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열 번째


# 기계가 고장나면 아주 진지해지는 김대웅 씨


사람은 무조건 대도시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얘기하면서도 내 자식은 농사꾼 안 만들겠다는 유행이랄까 뭐랄까, 도시 위주의 정책에서 파생된 이 우울한 풍경은 아직 끝나지 않고 여전히 진행형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귀농이다 귀촌이다 해서 도시에 안녕을 고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경쟁에서 밀려난 자신을 돌아보며 경쟁이 덜하다고 여겨지는 시골로 내려가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도시의 냉혹함이 싫다 해서 무작정 이삿짐을 꾸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나 혹은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고 또 뿌리치다가 결국은 귀향을 선택하는 드문 경우도 있다.

오래 전에 프랑스의 소설가 플로베르는 이런 말을 했었다. “농사는 저주받은 직업이다. 왜냐하면 농사로 그럴 듯한 부자가 된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 말을 살짝 바꾸면 갯마을 사람들 역시 저주받은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고기잡이나 조개 캐기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없었고, 있다 해도 그 지역 내의 부자였을 뿐 당대 사회에 어떤 모범을 보여준 사례는 아직 거의 없었으니까. 게다가 태풍과 해일이라는 죽음의 소재 앞에서 늘 긴장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가능한 한 도시로 내보내려 했다. 자식이 제법 똑똑하다 싶으면 요놈 인물이다 해서 아예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 물을 먹였다. 그렇게 서울로 유학을 떠난 아이들은 대개 법관이거나 의사거나 교수 혹은 고급군인 같은 엄숙한 미래를 꿈꾸며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물론 서울로 유학을 떠난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출세지상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출세와는 영 다른 길을 걸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시절에는 개인의 출세가 최고의 덕목으로 파악되지만, 세상을 좀 더 넓게 그리고 깊이 본 뒤에는 개인의 출세나 부자 되기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전혀 다른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그것은 좁게 보자면 부모의 뜻을 배반하는 행위가 되지만, 넓게 보자면 우리 사회를 역동적으로 건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 빗속에서도 틈만 나면 책을 들여다 보는 김 씨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김대웅, 그도 부모의 바람을 배반한 주인공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생으로 그 아슬아슬하게 불확실한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그는, 사회복지라는 개념조차 아직 희미하던 시절에 사회복지학을 선택하게 된다. 법학도 아니고 의학도 아닌, 정치외교학도 아니고 신문방송학과도 아닌 사회복지학, 게다가 그의 꿈은 고아원이었단다. 공부를 마치면 고아원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생활하겠다는 아주 아주 소박하면서도 거창한 꿈을 안고 그 길을 선택했다나 어쨌다나. 그 앞에서 망연자실했을 부모님의 심사를 여기서 굳이 거론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테니 그만두기로 하자.

그러나 인생이란 이름의 이 오묘한 길은 직선이 아니다. 이리 가다가 저리 구부러져서 가기도 하고, 저리 가다가 되돌아서 머뭇거리기도 한다. 게다가 청년의 눈은 항상 열려있기 마련이다. 호기심이라는 막강한 에너지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어쩔 것인가. 사회복지학을 선택하던 당시의 김대웅은 물질이 아닌 가치를 우선하고 있었지만, 학교를 다니던 중에 그는 가치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제3의 영역이라고나 할 탁구를 발견하게 된다.

탁구.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관계를 결정적으로 완화시켜준 것으로도 유명한 이른바 핑퐁 외교라는 말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었지만, 어쨌든 핑, 퐁 핑, 퐁, 하면서 작은 공 하나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그 게임에 청년 김대웅의 영혼이 빨려 들어간 근본 동기가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은 여기서 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말하자. 그냥 탁구가 좋았을 뿐이라고.

그랬다. 그는 탁구가 좋았다. 미치도록 좋았단다. 그래서 아예 탁구장을 운영하기로 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탁구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요새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실용주의요, 약간 다른 말을 쓰자면 도박이었다. 어쨌든 그는 엄마를 설득했다. 탁구장을 운영하면 그 수입으로 등록금이라든가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함과 아울러 취미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 엄마와 아들과 그리고...


