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여섯번째



# 햇빛 쩡쩡한 날의 먹구름


11월 들어 사흘거리로 비가 내린다. 무와 배추가 한참 물을 필요로 하는 계절에는 한 방울도 안 내리던 비가, 이제 아무 필요도 없는 계절 11월에 접어들면서 마치 장마철의 그것처럼 자고 나면 내린다. 게다가 바람은, 서 있는 사람의 머리털을 죄다 뽑아낼 듯이 거세게 몰아치는 이 바람은 또 무슨 바람이란 말인가.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보자면, 심술도 이런 심술이 없다.

갯벌에서의 비바람은 내륙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륙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어쨌든 피할 곳이라도 있지만, 갯벌에서는 감히 피할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온 몸으로 받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저항을 한다거나 무슨 결투를 하겠다는 자세를 취해서도 안 된다. 그야말로 그저 가만히 선 채로 혹은 앉은 채로, 가능한 한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그것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나마 이름이 붙은 태풍은 기상청의 레이더에 포착되어 사람들이 피해를 예상할 수라도 있지만, 기상청의 레이더로도 포착이 안 되는, 이름 없는 국지적인 폭풍우가 갯벌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이러한 국지적인 폭풍이 한 차례 지나고 나면 여기저기 도처에서 소리 없는 탄식이 안개처럼 허공을 채운다.


# 예술 같지만 재난이 돼버린 갯벌의 요철


자연 상태 그대로의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자연인 비바람은 저주나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누가 명시적으로 가르쳐준 것은 아니라 해도, 갯벌의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억울하고 슬퍼도 억울하고 슬프다고 자연을 원망하는 대신 “내년에 또 하면 되지”하는 식으로 어제보다는 내일을 바라보며 금방 흐를 것 같은 눈물을 꾹 참아낸다.

굳이 태풍의 계절이 아니어도, 일 년이면 몇 번씩 찾아오는 국지적인 태풍이 또 한 차례 지나갔다. 간밤의 거센 바람으로 갯벌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바람은 마치 골리앗처럼, 거대한 중장비처럼 갯벌의 흙을 허공으로 퍼 올렸다가 다시 우수수 쏟아 부어버렸다. 그리하여 대체적으로 고르게 편편하던 갯벌에 심한 요철이 생겼고, 손가락으로 살짝 후비기만 해도 나오는 바지락 등 어패류들은 흙 속으로 터무니없이 깊이 파묻혀서 죽었거나 혹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갯벌에 생긴 거대한 요철은 자연이 제작한 매우 아름다운 예술품처럼 보이기는 한다. 들어갔는가 하면 나오고, 나왔는가 하면 들어가 있으면서 군데군데 햇빛을 머금은 은빛 찬란한 물이 고여 있으니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거기에 갯벌 사람들의 피와 땀과 한숨과 그리고 현금이 파묻혀있다.


# 작업 중에도 전화가 울리면...


현금, 그래, 현금이 있었다. 그 현금은 그동안 피와 땀을 흘려서 모은 것일 수도 있고, 금융기관에 사정을 해서 얻은 대출금일 수도 있고, 이번 한철만 쓰자는 조건으로 친구에게서 그의 아내 몰래 빌려온 것일 수도 있으며,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일 수도 있다. 돈이 형성된 과정이야 그렇게 저마다 다르지만, 일단 투자라는 이름으로 갯벌에 뿌려지고 나면 그 운명은 아무 차이가 없이 똑같아져 버린다. 공평도 이렇게 철저하게 공평한 공평이 없다.

제아무리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제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갯벌에서는 달리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하나도 없다. 바람이 불면 다 같이 바람 앞에 서야 하고, 비가 쏟아지면 다 같이 비를 맞아야 할 뿐이다. 제아무리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뿌린 종패를 중심으로 성을 쌓아서 바람을 막을 수는 없고, 거름을 주어서 조개를 얼른 크게 할 수도 없다.

