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것이 사랑이었던 것을, 사랑이었던 것을…
아∼그것이 사랑이었던 것을, 사랑이었던 것을…
  • 승인 2013.01.2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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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열한번째: 최원권 씨 부부의 사랑


# 내복이 말라가는 풍경


고창군 심원면 두어리 한쪽에 자리한 그 댁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을 꽉 채운 것은 빨랫줄이었다. 빨랫줄에 널린 내복 중심의 빨래들, 그것을 보자마자 내 기억은 저 아득한 유소년기를 더듬고 있었다. 겨울이면 햇살이 살가운 날에 엄마가 아이들의 내복을 죄다 벗겨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툭, 툭, 하고 이를 잡던 장면, 아, 그것이 사랑이었던 것을, 사랑이었던 것을….

사랑에 관한 전설은 많기도 하다.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떤 사람은 상대를 자신의 틀 안에 가두는 속박을 사랑이라 정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무조건적인 희생이나 봉사를 사랑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좋다. 다 좋다. 자기가 좋아서 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오늘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다. 희생적인 사랑도 아니고 속박적인 사랑도 아닌,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냥 웃음부터 나오는, 그래서 잠시라도 헤어질 때는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헤어진 뒤에는 ‘그 사람’을 자랑하고 또 자랑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죽이는 이를테면 즐거운 사랑이다. 그것도 오십여 년을 한결같이 그랬다 하니 이건 도대체 누가 믿을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이니까.

어떻게 보면 박물관 급이요, 기네스북에 올려 마땅한 이런 사랑이 사람 세상에 있다고는 나도 예전에는 믿지 못했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만났다. 아니 발견했다. 지난 삼개월여 동안 바지락 채취 현장에서 함께 일한 아줌마. 이 아줌마는 도대체 입만 열었다 하면 남편 자랑을 하는데 그 기술이 참 오묘하고도 절묘했다. 한참 일을 하다가도 일이 좀 힘들다 싶으면 뭐라고 한 마디 툭 던져놓고 혼자서 배시시 웃는데 그것이 나중에 보면 결국 남편 자랑이던 것이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여자들은 결혼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기 남편 흉보는 재미로 살아가고, 이 세상 거의 모든 남자들 역시 결혼해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기 아내 험담하는 재미로 살아간다는,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어쩔 것인가. 그런 연구란 게 본래 통계에 기초한 것이고, 통계란 것이 극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털어내 버리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바보가 된다는 세간의 통설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어매 우숴 죽겄네


아내가 갯벌로 일을 나갈 때면 남편이 오토바이로 출퇴근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태워다 주고 있었다. 그런데 헤어질 때의 장면이 그렇게도 간절할 수가 없었다. 갯벌의 일이란 것이 길어봐야 여섯 시간 남짓이었다. 조금 즈음에는 물때가 짧아서 두세 시간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도 무슨 생이별이라도 하는 듯이 손을 흔들고 또 흔들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들리는 이야기들 또한 심상치 않았다. 원래 닭살부부로 유명하다는 둥, 그런 사람들은 소설에서도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둥 소문이 무성했다.

이 무성한 소문을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그래서 내심 벼르고 있었다. 언제 한 번 찾아가서 그 남편과 아내와 삼자대면을 해보리라. 그렇게 벼르기를 몇날 며칠이었던가. 그리하여 눈은 쌓이고 날도 추워져서 일이 없는 날 마침내 길을 나섰다.

“오매 으찌까, 으찌까이. 나는 몰러 인자.”

마당으로 들어서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수줍음 많은 새색시처럼 자꾸 어디로 숨으려하는 주인아줌마, 내가 본래 남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 전파하는 글쓰기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당신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마 못해봤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연치 육십대도 고스란히 꽉 차서 내일모레가 칠십인 양반의 얼굴에 어찌 저리도 파릇파릇한 수줍음이 옴싹일 수도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요령부득에 해독불가여서 한참이나 멍해져 버렸다.

그런데 이 양반 부끄러움도 농담 수준이 아니다. 찾아온 사람을 가운데로 남편은 오른쪽에, 아내는 왼쪽에 앉아서 나를 또 한 번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었다.

“아 함께 나란히 좀 앉아 보세요.”