엄마는 아마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김대웅이가 누구인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무남독녀까지는 아니더라도, 딸이 넷이나 있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관념으로 보자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서울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느닷없는 사회복지학이라는 것을 공부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졸업도 하기 전에 사업을 하겠단다. 그것이 설령 취미를 살리는 아르바이트라고 하더라도, 엄마의 눈에는 돈 버는 일일 뿐이었다.

누가 저더러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했는가? 외아들 공부시키는 비용 정도야 엄마 혼자 조개를 잡아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자식이 해달라는 것을 해줄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해줄 수밖에. 그렇게 해서 그는 학생 신분으로 탁구장 사장님을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그 시기에 엄마는 혼자서 바지락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트렉터로 간편하게 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경운기로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작업이었다. 엄마는 경운기를 다룰 수가 없는 까닭에 남자 기사를 따로 두어야 했다. 경운기가 일반화되기 이전에는 손수레로 실어 날랐고, 손수레도 귀하던 시절에는 지게로 져서 날랐다. 그런 세월이 삼십 년 이상이었다.

쇠로 만든 기계도 삼십 년이면 여기저기 어긋나고 풀어져서 헐렁해지기 마련이었다. 뼈와 가죽과 살로만 구성된 사람의 몸이, 게다가 남자에 비해 연약하다고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여자의 몸이 언제까지나 단단하게 조여져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마 그래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단단하고 야무진 몸으로 갯벌을 드나들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깡통불에 군고구마를 얹어놓고~


그랬다. 엄마는 단단했다. 그리고 빨랐다.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강단과 민첩함으로 갯벌을 좌지우지해 나갔다. 그 어떤 강력한 바람 앞에서도, 그 어떤 물보라 앞에서도 한탄이나 눈물을 보이는 대신 사자후를 토해냈다.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여장부라 불렀다. 남자도 해내기 어렵다고 주춤거리는 일을 그냥 달려가서 처리해 내는 단호함이 있었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그러는 동안 엄마의 관절은 점차 어긋나고, 힘줄은 탄력을 잃어갔다. 그렇게 온 몸이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 엄마 자신만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세월은 모두에게 공평한 법이었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십 분이면 달려갈 수 있었던 길이 삼십 분 거리로 늘어나 있었고,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거뜬거뜬 들어 올렸던 바지락 자루가 쇳덩어리처럼 무거워져 있었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내가 이렇게 늙어버렸구나.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뭔가가 자꾸 억울하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분노가 치밀기도 하고, 슬픔이 와락와락 밀려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전화를 하고 말았다.
“아들아, 나 혼자서는 못 허겄는디 어째야 쓴다냐.”

아들은 아직 탁구장에 푹 빠져 있었다. 엄마의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갯마을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갯벌에 들어가 본 적이 거의 없는 외아들의 입장에서 볼 때 엄마는 그냥 단단한 사람이었고, 빠른 사람이었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늙고 병들어서 죽는다 해도 엄마는 그럴 수가 없는, 그래서도 안 되는 그냥 엄마일 뿐이었다.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한 마디 덧붙였다.“아들이 와서 엄마를 도우면 안 될까-아?”



이 한 마디. 이것만은 엄마도 아마 하기 싫었을 것이다. 죽어도 하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토해내고 말았다. 처음이 어려웠다. 어려운 처음을 지내고 나자 두 번째부터는 잘 나왔다. 전화를 걸면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 안부를 확인한 뒤에는 으레 그 말이 나왔다. 아들아, 뭐 그리 크게 행복하지도 못한 서울살이 이제 그만 하고 내려와서 엄마랑 같이 조개 농사를 짓자, 응?

