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짐빠리’라 부르는 자전거




자전거를 보면 내 마음은 설렌다. 오래된 자전거를 보면 향수까지 더해져서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 향수가 무슨 향수인지 나는 모른다. 자전거에 그 무슨 고향의 이미지가 덧칠해져 있을 까닭은 분명 없다. 그런데도 오래된 자전거를 보면 고향의 어떤 것들이 중첩되면서 가던 길을 멈추고 허둥거린다.

그날도 그랬다. 처음부터 그것이 자전거라고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손수레인 줄 알았다. 멀리서 본 까닭이었을 것이다. 손수레 치고는 뭔가가 많이 이상했다. 한눈에도 온갖 잡동사니들이 실려 있어서 폐지 수집용이라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높이가 터무니없이 높았다. 저게 뭐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리고 다가서고 있었다.

이른바 ‘짐빠리’로 통하는, 사람이 홀로 탔을 때보다는 키 높이로 짐을 실었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하는 화물전용 자전거였다. 오래 전 포목점이 몰려 있는 서울의 광장시장 옆을 지나갈 때면 부지기수로 눈에 띄던 자전거였다. 내가 아직 미성년이었을 때 한말 들이 막걸리 통을 다섯 개나 싣고 달리는 것을 보고 와아, 와아, 감탄사를 오십 번도 넘게 질렀던 자전거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제는 추억의 물건이 된, 자전거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짐빠리’ 자전거를 보고 나니 뭐랄까, 감개 같은 것이 무량하다는 느낌이어서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보다 보니 이것은 뭐 자전거라기보다 고철로도 쓸 수 없는 녹슨 파이프 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설치미술 같다는 느낌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에는 싯누렇다 못해 검붉은 녹이 이중삼중으로 슬었고, 앞바퀴는 교체를 해서 그런대로 자전거 폼이 났지만 뒷바퀴는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살대가 부러질 것 같고, 흙받이는 닳고 닳아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채로 무슨 스펀지와 비닐 쪼가리를 두세 겹 잇대어서 끈으로 얼기설기 묶어놓았고, 안장은 엉덩이 쪽이 통째로 날아가서 판자대기를 댄 다음 수건으로 쿠션을 만들어놓은 이 괴상한 물건을 도대체 자전거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도 신기해서, 뭔가 자꾸 감격스러워서 카메라를 꺼내들고 정신없이 이 각도, 저 각도, 온갖 각도로 셔터를 눌러대는데 갑자기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이 시방 뭔 짓을 하는 겨?” 소리를 듣고 정신이 살짝 돌아와서 뒤를 돌아보니 장작개비처럼 깡마른 체격의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신문지를 한아름 품에 안은 꾸부정한 자세로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이 양반이 주인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반갑다는 느낌이었던가. 하여튼 반가운 마음에 반가운 목소리로 웃어가며 “하도 오랜만에 보는 짐빠리 자전거가 반가워서요” 했더니 이 양반의 표정이 사뭇 험악해진다. “아 긍게 뭣 땀시 마구 찍어대느냐고”하고 마치 내가 손으로 자전거를 만지기나 한 것처럼, 자전거의 어딘가를 망가뜨리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안면 근육을 울근불근해대며 소리를 지르신다. 그 모습이 황당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아따 참말로 이 자전거 보물이네요, 보물, 얼마나 됐어요?”

“그걸 알아서 믓허게? 도둑을 시 번이나 맞었어. 사자마자 도둑맞은 걸 사흘 만에 찾았는디 다음 날에 또 도둑맞어서 이틀 만에 찾았고. 그나저나 쩌리 비켜나. 바쁜 사람 붙잡고 뭐하는 짓이여, 시방?”

“아, 도둑을. 그래서 시방 제가 이 자전거를 훔쳐가려고 하는 걸로 보셨군요?”
“아니믄 되았고. 쩌리 비껴나랑게 그러네.”





# 영화 <자전거도둑>


“아니 긍게요. 이게 무쟈게 오래 된 것 같은디, 한 이십년 됐을라나요?”
“이십 년 같은 소리 헌다. 서른두 살이나 먹었구만.”

“서른둘이면, 삼십이 년이요? 이것이? 아니 어떻게 타고 다니신다요?”
“그 사람 참 거. 어떻게 타고 다니는지 한 번 봐봐.”

