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열세 번째: 김재성 인터뷰


# 어느 맑은 날 석양의 갯벌




부부가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되기까지 십칠 년 걸렸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 사람답게, 부부답게, 가족답게 살아가는 기반을 잡기 위해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따뜻하게 살아갈 집을 짓고 완전히 결합하기까지 십칠 년. 그 간난신고의 역정은 엄숙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는 아마 우리나라 서민 생활의 평균 이상이라고 봐야 것이다. 주택보급률 백 퍼센트를 달성했다는 뉴스가 나온 지도 오래건만, 평생을 살았어도 집 한 채 못 가진 사람이 수두룩한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그의 이름 김재성, 1959년생으로 약관 열일곱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행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탔다. 있는 집 자식들은 부모님 밑에서 학교를 다니는 나이, 조금 많이 있는 집 자식들은 서울로 유학을 떠나는 나이, 그 나이에 그는 학교도 유학도 아닌, 굶지 않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들어갔다. 내가 먹는 것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난한 집 아들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단다. 어머니가 함지박에 생선을 이고 다니며 팔아서 번 돈으로 밥을 먹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실제로 굶는 친구들도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부자를 쳐다보며 부러워한 게 아니라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쳐다보며 어머니의 노고를 애달파한 셈이었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생선 행상을 하는 어머니의 노고를 덜어드리는 방법은 새끼가 하나라도 집을 떠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타향살이 십여 년에 청춘만 늙었다’는 유행가도 있거니와 고향, 사람에게 있어 고향이란 대체 무엇일까. 시인 정지용 식으로 표현하자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일 것이고, 인문학적으로 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을 돌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래야만 하는 인간 존재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게 뭐 굉장히 요란한 것 같지만 결국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고향이란 곧 흙이요 흙은 곧 고향이 되는 셈이다.


# 옛 집터를 가리키는 김재성 씨.



그래서였을 것이다. 한참 팔팔하게 혈기왕성한 나이 열일곱에 서울 생활을 시작한 김재성은 비슷한 처지의 고향 친구들을 만나 향우회를 만들게 된다. 가끔 한 번씩 만나 먹고 마시고 놀다가 문득 고향의 논두렁이나 갯벌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눈물도 몇 방울 떨구는, 그러다가 아이고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다, 또 만나자 응? 하고 헤어지는 그런 향우회. 고향을 몹시 사랑하면서도 떠나야만 했던,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향수병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아릿한 향수병을 소년들은 그대로 부둥켜안았다. 고향 떠난 신세라서 슬프다고, 혹은 억울하고 비참하다고 술이나 마시며 현실을 비켜가거나 타성적으로 견뎌나기를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저 소박한 친목 모임이었던 향우회는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포럼으로 확장되었고, 경제적인 능력도 사회적인 지위도 없는 소년들이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놓고 토론하고 실행 방안을 찾아서 고민하는 아주 신나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 즈음 그들의 고향 하전 마을은 전기가 들어와 있긴 했지만 가로등은 하나도 없었다. 포장이 안 된 골목길은 비가 내리면 진창이 되고, 비가 그치면 돌부리가 튀어나오는 등으로 거칠기 짝이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밤에 마실을 나갔던 어른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넘어져서 팔 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사고가 빈번했다. 호롱불을 켜고 살던 시절에는 사방이 아예 어두워서 그런 사고가 오히려 없었지만, 집에는 전기불이 환하게 들어오고 거리에는 전깃불이 없다 보니 밝음과 어둠의 극심한 차이가 사람을 자꾸 허방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추석 명절에 고향을 갔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향우회 회원들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한 자리에 모여앉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서 의논을 거듭한 결과 방법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서울에는 가로등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둠 때문에 넘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고향 마을에도 곳곳에 가로등을 세우자. 문제는 돈이었다. 무슨 돈으로 가로등을 세우지?


# 십칠세 향우회 시절의 사진첩을 꺼내들고~



그들이 만약에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면 돈이 없어서 안 된다고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나무와 흙과 풀들이 어우러지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자연에서 취하며 자연스럽게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산에는 나무가 있고 삽으로 흙을 파면 구덩이가 된다는 것쯤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그냥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다음 명절 때 고향에 가면 차례를 지내자마자 산으로 가서 나무를 베어오자. 그리고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에 나무를 묻어 전봇대를 만들자. 가로등을 설치하는 데 있어 돈이 가장 많이 드는 것은 전봇대였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전봇대를 만들고, 그리고 그동안 모아둔 향우회 회비로 전깃줄을 사고, 전등도 사고, 그렇게 해서 마을 곳곳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사업을 완료했다. 전기요금은 향우회 회비로 충당한다는 계획도 이미 세워두었다.

스무 살도 채 안 된 소년들의 가로등 사업은 그들을 단숨에 사회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사회는 다른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요 우리들의 것이라는 인식을 갖는 데서 오는 의욕과 삶의 역동성은 놀랄 만했다. 깊은 생각이 없이 타성적으로 삶을 꾸리던 시절에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발견해도 왜 이렇게 돼야만 하는가, 하는 의문과 불만이 컸지만, 사회와 자기 자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아 이것은 이것이 문제다, 이렇게 하면 안 될까, 하는 쪽으로 문제의식 자체가 확 바뀌어갔다.

