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여덟 번째


# 아주 부드러운 느낌의 모래밭 같은 갯벌


아,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겠구나.

뜬금없는 곳에서 느닷없는 생각 하나를 얻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뜬금없다 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지난 삼 개월 여동안 거의 매일이다시피 출근해 온 주차장이었다. 갯벌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고 자동차 문을 열려 하는데 아줌마 한 분이 고무장갑 낀 손가락을 입에 대고 호호 불며 다가왔다.

“나 쪼깨만 태워다 주시오 야?”

아주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눈 바는 없지만 안면은 충분했다. 내가 집에서 갯벌을 오가는 길목 어디쯤에 그녀의 동네가 있었다. 그 동네의 아줌마들 세 분이 나와 함께 일을 하고 있었고, 그네들의 출퇴근을 내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농장으로 일을 나가는 아줌마들이 가끔 내 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날은 2인승 미니밴의 화물칸에 일곱 명이나 태우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뭐 다른 이상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육체의 편함보다는 불편에 더욱 익숙한 사람들 특유의 활달한 농담과 웃음소리와 그리고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들끼리만 아는 각종 이야기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뭐랄까, 날씨가 느닷없이 엄청 추워져 있기도 했고, 바람도 심하고, 하여튼 좀 묘한 날이었다. 뒤늦게 달려와서 태워달라고 말한 그 아줌마의 얼굴에 흙이 많이 묻어 있었다. 갯벌에서 막 나온 사람의 얼굴에 흙탕물 정도 묻어 있는 것이야 뭐 흔해빠진 일이었다. 굳이 흙 묻었다고 안타까워 할 필요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의 내 정신이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 나는 새삼스럽게도 그 아줌마의 흙탕물이 끼얹어진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쳐다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고 으쩌까, 눈으로 안 들어갔기 망정이지 눈으로 들어갔으면 어쩔 뻔했어.”

그런 희한한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손이 들려지고 있었고, 아줌마의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주겠다는 듯이 내밀어지고 있었다. 그때, 그 순간, 참으로 아슬아슬한 그 순간에 뭔가가 내 머릿속을 휘젓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아줌마의 얼굴을 정말로 손으로 닦아주고 있었을 것이다.


# 이 오토바이가 왜 여기 쓰러져 있는거야~


그때 내 머릿속을 순식간에 휘저어놓은 것은, 며칠이나 지난 지금도 이해가 불가능한, 도무지 답을 낼 수가 없어서 담배만 자꾸 피워지는 그 아줌마의 표정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지면서, 금방 눈물을 쏟아놓을 듯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하고 하늘을 보는 아줌마의 그 표정에 나는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게 얼어붙지 않았다면 내 손은 필경 그 아줌마의 얼굴에 닿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잘된 일이었다. 아주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뜻밖의 상황전개에 당황한 나는 일단 자동차 문을 열고 운전석으로 기어 들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얼른 타세요. 그렇게 짐짓 소리를 지르고, 곧바로 시동을 걸고 있었던가 어쨌던가. 하여튼 어머니 살아계실 때, 엄마 본다고 왔던 누이동생이 했던 말이 얼핏 생각났다. 오빠가 마누라도 없이 사니까 불안하다고, 동네 근처 어디에서 성폭행 사건이라도 벌어지면 오빠가 제일 먼저 붙잡혀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걱정을 해주던 누이의 말이 그제야 조금, 아주 조금 이해가 되던 것이었다.

내가 만약에 그 아줌마의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준다는 명분으로 손을 내밀어 만졌다면, 그리고 그 아줌마가 내 손길을 매우 불쾌하게 여겨서 신고라도 해버렸다면, 피해자 진술 위주로 되어있는 성폭행 혹은 성추행 수사 관행상 나는 꼼짝없는  성추행범이 되고 말았겠다 하는 그런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 홱 지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한심한 안도감 정도에서 그날의 사건(?)이 종결되었다면 굳이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랬다. 나는 그녀가 보여준 그 순간의 그토록 글썽글썽한 눈물방울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하려 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생각나고 있었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가장 먼저 눈앞에서 그 눈물이 어른거리고 있었고, 물때가 되어 갯마을로 출근을 하는 중에도 문득문득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도 순식간에 눈물을 마치 이른 아침 토란잎이나 연잎에 맺힌 방울방울한 이슬처럼 리얼하게 만들어낼 수가 있는 것인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답은 안 나오고 오리무중인 채로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그쯤 했으면 잊혀 질 법도 하건만, 그런데 아니었다. 더욱 생생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 아줌마의 눈물방울은 마치 내게 주어진 무슨 숙제처럼 다가와 있었다. 도대체 그날 그 아줌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물어보고 싶었다.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물론 모르고, 누구의 엄마 혹은 아내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다만 농사를 지으면서 아르바이트로 가끔 한 번씩 바지락 농장을 나간다는 짐작이나 해볼 수 있을 뿐이었다.