# 이렇게 타고 다닌당게여


그렇게 해서 겨우 나란히 앉기는 했지만, 거기서도 바싹 붙어 앉지는 못하고 한 걸음쯤 거리를 두고 앉아서는 서로를 보며 눈웃음이나 쳐댄다. 아, 사랑은 이런 것인가. 하긴 남들이 알지 못하게 눈으로 말하세요, 라는 유행가도 있었으렷다. 입만 열면 사랑, 사랑, 사랑을 외쳐대면서도 다음 날이면 “그 웬수, 아유 지겨워” 해 버리는 요즘의 사랑 방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 고전적인 사랑 스타일 앞에서 나는 문득 엄숙해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단다. 소꿉친구가 소꿉놀이를 하다가 꿈결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소설처럼 아름답게 늙어가는 중이라고나 할까. 소녀는 인근에서 부자 소리를 듣는 집안의 귀염둥이 딸이었지만 소년은 풀죽이나 겨우 쑤어먹는 집안의 꼴머슴 같은 아들이었다. 아 그래, 사랑에는 국경만 없는 게 아니라 빈부의 격차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잊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남편의 노래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어디서 노래자랑 대회만 있다 하면 쫓아가서 받아온 상장이며 트로피가 도대체 몇 개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젊어서부터, 아니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이 그 실력을 인정해 주었단다. 듣고 보니 바로 거기서부터 소년 소녀의 사랑이 싹을 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소년의 노래 솜씨에 홀려 눈을 깜빡깜빡하며 입을 헤벌리고 있는 소녀의 행복에 겨운 표정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결혼식은 스물한 살에 올렸다. 그리고 얼마 뒤에 남편은 군대로 끌려간다. 자, 이제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부잣집에서 설거지 한 번 해보지 않고 학교나 다녔던 소녀가 이제 남편마저 군대에 빼앗긴 채로 자갈밭에서 풀을 뜯어다가 죽을 끓여야 한다. 하지만 이 고난은 슬픔이 아니라 즐거움이었다. 남편은 아주 간 게 아니라 곧 돌아온다는 믿음, 가난은 죄가 아니라 사랑의 문턱을 낮춰주는 작은 오솔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즐거움이었다. 가난하면 사랑도 찢어진다지만 이 양반들의 사랑은 더욱 강고해졌다고나 할까.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었다.

군대로 끌려간 남편이 돌아오면서 이들 부부의 제2막이 펼쳐진다. 그런데 2막은 우울하게도 술의 역사였다. 남편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은 남편 집안의 내력이었다. 아버지도 술을 많이 마시고 동생도 술을 마시고 모두가 독한 소주를 국그릇에 부어서 벌컥벌컥 마실 정도의 술고래들이었다. 어떤 날은 삼부자가 모두 취해서 길거리에 쓰러진 것을 아내가 그 수줍음 많고 연약한 몸으로 업어다가 방안에 눕히기도 했단다. 변변한 땅뙈기 하나 가진 것 없는 집안이다 보니 박탈감을 술로 달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집안 살림은 엉망이요 진창이었다.


# 두어리의 태양발전소


그런데도 아내는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단다. 부잣집에서 모자람이 없이 살아왔던 젊은 아내는 아마도 엄청나게 순진했던 모양이다. 그 순진함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소주를 국그릇에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키는 젊은 남편을 보면서도 그녀는 그것이 독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단다. 남자는 여자와 달라서 으레 술을 마시게 되어 있고, 술이란 원래 그렇게 마시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남편은 마침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병원은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하지만 그 아내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남편을 살려낼 수만 있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오겠다는 당찬 각오가 그 수줍음 많고 순진한 아내에게 생겨 있었다. 위장이 파열된 것을 시작으로 심장이며 혈관이며 등등 네다섯 종류의 합병증이 마구 나타나고 있는 술고래 남편이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그래, 살아났다. 5년만이었다.