그 해의 조개 농사가 성공을 했느냐 못 했느냐는, 사람이 부지런한가 게으른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소 유치한 표현을 쓰자면 복불복이다. 바람이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았는가, 어느 쪽으로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방향을 틀었는가, 어디서 한 번 미친 듯이 회오리를 일으켰는가, 등등 이런 문제를 사람이 임의로 조정할 수는 없다. 결정은 바람이 한다.


# 갯벌에서는 전화가 생명줄이다.


바람, 오, 이 바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어디서 오기에 이토록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난폭해지는가. 과학은 최첨단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최첨단 과학이 사람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주지는 못한다. 아아,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의 위로를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그래, 그래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랬다. 내가 일하고 있는 현장에서도 바지락 선별기와 손수레와 그밖에 여러 가지 기자재들이 날아가 버렸다. 선별기는 스테인리스 제품이고, 건장한 남자 두 명이서 들어야만 할 정도의 무게였다. 이 무거운 선별기에 손수레와 기타 등등 잡다한 기자재들을 묶어두는 게 바지락 채취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관행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없으면 작업을 못한다. 트렉터를 몰고 집에까지 가서 새로 장만해 올 수도 없다. 누구에게 빌릴 수도 없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갯벌을 헤매고 다니며 찾아보는 것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바람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는 갯벌을 헤매고 다녔다. 어디에 있느냐. 어디에 있는가. 불러볼 수도 없는 그것을 찾아서 허둥지둥 헤매기를 얼마나 했던가.


# 바지락이 안나와서 그냥 서 있어버리는 사람들


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날아간 기자재들이 아주 사라져 버리진 않고 1킬로쯤 저쪽의 통발 어망에 갇혀 있었다. 무거운 것들은 뻘 속에 깊이 묻혀 있었고, 소재가 알루미늄이라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손수레만 나 여기 있어요, 하는 듯이 뻘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어망은 당연하게도 산산이 찢겨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찾아낸 그것을 작업장까지 운반하기 위해서는 다시 돌아가서 트렉터를 몰고 와야 했다.

직선거리로는 1킬로밖에 안 되지만, 그 중간에 다른 사람의 바지락 농장이 있는 까닭에 멀리 우회해야만 했다. 그 바람에 두 시간여가 감쪽같이 흘러가 버렸다. 밀물 때문에 길어야 서너 시간여밖에 작업을 못하는 갯벌에서 두 시간은 하루나 다름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의 바지락 채취 현장을 들여다보았다.

참담했다. 어이가 없었다. 바지락을 캐러 나온 사람들이 바지락을 구경하기조차 어려워진 바지락 농장에서 서성거렸다. 일을 한다고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일하는 손길이 아니었다. 그날 주문량 칠십 자루를 받고 나온 사람은 겨우 삼십 자루나 채웠을까 말까 할 정도였고, 백오십 자루가 나와야 할 면적에서 겨우 스물세 자루 나오고 말았다면서 쓴웃음을 짓는 젊은 귀농한 농부의 눈가에는 그늘이 짙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내일이라는 이름의 오늘이 다시 왔다. 사람들은 어제의 기억을 애써 잊어가며 트렉터를 몰고, 혹은 트렉터를 타고 다시 갯벌로 들어갔다. 바람은 아직도 하고자 하는 일을 다 끝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온 세상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야 할 무엇이 바람에게 있는 것인가?


# 이름도 없는 국지적인 태풍에 걸레가 돼버린 어망


그래, 다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하늘마저 두꺼운 커튼을 내린 것처럼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내륙에서 날씨가 이런 식으로 궂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하던 일을 멈추거나 해야 할 일을 포기하기 마련이지만, 갯벌에서는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갯벌은 통째로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춘다. 하늘과 바다가 마침내 만나버린 듯이, 그리하여 얼싸안고 미친 듯이 뺑뺑이를 돌며 괴성을 질러내는 듯이 어지러워서 사람은 눈을 뜰 수도 없고, 눈을 뜬다 해도 바로 눈앞의 것조차 식별하기가 어렵다. 이런 때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가만히 서서 묵념이라도 하듯이, 기도라도 하듯이 침묵을 지켜야 할 것 같지만, 그러나 갯벌의 사람들에게 그런 정신활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갯벌에서의 시간은 항상 빠듯하다. 나간 물은 반드시 들어온다. 나갔던 물이 돌아와서 사람의 발목을 채우고 무릎을 지나 허벅지를, 허리를, 생명을 요구하기 전에 그날의 주문량을 채우고 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날씨가 좋거나 나쁘거나 주문자의 요구는 충족시켜줘야 한다. 하루에 이십 킬로그램짜리 바지락 오십 자루면 오십 자루를, 백 자루면 백 자루를 반드시 주문자가 지정한 차량에 올려줘야 한다. 만약에 그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주문자는 거두절미 하고 “너 배부르구나, 그럼 놀아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놀아라” 간단한 이 한마디로써 거래를 끊어버릴 수도 있다.