# 오토바이를 두고 떠나야 하는 가슴이 참 아릿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구에게 그 아줌마를 특정해서 물어볼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바지락 농장의 작업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남자들 두세 명씩이, 혹은 농장주의 가족들 두세 명씩이 이삭줍기나 하고 있을 뿐 따로 아줌마들을 고용할 이유가 없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내년 봄을 기약해야 하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나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해야 할 숙제를 못해서 찜찜한 기분인 채로 또 며칠이 지났다. 갯벌에서 밀물에 쫓겨 나오던 길에 오토바이를 보았다. 자빠져 있었다. 헬멧도 나뒹굴어져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서 대략 칠팔 킬로미터쯤 되는 지점이었다. 시간은 아마 오후 한 시쯤이었을 것이다. 날씨는 맑았다. 그토록 거세던 바람도 없었다. 비도 내리지 않고, 눈발도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접하는 매우 부드러운 날씨였다.

바람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는, 햇살만 가득 퍼져있는 갯벌은 한 폭의 거대한 점묘화 같았다. 붓에 물감을 잔뜩 묻혀서 몇날며칠 아니 몇 년 동안이나 콕콕콕 점을 찍고 또 찍어서 완성한 그림 한 폭, 그것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금빛 은빛을 내고 있었고, 뻘인데도 뻘 같지가 않고 뭔가 뽀송뽀송한 느낌이어서 가만히 누워보고도 싶어지는 풍경이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뽀송한 느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트렉터를 타고 들어설 때의 갯벌은 다소 우중충했고, 간간이 빗방울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추웠다. 훨훨 타는 불 깡통을 트렉터에 싣고 달리면서 가끔 손을 녹여야 했다. 작업 도중에도 당연히 이삼십 분 간격으로 불 깡통을 찾아가서 손을 녹이고, 커피를 마셨다.

아, 커피, 그래, 커피가 있었다. 한가한 날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매우 느긋한 날이었다. 지난 삼 개월 동안 갯벌에서 컵라면은 두세 차례 먹어 보았어도, 커피는 처음이었다. 하긴 본바탕의 작업은 이제 다 끝나서 이삭줍기 시즌이었다. 본바탕의 작업에서 한 사람이 하루 평균 바지락 아홉 자루를 채취한다면, 이삭줍기는 잘해야 두세 자루, 그러니까 계산을 해보자면 자기 자신의 일당이나 겨우 채우는 정도였다. 농장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작업이었다. 하루쯤은 한가해도 무슨 죄받을 일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물이 가장 많이 나간다고 하는 10물이었다. 물이 가장 많이 나가는 날은 작업 시간도 당연히 길어진다. 그리고 이런 날은 대체로 느긋하다. 마음도, 몸도, 모두가 한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제법 나눌 수가 있어진다. 물이 나가는 한계지점인, 갯벌의 저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말을 내가 했고, 이어서 그 너머 이덕화의 별장 인근 도로변에 늘어선 포장마차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둥 그런 하나마한 소리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 춥다고 밥 안 먹냐~


어쨌든 물이 끓으면 삐융 소리가 나는, 일명 삐융 주전자를 불 깡통 위에 올려놓고 삼십여 분쯤 작업을 하다가 삐이,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와서 일회용 믹서커피를 가져온 대로 다 챙겨놓고 옆에 농장 사람들을 초대했다. 김 공장을 운영하다가 말아먹은 뒤로 바지락 농사에 뛰어들었다고 하는 예순세 살의 자칭 연애박사 아저씨는 “이것이 낭만이여 잉, 낭마안” 하고 있었고, 옆에 서 있던 그의 아내는 “아이고 이것 참 맛나기는 맛나네 잉?” 하면서 뭔가 수줍다는 투의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바닷물이 자작거리는 갯벌 위를 서성거리며 마시는 일회용 커피의 맛은 사뭇 깊은 맛이 있는 듯이 여겨졌다. 내 개인적으로는 일회용 믹서커피를 매우 싫어했지만, 갯벌에서는 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커피라는 용어 자체가 내 마음을 휘어잡고 있었다. 사람이 뭔가를 먹고 있을 때면 으레 달려 날아오는 갈매기들이 허공을 선회하며 끼룩 끼룩 소리를 내고 있기도 했다.

