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열네 번째(인터뷰 정우성편)


#소금 굽는 가마


그 이름을 들으면 영화배우 정우성을 떠올리게 되는 정우성(53세) 씨는 할 말이 많다. 아니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할 말은 하면 되지만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대개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마련이다. 그러나 입이 안 열린다. 겨우 어떻게 입을 열었다 해도 하고 싶은 말은 안 나오고 에먼다리나 긁다가 말아버리기 십상이다. 내 말이 상대를 화나게 하면 어쩌나, 내 말이 상대를 아프게 하면 어쩌나, 마음이 여린 자의 마음은 노상 이런 걱정을 한다. 걱정이 많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을 준비했다가도 슬그머니 물려 버린다. 술을 마시면 그 힘으로 몇 마디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본질에는 닿지 못한다.

“내가 말이오. 바지락 농사 일만 이십 년인디, 그런디 말이오.”

애로사항이 뭐냐는 나의 질문에 정우성씨는 그런 말만 하고 있었다. 그랬다. 그는 바지락 농사 현장에서 이른바 ‘놉’으로 일한 세월만 이십 년이다. 그 분야에서는 완전히 전문가다. 일을 가장 잘 하기로 소문나 있기도 했다. 어떤 일을 시켜도 잘 처리해 내지만, 특히 전문적으로 잘하는 분야는 갈퀴질이다.


# 내가 이렇게 살아요.


요즘의 바지락 채취는 쇠갈퀴나 호미로 흙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시위 현장에서 사용하는 물대포 같은 것으로 흙을 뒤집어엎는 방식이다. 흙을 엎어놓으면 흙 속에 들어 있던 바지락이 놀라서 흙탕물 위로 둥둥 떠다닌다. 그것을 아줌마들이 바구니로 건져 올리는데 태반이 빠져 나간다.

빠져 나간 조개를 힘 좋은 남자들이 갈퀴로 긁어모으는데 주어진 시간은 잘해야 사오 분 남짓이다. 그 시간 안에 긁어모으지 못하면 조개는 정신이 돌아와서 도로 흙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때문에 갈퀴질은 바지락 채취 현장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바쁘고, 가장 중요한 보직이라 할 수 있었다. 농장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맡길 수 없는 임무이기도 하다.

정우성씨는 바로 그런 갈퀴질의 달인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받는 대우는 그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임금은 다른 사람과 같거나 오히려 낮았다. 서울에서 갓 귀농한 초짜와 이십 년 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임금이 같았다. 아마도 일 년쯤 뒤에는 서울에서 귀농한 초짜의 임금이 이십 년 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임금을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귀농한 사람은 말을 잘 하니까. 그래서 농장주에게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니까.

그 마음을 억울하다고 하면 억울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정우성씨는 억울하다는 생각까지는 안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만 이건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래서 농장주를 만나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렵단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기가 그렇게도 어렵단다.


# 마당에서는 메주가 익어가고~


이웃 사람들에게는 곧잘 그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이십 년 경력을 자랑하는 내 일당이 일 년도 안 된 초짜보다 만원이 적더라고, 여태 몰랐다가 엊그제 비로소 알았다고,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 말을 정우성씨는 가끔 이웃 사람들에게 흥분한 어투로 쏟아내기는 한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농장주 앞에서는 못한다. 왜냐하면 농장주가 그 말을 듣고 마음 아파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이 아파서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예전에는 이런 생각조차도 없었단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기만 했다. 자신의 생각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농장주는 태어나면서부터 농장주였을까? 농장주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그 윗대 할아버지들이 모두 농장주였을까? 그렇게 대대손손 그 사람들에게만 갯벌이 세습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권리는 하늘이 준 것일까? 갯벌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개인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공유수면인데 왜 한 번 농장주는 영원한 농장주여야 하는가? 그는 그런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았다.

