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아홉 번째


# 트렉터에서 갯벌로 막 내려진 종패자루


아직 어둠의 기미가 남아 있는 이른 아침, 불 깡통을 들고 트렉터에 올라타서 막 출발하려는 참인데 웬 아줌마가 훠이훠이 달려와서 트렉터에 매달렸다. 가슴장화에 파란 비옷을 입고, 테러리스트의 두건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오징어 모자를 꾹 눌러쓴 까닭에 누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트렉터 운전석에 앉은 우리의 젊은 농장주는 같은 마을에 사는 까닭으로 벌써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젊은 농장주도 아줌마의 돌연한 출현이 다소 놀라웠던 모양이다. 운전석에서 뛰쳐나온 그가 아줌마를 향해 다가서면서 “아이 형수 어디 가요?” 하고 있었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무조건 형님이요 형수라고 부르는 젊은 농장주의 어법에 이미 익숙한 아줌마는 뭔가 한스럽다는 투의 울음이 살짝 깔린 목소리로 “아이 씨이, 아이 씨이…” 한참을 그렇게 가슴 안의 것들을 토해내고는 겨우 한 마디 또렷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저께 종패 뿌렸잖여, 잘 들어갔는가 볼라고.”
“아아, 알았어. 얼른 타요. 힘들었겠다.”
“나 혼자서 삼백칠십 개를 했당게. 끝나지도 않았는디 물 들어오데.”

거기서 누가 뭐라고 한 마디만 더 하면 아줌마는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목소리가 그랬다. 단어 하나마다 씨이, 소리가 붙는 한숨이 끼어들고 있었다. 그 한숨 소리는 울음 같기도 하지만, 그 어떤 독기 같기도 했다. 기회만 주어지면 땅바닥에 발랑 드러누워서 죽여봐라, 죽여봐, 하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그런 어떤 우울한 결기 같은 것이 아줌마를 감싸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불 깡통이 실린 우리의 트렉터에 올랐다. 오르자마자 불 깡통 옆으로 다가앉더니 두 손을 내밀고 불을 쬐었다. 어린 소녀의 소꿉놀이 기구를 연상케 하는 작은 바구니 하나에 조개를 담는 망이 서너 개 담겼고, 과거에 바지락을 캘 때 쓰던 쇠갈퀴 하나가 그 위에 얹혀 있었다. 바지락을 채취하는 방식이 대폭 개선되면서 쇠갈퀴는 이제 체험학습장에서나 볼 수 있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는 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도무지 바지락을 전문적으로 기르고 생산하는 바지락 농장주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 물이 덜 빠져서 기다리는 중


그러나 그녀는 엄연한 농장주였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남편이 농장주고 그녀는 농장주의 부인이었겠지만, 남편이 딴 세상으로 가고 없는 지금은 그녀가 주인이었다. 그녀의 한스러운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남편이 없다는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 년이면 두세 명씩 물에 잠겨 전설이 되었다고 하는 그 전설의 주인공들 가운데 그녀의 남편도 끼어 있는 셈이었다.

전날 종패를 뿌렸던 모양이었다. 바지락으로 생계를 삼는 사람에게 종패 뿌리기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바지락을 캐서 모아놓은 돈의 대부분을 그날 다시 갯벌에 쏟아 넣는 게 종패 뿌리기였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10톤을 뿌리기도 하고 20톤을 뿌리기도 한다. 그것을 뿌리는 장면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장관이다.

우선 농장주가 거센 바람에도 휘지 않는 강철심을 들고 다니며 구획을 지정한다. 오늘은 여기서 저기까지만 뿌릴 테니까 1번 트렉터가 여기서 출발하시고, 1번 트렉터의 종패가 다 내려지면 다 내려진 자리에서부터 2번 트렉터가 시작하는 겁니다, 하는 뭐 그런 식이다.

그러면 종패를 가득 실은 트렉터가 들어와서 서서히 전진을 하고, 남자 두 명이 트렉터 위에서 1미터 이내 간격으로 종패 자루를 내려놓으면, 낫을 든 사람이 그 뒤를 따라가며 개봉을 하고, 그러면 대야를 든 사람 두세 명이 그 뒤를 따라가며 종패를 대야에 담아서 홱홱 뿌려댄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그 뒤를 따라가며 빈 자루를 수거해서 빈 트렉터에 싣는다. 이때 실수로 발에 밟혀서 깨지거나 이미 깨져 있는 종패의 속살을 갈매기들이 떼로 몰려와서 먹어대는데 이 장면이 한 폭의 거대한 그림 같다.