할아버지는 성마른 소리와 함께 내 몸을 밀쳐내고 자전거에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웬걸, 안장 같지도 않은 안장에 엉덩이를 걸쳤다 싶은 순간 그대로 쌩, 하고 가버리고 계셨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말이 그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첫날은 그렇게도 황당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그리나 금방 잊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그 자전거를 찾아서 다시 간다는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밤에 이상한 일이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전거를 세 번이나 도둑맞았다가 다시 찾았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귓가에 쟁쟁하다는 느낌이었다. 자다 말고 일어나서 영화 <자전거도둑>을 허둥지둥 찾아내서 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북경자전거>를 역시 허둥지둥 찾아내서 보았다. 그렇게 영화 두 편을 잇달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잊고 있었던 일 하나가 생각났다.

한 달 사이에 자전거 두 대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믿거나 말거나 그런 사건이 내게 있었다. 십삼 년 전이었다. 서울행 고속버스 시간을 알아보려고 터미널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자전거가 사라지고 없었다. 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진 셈이었다. 화가 나서 버스도 타지 않고 집에까지 한 시간도 넘는 거리를 걸어서 돌아갔다. 그렇다고 마냥 걸어서 다닐 수는 없었다. 사흘 뒤에 다시 자전거 한 대를 샀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겨우 한 달 전에 자전거를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하고도 나는 벌써 잊고 있었다. 그 흔한, 삼천 원짜리 자물쇠 하나만 사서 채웠어도 자전거를 두 번씩이나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그 손쉬운 일을 안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전거 한 대를 또 잃어버렸다. 이번에는 이발소 앞에서였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면도를 하고 드라이까지 했으니 아마도 족히 한 시간은 걸렸으리라. 한 시간이면 자전거 한 대 그까짓 것 일도 아니게 해치울 수 있었으리라.

문제는 자전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내가 잃어버린 자전거를 내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아니고 바로 다음 날이었다. 다음 날 고창천을 지나서 석탄 쪽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개천 한가운데쯤에 자전거 한 대가 마치 던져놓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내가 도둑맞은 물건을 내가 못 알아볼 리는 만무한 것이고, 그것은 그냥 건성으로 봐도 내 자전거였다.

그런데 나는, 허둥지둥하는 자세로 들어가서 내 자전거를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고개를 홱 돌린 채로 뛰다시피 해서 그 자리를 도망치고 있었다. 얼굴은 확확 달아오르고, 가슴은 후덕후덕 뛰고, 머릿속은 하얗게 텅 비어버린 느낌이어서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누가 볼까 무서워서, 창피해서 얼른 그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뭔가 아주 크게 모욕을 당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래, 그것이었다. 개천에 처박혀 있는 것은 내가 잃어버린 자전거라기보다 나를 비웃고 모욕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런데 내 자전거를 훔쳐간 사람은 왜 그렇게 개천 속에다 자전거를 팽개쳤던 것일까? 자전거가 별로 매력이 없어서? 흔해빠진 국산 ‘삼천리호’ 자전거라서? 아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영화 <북경자전거>를 보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내 자전거를 훔쳐간 도둑은 어른이 아니었다. 초등학생이거나 중고등학생 정도였음이 분명했다. 견물생심이라고, 자물쇠도 걸려있지 않은 자전거를 보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올라타서 달렸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문제가 발견된다. 훔친 자전거를 어디에 감추지? 아빠나 엄마가 돌아와서 이게 웬 자전거냐고 추궁하면 뭐라고 말하지?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도둑은 갑자기 무서워졌다. 그래서 자전거를 다시 끌고 나가서 개천에 버린다.



이런 추리에 무리가 없다면, 결국 잘못은 내게 있었다. 자전거롤 도로변에 세워두면서 자물쇠를 걸지 않은 죄. 현대를 살면서 자물쇠를 가까이 하지 않은 죄.

영화 <자전거도둑>이나 <북경자전거>는 이른바 하층민들의 삶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도둑의 성향은 다르다. <자전거 도둑>에서의 도둑은 분명치가 않고, 도둑맞은 자가 도둑이 되어 망신을 당하는데 그 장면을 그의 아들이 목격한다는 매우 비극적인 설정을 취하고 있다. 반면 <북경자전거>에서의 도둑은 먹고살 걱정이 없는 학생이고, 자전거가 필요한 이유는 친구들과 어울려 묘기를 개발하는 것이 첫째요, 둘째는 좋아하는 여학생과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자전거를 훔쳐간 사람은 <북경자전거>에서의 그 학생과 비슷한 욕구를 가졌던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 할아버지의 자전거를 훔치려고 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내 기억에 따르면 삼십이 년 전의 자전거는 귀중품이었다. 적어도 일반서민의 한 달 수입으로는 자전거 한 대 구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일반자전거도 아니고 ‘짐빠리’였다. ‘짐빠리’는 힘이 좋은 게 특징이고, 쇠붙이 등의 자재도 많이 들어갔으니 가격도 비쌌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맞나? 정말로 ‘짐빠리’ 자전거 가격이 더 비쌌을까?

