 있었던 것들을 죄다 실토하고 말았다.


# 돌아가는 트렉터 위에서 술참거리 먹기


그동안 내가 동생들에게 얘기했던 갯벌에서의 조개잡이는 그야말로 ‘갯벌에서의 조개잡이’일 뿐이었다. 재미있다, 신기하다, 의미도 참 많은 것 같다 하는 정도. 그러니까 우리 형제들이 모두 모여서 가끔 소풍 삼아 가곤 했던 ‘조개잡이 놀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화려하게, 낭만적인 이미지를 잔뜩 심어가며 선전을 해대고 있었던 내가 온 몸을 파스로 도배하다시피 소염제를 뿌려대고 있으니, 제수씨로서는 아마 놀랍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 자신도 아직 잘 믿어지지가 않는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렇게도 힘들고, 힘들면서도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열두 살에 집을 나와서 스물 하나였던가, 둘이었던가, 하여튼 이십대 초반에 처음 공사장 막노동을 접한 이후로 수중에 돈이 떨어졌다 하면 아무런 부담 없이 찾아가곤 했던 데가 건설현장이었다. 그 중에 가장 힘든 일이 콘크리트 타설 작업이었고, 다음으로 힘든 일이 형틀목공이었다.

그래도 공사장에는 이른바 ‘눈치껏’이라는 것이 있고, ‘요령껏’이라는 것 또한 있어서 그야말로 눈치껏 혹은 요령껏 짬짬이 몰래 쉬어갈 수도 있었고, 담배 한 대참이라 해서 공식적으로 아예 차분히 앉아 쉬어보는 시간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갯벌에서의 조개잡이는 구조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했다. 좌우사방이 모두 척척한 흙뿐인데 어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볼 것인가. 일단 트렉터에서 내렸다 하면 그날의 작업 시간이 한 시간이건 세 시간이건 이유불문에 조건불문하고 그냥 서서 움직여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발목이며 팔목이 시큰시큰하고, 옆구리 갈비뼈는 벌써 전에 뚝뚝 부러져서 다시 만들어지는 것 같고, 허리는 이제 막 끊어질 것처럼 위태위태,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입에서는 단내가 푹푹 나고, 뱃속에서는 뭔가를 좀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 먹고 싶지도 않아져 버린다. 그날 주문량 작업이 다 끝나고, 저만치 들어오는 물을 바라보며 트렉터에 타고 났을 때, 그때 비로소 뭔가를 좀 먹자고 달려든다.


# 이 정도는 매우 양호한 간식시간이다.


손에 낀 장갑을 벗을 생각도 없이, 빵이건 우유건 들고 먹으려고, 마시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도 어려울 수가 없다. 우유는 입술에 닿자마자 어어 이거 내가 들어갈 곳이 아닌데, 하는 듯이 코로 눈으로 턱으로 마구마구 흘러 내려 버리고, 빵은 어떻게 겨우 입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마음 놓고 씹을 수가 없다. 길들이지 않은 말처럼  덜컹덜컹 뛰어대는 트렉터의 흔들림 때문에 굳이 씹지 않아도 씹어지는 느낌이고, 애써 씹으려 하다가는 혀를 씹어버릴까 두려워서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릴 수가 없다.

그때 어느 순간 우리는, 개흙으로 떡칠을 하다시피 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킬킬거리고, 그리고 한 마디씩 한다. “모르는 사람이 우리를 보면 그지도 저런 그지가 있을까, 할 거여 잉?” 그리고는 죽는다고 웃어대며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 그런 웃음이 갯벌에서는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일하는 행위 자체가 환멸스럽다거나 신물이 나지 않고 그냥 그렇다. 그럴 뿐이다. 총총 뛰어다니는 갈매기 한 번 보고 나면,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팽이처럼 뱅글뱅글 하는 모양으로 날아다니는 도요새 무리를 힐끗 한 번 보고 나면 모든 게 다 치유되어 버린 느낌이다.

이상하다. 신기하다. 희한하다. 건설현장에서 이 정도의 강도 높은 노동을 한다면 아마도 한 시간에 열 번도 넘게 “입에서 돈냄새가 푹푹 난다”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갯벌에서는, 조개잡이 현장에서는 그런 소리 대신 “아따 목 탄다, 물 좀 마시고 해야겠다”하는 소리 정도였다.

이 신기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그게 또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우선 현장의 배경이 다른 것이다. 전제도 다른 것이다. 건설 현장이란 대체로 자본놀음이기 십상이다. 자본가는 코빼기도 안 비춰준다. 자본가는커녕 자본가의 하수인조차 얼굴 한 번 구경하기 어렵다. 여기서 저기까지 얼마, 하는 식의 철저하게 계산된 하청업자와 재하청업자가 있고 그 재하청업자에게 고용된 ‘하루살이 일꾼들’이 있을 뿐이다.


# 뭔가를 먹을 때면 달려오는 갈매기들


이 관계는 거의 보이지 않는 시스템으로 짜여 있고, 그래서 ‘일꾼들’은 뭐가 뭔지 아는 게 거의 없는 상태로 그저 시키는 일이나 하고, 언약된 돈이나 받고 나면 그대로 끝난다. 주인이 누구인지, 무슨 돈으로 그 일을 벌였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타인으로서의 입장이 있을 뿐 주인의식 같은 것은 갖고자 해도 가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심한 경우에는 내가 하는 일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시키는 일이나 하다가 끝을 내고 만다.