그런데 그날 그 아줌마의 경우 이런 과정이 대부분 빠져 있었다. 트렉터 두 대에 종패 10톤을 실었다면 그 위에 사람이 일고여덟 명, 적어도 대여섯 명은 타야 했다. 그러나 그날 그 아줌마의 농장으로 들어가는 트렉터에 탄 사람은 딸랑 그녀 혼자였다. 그 이유는, 그녀의 표현으로는 이랬다.

“밤새도록 전화를 돌려봐도 다들 벌써 일이 잽혔다고 허는디, 아따 참말로 미치고 환장하고 복창이 펑펑 터져 버립디다.”


# 개봉한 직후의 종패자루


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끔, 아주 드물게, 그런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남자인 경우 밖에서 술을 마시거나 하는 등으로 활동반경이 넓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만, 여자인 경우 대개 집에서 전화로 내일 우리 일 좀 와 달라는 식으로 사람을 구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운 나쁘게도 하필이면 일이 벌써 잡혀 있는 사람에게만 전화를 거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종패가 들어오는 날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도 한 가지 중요한 이유였다. 과거에는 충청도 서산이나 현재 새만금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종패를 가져왔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 지역의 갯벌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지면서 종패 생산이 크게 줄었고, 그래서 부득이 중국산 종패를 들여와야만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중국산 종패는 수요자가 필요한 적절한 시점을 선택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세관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아예 기대할 수가 없었고, 평일이라 해도 바람이 심한 날에는 배가 뜰 수 없기 때문에 예측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다 물류비용 때문에 작은 배로 개별적인 공급을 해주는 게 아니라 거대한 화물선으로 수백 톤에 이르는 종패가 한꺼번에 들어와 버린다.

이것은 굳이 정리를 하자면 수요자 위주가 아닌 공급자 위주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기 일을 자기가 설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내 돈 주고 물건을 구입하는데도 마치 배급을 받듯이 언제 와요? 언제 온다고 합디여? 하고 서로에게 물어보며 기다리는 것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미리서 일손을 구해놓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종패가 들어오면 한꺼번에 갑자기 몰려버린 일 때문에 일손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등의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황이 혼란할 때는 누구나 피해를 입기 마련이지만, 그 중에서도 약자의 피해는 심리적인 슬픔까지 가세해서 그 정도가 배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거친 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는 거친 곳이고, 이런 거친 곳에서 남편을 잃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여자는 이중 삼중의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가능한 한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한꺼번에 몰린 종패 앞에서 모두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 되어버린 상황에서는 그쪽에 눈길을 돌릴 틈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날 홀로 삼백칠십 개나 되는 종패 자루를 스스로 개봉해서 뿌려야만 했다는 얘기였다.

“아따 참말로, 눈앞이 캄캄합디다. 야튼간에 뭐, 이빨 꽉 물었제.”


# 쏟아 부어놓은 종패


그렇게 그녀는, 네다섯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시작했다. 육지에서라면 네다섯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하다가 그날 다 못하면 다음 날에 다시 한다는 기약이라도 할 수 있지만, 바다에서의 일은 다음 날이 없었다. 무조건 그날 다 끝내야만 한다. 게다가 그것이 무엇인가. 함부로 마구 다룰 수도 없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닌,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리고 빗물에도 쓸려 내려가는 직경 5밀리 내외의 어리디어린 생명들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이제 갓 유치원생이나 됐을 법한 녀석들이 낯선 땅으로 시집을 온 셈이었다. 아니 뭐 시집이란 단어가 좀 거시기하다면 이민을 왔다고 해도 말은 된다. 어쨌든 이 어리디어린 생명이 도착하는 날은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진다. 바람이나 외부 공기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지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까닭에 일반 차량은 이용할 수가 없고, 사방이 완전 밀폐된 24톤짜리 거대한 윙바디 트럭이 동원되는데 그 댓수가 한둘이 아니다. 어떤 날은 40여 대가 한꺼번에 마치 무슨 점령군처럼 차례차례 들어와서 동네의 모든 광장과 길거리를 완전히 채워버리기도 한다.