아내는 그동안 물일을 했다. 갯벌에서 백합을 캐다가 팔았다. 갯가에 살면서도 갯벌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고 살아 왔던 그녀는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갯벌의 여자가 되었다. 남편은 그런 일을 못했다. 바다에만 나가면 머리가 핑핑 돌아서 칠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한단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남편은 대오각성을 했다. 그들 부부의 제3막은 이렇게 펼쳐진다. 남편은 술을 완전히 끊고 남의 논밭을 육십 마지기나 빌려서 농사를 지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었다. 대학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소작농으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을까? 언감생심이라고 여기며 은근히 주눅이 들고 있었지만, 그런데 대학이 집으로 아서 아이들을 데려갔다. 공부만 잘하면 장학금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 아내에게 고민이 없었을까? 한 번이라도 결혼을 후회한 적은 없었을까? 지겹고 힘들어서 그만 도망가 버릴 생각을 했음 직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무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던져보았다.


# 노래자랑 상장이 이렇게 많당게


“아따 참말로 아저씨도 이상스럽네. 믓헐라고 그런 생각을 다한다요? 바쁘게 살다 보면 둘이 서로 위로하는 시간도 모자르는 것이어라우. 사람 사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고생스럽기도 하고, 편하기도 한 것이제. 그런 재미로 사는 것이제. 노상 편하기만 하믄, 그것이 먼 재미다요.”

펄쩍 뛴다는 표현은 아마 이런 때 쓰는 것일 게다. 그랬다. 아내는 펄쩍 뛰고 있었다. 남편은 무슨 그런 멍텅구리 같은 질문을 하느냐는 투로 나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일장 연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가정교육, 그거 하나도 어려울 것도 없고 뭐 다른 것도 없어, 그러엄. 부부가 서로를 존중하며 손 한 번이라도 더 마주잡고 눈을 쳐다보며 웃어주면, 그러면 자식들이 그것을 보면서 공부할 의욕도 생기고 뭐 그런 것이제, 어이 작가 양반, 안 그려? 내 말이 틀렸어?”

“아이고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부간의 진짜 사랑이 진짜 가정교육이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잉?”

“인간들이 말이여. 돈만 있으면 행복 끝이다, 이런 느자구없는 말들을 해쌌는 모양이던디 그거 순 가짜여, 엉터리라고, 아 돈이사 슬프고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만 있으믄 되제. 많아봤자 그것 지키느라고 얼매나 고생이 많냐 이거여. 명색이 부모라는 자들이 돈, 돈 해싸니까 자식들도 돈, 돈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식들이 나중에는 돈으로 부모의 가치를 매길 것이란 말이거든. 한 마디로 돈 없으면 부모도 싸구려가 돼 버리는 것이여. 이치가 안 그려?”

그 말끝에 당신들 자식은 변변한 참고서 한 권 못 사줬는데도 국립대 장학생이었다는 둥 자식 자랑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면 관계상 그 대목은 다룰 수가 없겠다. 어쨌든 돌아오는 길에 불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효자가 드문 까닭으로 효자상이 생겼듯이, 사랑이 너무 희귀하다 보니 사랑 노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 삶의 터전 갯벌에서


아, 지면의 압박이 있다 해도 이것만은 다뤄야겠다. 남편 최원권씨는 마을 이장을 6년째나 맡고 있었다. 요즘은 마을 이장을 1년마다 교체하는데 이례적인 경우라 할  만 했다. 마을이 요즘 농촌에서는 드물게 육십여 가구나 되다 보니 마을의 공식 기금만도 일억이 넘는단다. 이 돈을 누가 관리해야 시렁에 매달린 곶감 빠지듯 빠져나가지 않을 것인가.

“마을 이장도 말하자면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의 공직인디, 공직자는 눈꼽만큼도 사심이 없어야 해. 크나 작으나 공직자가 공사분간을 못하면 너나 나나 다 망하는 것인게.”

공직에 대한 최원권씨의 아주 원론적이면서도 소박한 철학이 그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이장을 장기 집권시키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철학이 있었기에 그는 사비를 털어가면서 전국의 태양열 발전소를 쫓아다녔고, 그 결과 마을 단위로는 전국에서 최초로 태양열 발전소를 만들어서 전기요금 1만원 내외의 시대를 열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기특하고 대견하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오, 누가 어떻게 말릴 것인가. 보고 보고 또 봐도 사랑스러워서 또 보고 싶어지는 그 마음을 누가 왜 뭣 땜에 말릴 것인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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