뭔가 본질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서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군산 미군기지에서 날아온 전투기의 살인적인 폭음이 평소에는 매우 불쾌하고 짜증스러웠지만, 그날은 무슨 까닭인지 소리도 안 들리고 하늘에 빨랫줄처럼 하얀 줄만 그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소리가 안 들리는 게 아니라 그 소리의 폭력성을 느끼지 못한 채로 그저 흘려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 뒤로 또 얼마나 지났을까. 별로 나오지도 않는 바지락을 캔다고 한참이나 동분서주하다가 우리는 또 불을 쬔다고 불 깡통 앞으로 모여들었다. 만약에 바지락이 예전처럼 많이 나와 준다면 잠깐 손이나 녹이고 이내 다시 작업을 시작했겠지만, 손으로 한두 마리씩 줍다시피 하는 작업이고 보니 하나도 바쁘지 않은, 도무지 바빠야 할 이유가 없는, 그래서 끼룩 끼룩 소리를 내는 갈매기를 쳐다보며 문득문득 생각나는 지난 이야기들을 주마간산 격으로 늘어놓게 되던 것이었다.

갯벌의 안개에 잡혀 헤매다가 밀물에 쓸려 죽을 뻔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여인에 관한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였다. 어느 여인이 한밤중에 물이 빠진 갯벌로 백합을 잡으러 들어갔더란다. 들어갈 때는 안개가 없었지만, 백합 잡는 재미에 함뿍 빠져있던 어느 순간부터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되어 밀물이 들어올 즈음에서야 그것을 알았다. 


# 이삼십분 간격으로 불 깡통을 찾아가서 손을 녹이고, 커피를 마셨다.


갯벌에서의 안개는 완전히 마법의 시간이었다. 평생을 갯벌에서 살아온 사람도 안개가 깔린 갯벌에서는 방향감각을 잃고 허둥거리기 마련이었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날의 갯벌은 마치 구름이라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무엇을 하면서도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거의 의식을 못하는 무아의 경지 속으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었을 때 만약 물이라도 들어오면, 그는 그대로 전설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욱한 안개 저편으로 아슴아슴하게 불빛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불빛이 고창의 해안선 마을 쪽인지 시퍼런 물이 출렁거리는 바다 건너 부안 쪽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허둥거리는 동안 밀물이 들어오게 되면 그대로 잠기고 만다는 것이다.

게다가 밀물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달라지는 갯벌의 형태에 따라온 지그재그 형식이 될 수도 있고, 양 옆에서 몰려올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뒤에서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죽음이 되어버린, 전설이 되어가는 사람이 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 일 년에 두세 명씩은 나타나곤 했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안타깝게 눈물을 글썽이게 하는 것은 말이에요. 해태 양식장에 박혀 있는 말뚝에 자신의 몸을 꽁꽁 묶어둔 그런 죽음이에요.”

물에 잠겨 죽어가는 사람이 나중에 자신의 시신을 찾느라고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이 헤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해태 양식장에 박혀 있는 말뚝에 자신의 몸을 묶어둔다는 얘기였다.

“물이 막 들어오는데 트렉터의 시동이 갑자기 꺼져 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는 트렉터를 포기해야 해요.”


# 이것이 낭만이여 낭마안~


점입가경이라고나 할까. 마법 같은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한밤중에 백합을 캔다고 안개가 자욱한 갯벌을 뒤지고 다니던 그 여인은 그러면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물이 막 들어오는데 뭔가 귓속으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그렇게 해서 그녀는 갯벌에 돌출된 암초에 도착했고, 그 암초를 온 몸으로 붙잡고 물 속에서 사투를 벌인 지 십여 시간, 마침내 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면서 그녀는 잠시 멍해지기는 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갯벌 밖으로 나와서 아무 데나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는 얘기였다.

그런저런 이야기들, 한 번 시작된 이야기는 좀처럼 끝날 줄을 모르고 작업 중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물이 들어와서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던 중에 그것을 보았다. 트렉터 짐칸에 타고 있었던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운전을 하는 농장주는 멀리서부터 그것을 보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이 쓰러져 있는 줄 알고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진 채로 가속도를 내서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 오토바이가 대체 뭔 일로 여기 자빠져 있는 거지?”

우리는 쓰러진 오토바이를 둘러싸고 선 채로 허둥거렸다. 좌우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빠져 있는 오토바이를 일단 일으켜 세워놓고 다시 살펴보니 키가 보이지 않았다. 오토바이가 갑자기 고장 나서 키를 빼들고 나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트렉터에 오토바이를 싣고 나가서 도로변 어디쯤에 내려놓을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끝에 우리는 결국 그대로 두기로 했다. 갯벌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마을도 한두 개 마을이 아니었다. 오토바이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서, 어느 마을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실어다가 어디에 내려놓을 것인가 말이다. 아아 그래, 이유도 까닭도 모르면서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말자.

자빠진 오토바이를 세워놓기만 하고 나오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자신의 그 어쩔 수 없음이 우리를 다소나마 겸손하게 해주고 있었다고 하면 자가당착일까? 그렇다 해도, 고도로 문명화된 이 휘황찬란한 세상에서 갯벌의 그 처절한 원시성은 우리로 하여금 뭔가를 자꾸 되돌아보게 해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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