24톤 트럭 한 대에 실린 종패가 갯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서여섯 대의 트렉터가 동원된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트렉터 이백여 대가 필요한 셈이다. 게다가 그것을 중장비로 옮겨 싣는 게 아니라 사람이 트럭에 올라가서 한 포대씩 일일이 들어서 트렉터에 옮겨 싣는다. 그러다 보니 그 거친 숨소리와 숫자를 헤아리는 소리와 그리고 힘든 일을 할 때면 으레 나오기 마련인 각종 우스갯소리와 웃음소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져서 동네를 흔들어놓는데 이것은 글쎄,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그 에너지가 너무도 강렬해서 무덤 속의 사람이라도 금방 뛰쳐나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시끌벅적 요란한 종패 옮겨 싣기가 다 끝나고 나면, 그러면 동네는 갑자기 정적에 잠긴다. 일시에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고요라는 이름의 거대한 망사커튼 같은 것이라도 하늘에서 내려와 동네 전체를 덮어버린 것 같은 정적이 한동안 거리를 배회한다. 물론 소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저기 두세 명씩 혹은 네다섯 명씩, 그야말로 삼삼오오 모여 서서 불을 쬐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커피를 홀짝거리기도 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는 하는데 그 목소리가 마치 무슨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낮아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바다의 물이 빠지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트렉터의 시동이 걸리고, 한 대, 두 대, 차례차례 갯벌로 들어선다. 그날 물 빠지는 속도가 더디면 당연히 가다가 멈춰서 기다려야 한다. 제아무리 성급한 사람이라도 채찍을 휘둘러서 물이 빨리 나가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현장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다.

종패는 가능한 한 빨리 뿌려주는 게 좋다. 이제 갓 시집을 온, 이민을 온 새끼 조개가 흙 위에 떨어져서 낯선 분위기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익숙해져서 아 여기가 이제부터 내 집이로구나, 하고 혀를 내밀어서 흙을 밀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들어가서 온존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가능한 한 바람이 안 불어주면 좋고, 밀물이 몰려오지 않으면 더욱 좋다.
 

# 윙바디 트럭에서 트렉터로 옮겨지는 종패자루


# 종패 뿌리기가 끝난 뒤의 작은잔치


어린 조개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밀물이 밀려오면 그 가벼운 새끼 조개가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조류에 쓸려서 어디로 가 버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남는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어쩌랴. 트렉터에서 종패 자루가 내려지면 재빠르게 낫으로 입구를 열고, 대야에 쏟아서 뿌려줘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일단 작업이 시작되면 옆에 사람과 이야기 한 마디 제대로 나눌 틈이 없다. 노상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해야 하는 까닭으로 숨이 차고,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하고 일이나 하는 게 훨씬 편해 버린다. 그렇게 정신없이 진행되는 일을 다 끝내고 먹는 간식은, 그것이 설령 흙투성이의 떡이라 해도 맛이 안 좋을 수가 없다.

그러나 흙투성이의 떡 따위는 없다. 농장주의 입장에서는 종패를 뿌리는 그날이 일 년 농사의 시작이요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과 환경이 허락만 해준다면 아마 상다리가 휘어지게 제물을 차려놓고 기도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갯벌에서 그런 한가한 예를 갖출 수는 없고, 가능한 한 일하는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자는 쪽으로 타협을 본 셈이다. 이를테면 맛 좋은 양념통닭이라든가 돼지족발 같은 것들 말이다. 좀 더 섬세한 사람이라면 푹 끓인 어묵을 일회용 용기에 포장을 해서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나눠주는 눈물겨운 정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종패를 뿌린 뒤의 간식은 하나의 작은 잔치였고, 축제였다.

그런데 그날 그 아줌마의 종패 뿌리기 현장에서는 그것이 없었다. 잔치도 없었고, 축제도 없었다. 잔치나 축제는커녕 주인이 그만 죽어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네다섯 명이 해야 할 일을 아줌마 혼자서 하다 보니 종패를 뿌리고 또 뿌려도 뿌려야 할 물량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그러다가 물이 들어오고 말았다는 거였다.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사람을 구하지 못한 탓이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과거에는 재래식 농법에서의 비료 뿌리기나 씨앗 뿌리기처럼 종패를 바구니에 담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손으로 뿌렸단다. 그런데 태풍의 빈도수와 그 위력이 높아지면서 대야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태풍에 날아가는 조개의 수를 줄이자는 게 아니라, 날아갈 만큼 날아가고 남은 것을 얻자는 고육지책이었다. 그것이 요즘은 뿌리는 것도 아니고 아예 쏟아 부어놓는 지경으로까지 변했다. 한 번 뿌리고 그 위에 또 뿌리는 식이다. 초기의 바지락 농사가 손바닥 하나 넓이에 종패 이십여 마리를 뿌렸다면 요즘은 그 열 배인 이삼백 마리도 아니고 아예 오백이나 천 마리 정도를 수북히 쌓아놓는 식이었다.

종패 1킬로그램의 가격이 일이십 원도 아니고 무려 천사백 원이었다. 그 비싼 것을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쏟아 부어놓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결국 물량공세로 자연에 맞서는 셈이랄까, 타협을 하는 셈이랄까, 이러한 고육지책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개 농사도 이제는 혼자서 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점점 투기화 된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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