아들도 처음은 어려웠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해한 수수께끼였다. 엄마는 늙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프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혼자서는 조개 농사를 짓기 어렵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서울로 가라 할 때는 언제고 다시 내려오라는 말씀은 또 뭔가 말이다. 그래서 엄마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농담이려니 여겼고, 두 번째 세 번째부터는 어리둥절했고, 한 달이 지나고 육 개월, 일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불안한 갈등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엄마가 약해졌다. 아, 늙어 가시나 보다. 평생 늙지도 않고 언제까지나 씩씩하게 우렁차게 대웅아, 대웅아, 하실 줄만 알았던 엄마의 약해진 목소리를 인정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엉거주춤한 심사로 모른 척이나 하고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엄마와 함께 바지락 농사를 지으러.

하지만 그는 바지락에 대해, 그 바지락을 길러내는 갯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보니 하는 일도 썩 그리 즐거울 리가 없었다. 경운기 운전이나 겨우 배워서 물이 나가면 아줌마들을 태우고 갯벌로 들어가서 물이 들어올 때까지 신문을 뒤적거리거나 혹은 책을 읽었다. 가끔은 노트를 챙겨 가지고 가서 이런저런 뭔가 생각나는 것들을 끼적거리기도 했다. 갯벌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그런 김대웅의 모습은 아마도 간첩보다도 악독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그때를 회상하는 아줌마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넘실거린다. “아이고 그때는 참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었는디…” 하고 말꼬리를 줄이며 배시시 웃는 아줌마는 필경 이런 말이 하고 싶었을 것이다. “많이 컸어 잉?”

그러면 그 엄마의 속은 어떠했을까.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아들을 아들로 대하지 않고 종업원으로 대했다는 것. 집에서는 아들이었지만 갯벌로 나가면 종업원이었다. 한 달에 월급 얼마, 하고 그렇게 월급을 정해놓고 쥐꼬리만 한 정도의 월급만 내줄 뿐 용돈도 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고자 하는 엄마의 고육지책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저 아들아, 아들아, 하면서 떠받들어 주기만 했다면 오늘의 김대웅은 아마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세상 뭐 찡그릴 필요 있나요~


그렇게 엄마는 아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위장에 혹이 생기고,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무려 세 차례나 큰 수술을 받은 뒤로 엄마는 더 이상 갯벌에 나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기가 쏙 빠진 얼굴로 손자 손녀들의 재롱이나 받아주는 그야말로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그 머릿속에는 갯벌의 상황이 지도처럼 그려져 있어서, 아들이 뭔가를 여쭤보면 박사 학위를 한 열 개쯤 갖고 있는 교수님처럼 상세하게 해법을 제시하신단다.

바지락 농사를 어머니의 지휘 없이 혼자서 직접 짓기 시작한 지 3년, 아들은 이제 작은 혁명을 시도하고 있다. 작업현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든가, 커피를 끓여 마시는 것 같은 행위들, 이것은 기존의 작업현장에서는 꿈에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물이 들어오기 전에 얼른 작업을 끝내고 나가야 한다는,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공포 때문에 간식조차도 제대로 준비하기는 하지만 먹을 틈은 없이 그냥 나오는 관행에 의문부호 하나를 띄웠다고나 할까.

이 작은 혁명은 물론 상당한 구설수에 휘말려 있기는 하다. “야, 너는 무슨 라면을 끓여먹는 담서야?”하는 힐문 가득한 질문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작업장 사람들 몰래 끓여먹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는 특유의 천진한 아이 같은 웃음으로 얼렁뚱땅 위기(?)를 비켜가고는 한다. 왜냐하면 갯벌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행위는 분명 전통(!)에 반하는 것이고, 따라서 너무 진지하게 대응하면 일이 시끄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확고해 보인다. 돈이 먼저인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먼저이지 않은가. 그가 명시적으로 그런 말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은 그것을 느낀다. 상황논리에 매몰되기보다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그 상황이 파악되면 자기 스타일을 드러내는 사람, 그 자기 스타일이라는 게 그 어떤 이름만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어쩌면 이제야 자신의 전공을 제대로 살려볼 만한 문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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