반면 갯벌에서의 작업은 훨씬 포괄적이고 구체적이면서 유리상자처럼 투명하게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바지락 농장 주인이 종패를 얼마치 사다가 뿌렸는지, 바지락 한 망이 얼마에 팔려나가고 있는지, 오늘 내가 잡은 바지락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등등 무엇 하나도 감춰진 것이 없고 감춰질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는 용변의 문제까지도 그렇다. 누가 어디서 오줌을 누고 있으면 아 저 사람 오줌 누는구나, 하고,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져 버린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첫째날 아주 난감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남자들뿐이라면 굳이 난감할 일이 아니었지만, 아줌마들이 주변에 있고 보니 이게 참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였다. 겨우겨우 어떻게 트렉터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해결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무례한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을 털어내기 어려웠다.

그런 찜찜한 느낌인 채로 바지춤을 여미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혔다. 아줌마들은 어떻게 해결하지? 집에서 미리 다 정리하고 나오시나? 그 뒤에 또 마려우면 그때부터는 집에 갈 때까지 꾹 눌러서 참는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오고 가고 작업을 하는 시간까지 최장 다섯 시간을 참는다는 게 가능할까? 등등 그런 삿된 의문이 머릿속을 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보았다. 아줌마들이 가끔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 처음 그 장면을 발견했을 때 나는 뭔가 희귀한 것이라도 있어서 그렇게 쪼그려 앉아 있는 줄만 알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삼복염천에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비옷 같은 것을 입고, 고무장화에 고무장갑을 착용해야만 하는 바지락 캐기 작업의 특성상 손가락 하나라도 아줌마들의 맨살이 노출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쪼그려 앉아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무엇을 하는지는 가까이 가 서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 게다. 쪼그려 앉아있는 아줌마 가까이로 나는 “거기 뭐 있어요?” 어쩌고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 하늘은 높고 갈매기는 날고


“오매 으찌까, 믓허러 오요-오.”

다가서는 나를 발견한 아줌마의 입에서 급하게 터져 나온 그 한 마디, 민망하다는 투의 웃음이 살짝 깔린,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에 나는 알았다. 알아 버렸다. 아, 오줌이구나. 어쩌면 오줌보다 더 심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자.

돌아보면 오줌과 관련된 삽화는 참 많기도 하다. 그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잊히지 않는 사건은 역시 건설현장이었다. 남산의 중앙정보부 청사 신축현장. 그곳이 내가 처음 발을 디딘 건설현장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 내 일당이 이천삼백 원이었다. 그 돈으로 교통비를 뺀 뒤에 라면이나 쌀을 사면 오륙일 정도 연명할 수 있었다. 여름 장마철과 겨울 혹한기에는 그나마도 일을 할 수가 없으니 굶어야 하는 날들이 많았다. 혼자서 자취를 하는 생활로도 그 지경이었는데 처자식을 둔 사람은 어떠했을 것인가.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 

아무튼 당시만 해도 건설현장에는 화장실이 거의 없었다. 지금은 이동식 화장실이 도처에 설치되어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현장 사무실 옆에 땅을 파서 만든 푸세식 화장실이 달랑 하나 있을 뿐이었다. 현장에서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그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하자면 어떤 경우 한 시간도 넘게 걸렸다. 건물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화장실은 멀리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현장 작업자들은 대체로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고 으슥한 곳 아무 데서나 해결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남산의 중앙정보부 신축 현장은 그 오래된 관례가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대령 계급장을 단 사내가 현장감독으로 나와 있었다. 툭하면 워커발로 작업반장의 정강이뼈를 걷어차는 그는 하루 종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다가 오줌 싼 흔적을 발견하면, 대변덩어리를 발견하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을 상대로 즉석 심문을 하고, 그리고 작업분야와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가 점심시간에 발표를 했다.


# 왜 이렇게 물이 안빠지는 거여~


그랬다. 그 시절의 그 현장에서는 점심시간에도 마음대로 쉴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면 무조건 광장으로 모여야 했다. 출석까지 불렀다. 아침에 출근할 때 제출하는  각 파트별 작업자 명단을 육군 대령 그 감독관이 손에 쥐고 있었고, 만약에 점심시간 교육에 불참한 사람이 발생하면 그 파트의 작업반장이 워커발에 채이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때문에 거의 백 퍼센트 점심 교육에 참여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교육이 참 엄숙하게도 가관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신성한 국가의 신성한 기관이다, 하는 얘기로 시작하는 그 교육의 대단원은 글쎄,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하나. 인민재판? 어쨌든 그랬다. 육군 대령 그 신성한 감독관은 수첩에 적힌 이름을 아주아주 큰소리로 우렁차게 불렀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오세요. 빨리 나와요.

그렇게 일하던 중에 오줌이 마려웠던 사람은, 그리고 똥이 마려웠던 사람은 대중 앞으로 불려 나와서 일종의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이런 얘기, 아마도 믿는 사람 거의 없겠지만 지금도 내 일기장에는 그 시절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런 시절이, 그런 무례한 야만의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을, 내가 지나왔다는 것을 내 일기장은 지금도 말해주고 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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