젊어서 한때 서울 생활을 했다. 십여 년 남짓이었다. 촌구석에서는 못 살겠다고 서울로 갔지만 서울은 더욱더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와서 보니 해먹고 살만한 것이 없었다. 농사는 기본으로 한다지만 그야말로 기본일 뿐이었다. 사람이 살자면 기본적인 식량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농사는 그 무엇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갯벌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온갖 어패류를 잡아서 팔기도 하고, 뱀장어 새끼를 잡기도 하고, 해태양식장에서 품팔이를 하기도 하고 등등 그야말로 온갖 일에 몸을 던졌다. 바지락 양식장에서 최고의 일꾼이라는 소리를 듣는 요즘도 그는 일이 없는 날에는 온갖 일들 가운데 한 가지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 가고 있었다.


# 늦둥이 막내


결혼 초기만 해도 가난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단다. 없으면 없는 대로, 누구에게 쫓기지 않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그저 좋았을 뿐이었다. 좋은 삶을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데 뭐 그리 크게 부족한 것이 있었으랴. 그랬던 그가 요즘은 궁핍을 느낀다. 더불어 불안도 느낀다. 식구가 늘었고, 늘어난 식구가 나날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 네 명 그렇게 일곱 식구였다. 요즘 시골 살림으로는 대가족인 셈이었다. 큰애가 고등학생이고 둘째도 고등학생이었다. 셋째는 중학생이 되었고, 늦둥이 막내는 아직 유치원생도 아닌 재롱둥이다. 이 재롱둥이가 아빠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잠시일 뿐이었다.

“아 요놈이 내가 집으로 들어서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오는디 말이오. 그만 달팍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뛰어온단 말이오. 어째서 그런 줄 아요?”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빠의 주머니에 빵이 있었다. 우유도 있었다. 바지락 농장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간식이 빵과 우유였다. 정우성씨는 그것을 먹지 않고 아껴두었다가 집으로 가져갔다. 어떤 때는 갯벌에 떨어져서 흙투성이가 돼버린 것을 얼른 주워들고 물에 씻어 가져가기도 했다. 이 눈물겨운 내력을 아는 동료 일꾼들은 가끔 자기 몫의 빵과 우유를 그의 손에 쥐어주기도 한다.


# 여그가 진채선 생가터랑게요


“이놈 갖고 가서 딸내미 주시오, 야.”

늦둥이 막내딸의 재롱이라는 것은, 굳이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깜찍해서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 아빠임에랴. 그런데 늦둥이 막내는 어떻게 해서 태어난 것일까? 부부는 비슷한 나이 또래다. 사십대 후반에 새 사람의 탄생을 보았다는 얘기였다.

늦둥이 막내를 계획했던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냐고 얼른 손사래를 친다. 어떻게 하다 보니 생겼다고, 생긴 그 녀석을 두고 부부간에 할 소리 못할 소리를 참 많이도 했단다. 이놈을 낳아서 어떻게 키우지? 무엇으로 옷을 입히고, 무엇으로 학교를 보내지? 부부가 마주앉아 고민을 하고, 또 하던 중에 배는 불러 올랐고, 그리고 아이는 나 아주 건강하게 씩씩하게 자라날 것이라는 듯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태어났다.

이때부터 그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가난하다. 가난한 아빠를 둔 자식도 가난하게 될 것이다. 이 귀여운 딸내미가, 늦게 태어나서 더더욱 깜찍한 이 딸내미가 아빠와 똑같이 가난해야 한다. 왜, 왜 그래야 하지?

옛말에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기 먹고 살 것은 갖고 온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옛날에는 열심히 찾아다니면 임자 없는 땅이 있어서 개간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무인도까지도 모두 주인이 있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아무 때나 마음 내키는 대로 갯벌에 들어가서 어패류를 잡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어패류가 살아가기 좋은 갯벌은 모두 말뚝이 박혀 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던 갯벌이 이제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임자 있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양식업 면허라고 해서, 면허권을 정부가 갖고 있기는 하지만 형식적일 뿐이다. 면허라는 것은 애초에 면허를 받은 사람이 사망했다든가 하는 등으로 자격이 없어지면 소멸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해야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러나 면허는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세습되고 있었고, 세습된 그 권리는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그 가격은 천 만원대를 훌쩍 넘어 억대에 이른다. 한 번 돈이 없는 사람은 죽고 또 죽었다가 살아나도, 영원토록 죽고 또 죽고 또 죽었다가 살아나도 바지락 농장 한 뙈기, 갯벌 한 뙈기도 관리할 권한을 못 가져보게 되어 있는 셈이다. 왜 그래야 하는 거지? 왜, 왜, 응? 왜 이렇게 되어 있는 거야.