명절이면 고향을 찾기 위해 비둘기호 완행열차 표 한 장을 사는데도 한나절을 꼬박 길거리에서 꾸벅꾸벅 졸아가며 기다려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표를 구했어도 원하는 시간에 고향집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완행열차는 항상 급행열차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서 고창까지는 열두 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것도 온 몸이 파김치가 될 정도의 고생을 해야지만 가능했다. 향우회 회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 십칠세 향우회 친구들


만약에 우리가 버스를 한 대 빌려서 단체로 귀성을 한다면 어떨까? 편하지 않을까? 시간도 대폭 줄일 수 있고, 돈도 절약할 수 있고, 무엇보다 한 자리에 모였으니 즐거움도 크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그들은 명절 때마다 귀성버스를 대절해서 운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최초라고 말하기는 자료가 없어서 어렵겠지만, 적어도 고창에서는 거의 최초로 시작한 일이었다.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정착되면서 그들의 시선은 이제 복지에 관한 문제로까지 확장되었다. 사람이 나이 들어서 늙고 병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지만, 늙었다고 해서 아무 희망도 즐거움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것은 비극이 아닌가?

그래, 그것은 비극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늙고 병들었어도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향우회 회원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일단 여행을 꼽았다. 지금은 효도관광이라 해서 상업적으로 정착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생소한 일을 그들은 연구하고 기획해서 실행에 옮겼다.

그러는 동안 향우회 회원들은 나이가 들었다. 군대도 다녀와야 했고, 결혼도 해야 했다. 김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향을 떠난 지 십여 년 만에 다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온 김재성은 인근 마을의 처자와 연애를 하면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무엇을 해서 가정을 꾸려나갈 것인가.

아직 결혼식도 못 올린, 흔히 말하는 동거생활 상태에서 그는 좌우사방을 둘러보았다. 변변한 땅뙈기 하나 갖지 못한 사람이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춘궁기에 쌀이나 보리쌀을 미리 가져다가 식량을 삼고 농사철에 농사를 지어주는 일명 하리논 살림을 살면서 소 한 마리 키우는 게 고작이었다. 혼자서 객지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결혼식은 못 올렸어도 어쨌든 가정을 꾸리고 보니 무서운 게 너무 많아지고 있었다.


# 종패 뿌리기 현장에서~



살막이라 부르는 원시적인 그물을 쳐서 생계를 꾸려 나가던 김재성의 고향 하전에 그 무렵 해태양식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김재성은 그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특별한 소득은 올리지 못했다. 너도나도 해태양식에 뛰어들면서 해태양식은 반짝 인기를 누리다가 이내 쇠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목숨을 위협당하는 일이 너무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곰소에서 위도로 가는 여객선이 있었어요. 해태양식은 생김을 채취할 때 판자때기 같은 작은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작업을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객선은 몸집이 거대하단 말이에요. 이 거대한 배가 저 멀리서 지나갈 때 너울성 파도가 일어나요. 이 파도에 생김 채취선이 발랑 뒤집혀져 버리는 거예요. 양식장 주변의 물 깊이가 보통 삼사 미터는 되는데 이게 까딱 잘못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거예요.”

해태양식을 계속해서 먹고살 수 있겠는가. 목숨이나 겨우 부지하면 다행인 생활이 아닌가. 김재성의 고민이 깊어질 즈음 하전 갯벌에 바지락 양식 사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하전 갯벌에 바지락이 있기는 했지만 소량을 채취해서 젓갈이나 담그는 수준이었고, 아줌마들이 당그레 같은 기구를 끌고 다니면서 캐내는 백합이 가장 높은 수입원이었다.

오늘날 바지락은 하전 마을을 고창에서 가장 돈이 많은 동네로 소문나게 만들어주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김재성이 바지락 양식에 처음 뛰어들 무렵만 해도 그것은 죽지 못해 하는 일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바지락 농사는 처음부터 실패의 연속이었다. 90년대를 휩쓸었던 여름의 폭서로 인해 바지락은 종패를 뿌려놓으면 죽어버리고, 또 죽어버리기를 되풀이했다. 잇달아 4년을 그렇게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그에게 아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바지락 농사는 여자 혼자서도 놉을 얻어 하면 되니까 남자는 밖으로 나가서 살림 기반이 잡힐 때까지 다른 일을 하면 어떻겠는가, 집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데 그것 참, 듣고 보니 그게 낫겠다 싶기도 하고, 어쨌든 전주로 나갔지요.”


# 마당에서 고요히 봄을 기다리는 트렉터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전라도에는 변변한 공장 하나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공장을 찾아서 아주 멀리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버스 운전이었다. 버스 운전기사 노릇을 하면서 사나흘에 한 번, 어떤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랬다. 집에 간다거나 온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들르는 생활이었다.

그런 생활이 십칠 년이었다. 십칠 년 동안 아내는 바지락 농사의 기반을 잡았고, 남편이 월급을 받아서 저축해 온 돈으로 집을 지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두 모여 과일을 깎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윷놀이도 할 수 있는 집, 그런 집을 한 채 짓는 데 십칠 년이 걸린 셈이었다.

이제 완벽하게 돌아온, 다시 떠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고향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빈부격차로 인한 갈등이란다. 갯벌에 면허지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간의 갈등, 옛날에 부자였다가 몰락한 사람과 옛날에 가난했다가 부를 이룬 사람간의 갈등, 여러 종류의 갈등이 눈에 보이는데 이것을 풀 수 있는 묘안이 잘 안 보여서 걱정이란다. 그런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물었다.

“열일곱 살에 결성한 향우회는 어떤가요. 지금도 만남이 계속되고 있나요?”
“그럼요.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만나죠.”

왜 한 번씩밖에 안 만나느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물어보나마나 친구들은 대부분 도시에 있을 터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 트렉터 한 대가 고요한 자세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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