바지락은 백 퍼센트 완벽하게 당일 생산, 당일 출하 원칙을 지켜왔다. 바지락 농장에서 이것은 종교의 계율 이상으로 철저하게 지켜진다. 오늘 주문량이 적다고 해서 많이 잡아 두었다가 내일 출하하는 일은 없다.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가슴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잔머리를 썼다가는 모두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경계심 때문일까? 그런지도 모른다. 종교에 모태신앙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갯사람들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그런 원칙의 중요성을 배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갯사람들의 그러한 원칙이 그들 자신을 때로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루 이백 자루의 생산능력을 가진 사람도 그날 주문량이 오십 자루밖에 안 되면 오십 자루로 그날 작업을 끝내야 한다. 요컨대 주문량이 적은 날은 일곱 명이서 두 명분의 작업밖에 못하지만, 주문량이 많은 날은 일곱 명이서 열다섯 명분의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러고도 못 채우면 다른 농장에서 빌리거나 매입해서 채워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갯벌은 매일이 전쟁이다.


# 일 킬로도 넘게 날아와서 푹 파묻혀 버린 기자재


그렇다. 갯가의 사람들에게 갯벌은 일단 들어섰다 하면 전쟁터가 된다. 총성도 없고, 칼부림도 없고, 피비린내도 없는, 전략회의도 없고, 작전명령도 없고, 피난민도 없는, 하나도 전쟁 같지 않은, 갯벌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 멀리서 보자면 그저 평화스럽기만 한, 갈매기와 도요새와 사람 그리고 트렉터 뿐인 세계인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는 시간이 똑딱거린다. 그 소리는 폭탄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제 물이 들어온다는, 물이 들어오기 전에 작업을 끝내야 한다는 긴장감 때문에 사람들은 막걸리 한잔도 편안하게 마실 틈이 없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의 바다는 인간의 경험세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상청에서 물이 들어오는 시간을 오후 한 시로 예보해놓고 있다 해도, 일기가 몹시 불순할 경우 그것은 오후 한 시가 아니라 두 시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한 시간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

뿐만이 아니다. 농장주의 경우 그날 물량을 많이 받은 사람은 혹시라도 취소 전화가 걸려올까 신경을 써야 한다. 반대로 그날 물량을 적게 받은 사람은 혹시라도 추가요청 전화가 걸려 오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수시로 전화기 배터리 용량을 확인하기도 한다. 취소전화가 걸려오면 그동안 애써 잡아서 목욕을 시키고 선별을 마치고 계근까지 끝낸 바지락을 갯벌에 도로 쏟아 부어야 한다. 반대로 추가주문이 들어오면 마지막 젖 먹던 시절의 힘까지 동원해서 새로운 땀을 흘려야 한다.

휴대전화가 개발되어 보급되지 않았다면 어찌했을까 싶을 정도로, 바지락 농사를 직접 짓는 사람에게 있어 휴대전화는 이제 생명줄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종패를 뿌리고 그것이 자연적으로 크면 잡아내는, 거름도 안 주고, 약도 안 치며, 먹이도 안 주고 그저 세월만 기다리고 있다가 때가 되었다 싶으면 잡아내는 방식의 이를테면 가장 원시적인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최첨단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물때를 확인하는 한편 걸려온 전화를 받고 “아 예, 형님, 열다섯 자루 추가라고요? 고맙습니다”하고 씨익 웃는 장면은 경이롭기조차 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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