그런저런 온갖 의문을 가슴에 품고 다음날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야 했다. 만나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어쨌든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고창 시내를 그야말로 이 잡듯이 뒤졌지만 그 설치미술 작품 같은 고물 자전거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를 좋게 보내고 다음 날 다시 나섰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오기가 생겨서 며칠 뒤에 다시 나섰다. 그리하여 마침내 만났다. 만나기는 했지만, 말 한 마디 제대로 붙여볼 수가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 할아버지는 인간의 진지함 같은 것을 애써 밀어내 버린다는 생각이었다.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어서 그 연세에 그렇게도 냉소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차분하게 앉아서 뭔가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하면 대번에 코웃음을 치며 일어서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무조건 치고 들어가는 ‘전술’을 택하기로 했다.



“아따 이 할아버지 또 만났네요 잉? 이 고물 자전거로 옛날에 막걸리 배달깨나 하셨겠어, 맞죠?”
“별 미친, 남이사 막걸리 배달을 했거나 말거나.”

“쌀 배달도 하셨죠? 우유배달도 하셨을 것 같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마 택배도 하셨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이젠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폐지 수집을 하게 됐고, 제가 틀린 거 아니죠?”

할아버지는 눈을 꿈벅꿈벅하면서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귀신  같은 인간이 나타났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할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도로 건너편에 편의점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리둥절한 채로 내 손에 이끌려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나는 소주 한 병과 오징어와 그리고 참치캔 하나를 까서 들고 자리를 잡았다.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째 뚜껑을 열었을 즈음쯤 할아버지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내가 말이여. 마누라 땜시 저놈의 자전거를 샀는디 말이여.”

그렇게 시작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 역사는 저 멀리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태백산맥을 넘고 노령산맥을 넘어서 고창의 바다로 흘러가는 것만큼이나 길고도 가늘고 굽이굽이 유장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머니가 누구인지 또한 모르는 채로 광주의 무슨 고아원을 나와서 신문배달을 하던 중에 학살사건을 경험했고, 그때의 충격으로 광주를 떠나 고창으로 들어왔단다. 양조장에서 막걸리 배달을 시작했는데 지게로 두 통씩 져서 나르는 일이었다.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결혼을 했고,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그때 부인이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짐빠리’ 자전거를 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게로 막걸리를 져서 나르는 것보다는 자전거로 하면 물량을 더 많이 처리할 수 있고, 수입도 당연히 많아질 테니 그 돈을 모아서 아들을 대학에 보내자는 의견이었다는 것이다. 대학, 당시만 해도 까마득하게 높은 문턱이었다. 그 높은 문턱의 대학을 아들이 들어가면, 그 뒤에 아들은 무엇이 되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면서기만 되자, 이것이었는디, 응?”

그래, 그것이었다. 공무원. 할아버지는 아들이 문턱 높은 대학을 다니고 나면 당연히 면서기 정도는 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이미 주변에 대학을 안 다닌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공무원 시험은 매번 떨어졌고, 작년에는 서울의 무슨 구청 미화원 시험에 원서를 넣었지만 그것조차 경쟁이 팔십대 일이었다던가, 하여튼 떨어졌다는 것이다.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내 죄 아닌 내 죄로 인하여…….”

소주 몇 잔에 취한 할아버지는 갑자기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 부모 없는 자식이 된 것은 내 죄가 아니었지만 내 죄로 돌아와 있다는, 그러나 그 노래를 끝내지는 못했다.

다시 자전거 이야기로 돌아왔다. 자전거의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나름의 사연이 있고 스토리가 있었다. 어디를 가던 중에 무엇을 보았고, 무엇이 어떠해서 그 물건을 손에 넣게 되었는가, 그것을 왜 고물상에 팔아넘기지 않고 자전거에 달고 다니는가, 등등 끝없는 이야기가 샘처럼 솟아나는 와중에도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셨는데도 취할 줄을 몰랐다.

술을 마시고도 취하지도 못한 채 헤어질 무렵쯤 나는 그 할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내가 계속 그 할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될지 여부는 나도 아직 모르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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