# 자염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


생각하면 답답하고 또 답답한 일이었다. 정우성씨는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면 가끔 근처의 공원을 찾는다. 조선조 말기 세상을 주름잡았던 대원군이 사랑했던, 당대의 여류명창 진채선이 태어나고 자랐던 집터가 그의 마을에 있다. 행정구역상 심원면 월산리라 부르고, 바람에 모래가 날아와서 쌓인 능선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서 사등(沙嶝)이라 부르기도 하는 마을이다. 
진채선이 태어나서 자랐던 집은 이제 그 자리에 없지만 집터는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집터에 행정당국이 나무를 심고 정자도 지어서 공원화 시켰다. 전국의 판소리 하는 사람들이 가끔 이 공원을 찾아와서 추모행사를 벌이는데 마을 사람들로서는 그만한 구경거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진채선, 하면 뭐 그런 사람이 있었나보다, 하는 정도였지만, 전국에서 사람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구경거리가 되고, 자랑거리가 되고, 자긍심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틈만 나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곤 하는 것이다.

월산 마을에는 진채선의 생가터 말고도 다른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금의 유래와 관련된 것이다. 선운사를 창건한 사람으로 알려진 검단선사가 인근의 도적들을 교화해서 양민으로 새로운 삶을 찾게 해준 소재가 바로 소금이었다.

바닷물을 길러다가 불을 때서 끓여라. 그러면 소금이 될 것이다. 그 소금을 내다 팔면 너희도 도적이 아닌 선량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검단선사의 이 말을 듣고 도적들은 그대로 했다. 그러자 정말로 소금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도적들은 정말로 양민이 되었다.

오래 전에 이미 널리 알려진 이 전설은 사실 전설이 아니었다. 사실에 바탕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금가마가 바로 월산 마을에 있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월산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계속 살아온 할아버지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소금은 정제염도 있고 천일염도 있지만 자염(煮鹽)이라는 것도 있었다. 자염은 물론 현재 유통되는 소금은 아니다. 그 제조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가격도 비싸서 오래 전에 이미 생산이 중단된 소금이다. 그런데 현대라는 이름의 사회는 비싸다고 해서 안 사먹는 세상이 아니다. 비싸면 비쌀수록 오히려 수요가 몰리는 아주 이상한 세상이 되었다.

정우성씨가 요즘 그나마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소금.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소금. 그래서 비싸고, 그래서 어쩌면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게 될지도 모르는 소금. 하긴 그것은 정우성씨 혼자만의 희망은 아니다. 월산마을 사람 모두의 희망이다.

먼저 말뚝을 박았다고 독점적인 지위가 인정되는 구조가 아닌, 특정한 개인의 독점사업이 아닌, 두세 명이 담합해서 후려먹는 것도 아닌, 명실상부하게 모두가 모두를 위하는, 전체가 부분이 되고 부분이 전체가 되는 사업을 위해 월산마을 사람들은 지금 머리를 맞대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월산마을 사람 모두의 이름으로 법인 등기도 이미 마쳤다. 작년에는 시험생산을 했었고, 금년에는 작년의 시험생산 과정에서 드러난 오류를 바로잡는 제2차 시험생산이 예정되어 있다. 시기는 꽃피는 계절 4월. 이것이 제대로만 된다면, 다음 해부터는 아마 본격적인 생산이 가능할 터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삶은 이제 졸업이다. 이십 년을 전문가로 일했어도 경력을 인정해주기는커녕 일년짜리 초짜와 똑같은 대우밖에 안 해주는 바지락농사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당당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아니아니 무엇보다도 귀염둥이 딸내미, 그 늦둥이 귀염둥이 딸내미에게 가난을 세습해야 한다는 공포로부터 일단은 해방이 될 터이다.

그러고 보면 온고지신이라는 사자성어는 책 속에만 존재하는 박제된 용어가 아니었다. 전통에서 희망을, 미래를 본다는 것은 어렵지만 신나는 일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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