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이 겨울의 마지막 일기




2012년에서 2013년으로 넘어가는 분기점, 그 겨울은 참으로 황홀했다. 객관적인 지표가 어떠했는지까지는 내가 모르겠고, 적어도 내 개인적으로 그랬다. 황홀했다. 황홀한 겨울이었다.

방에서도 얼음이 꽁꽁 얼 정도로 무진장 추워져나 버려라, 했더니 정말로 그렇게 추워졌다. 마당에서도 길을 잃을 정도로 눈이나 왕창 쏟아져라, 했더니 정말로 눈이 내렸다. 아니 쏟아졌다. 내 소원이 이렇게도 단기간 내에 이루어진 예가 일찍이 한 번이나 있었던가, 과거를 더듬어보고 또 살펴봐도 그런 신기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하도 신기해서 집을 나서기로 했다.

사실 집에서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가 않았다.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모터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돌아갈 생각을 안 하고, 기름보일러는 기름 아낀다고 기본온도를 10도에 맞췄더니 얼어 터졌고, 연탄난로는 불이 꺼졌고, 전기장판은 “아이고 추워, 아이고 추워” 그렇게 중얼대며 웅크린 채로 몸부림을 쳤더니 열선이 꼬이다가 그만 타버렸다.



만약에 사건이 한 가지만 터졌다면 나는 아마 그 한 가지 일에 매달린 채로 하루를 꼬박 정신없이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개의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까닭에 나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저 유명한 말처럼 널널하게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장화를 신고 손에는 털장갑을 끼고 길을 나섰다.

이러는 내가 바보일까? 아니면 무책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냥 살아있을 뿐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 길을 나서는 것이다. 선거를 할 때마다 내가 찍은 사람이 당선되는 예가 거의 없는 이런 세상에서 한 번쯤은, 하루쯤은 그냥 다 팽개치고 한가하게 짐짓 태평한 부르주와 흉내를 내보는 것도 뭐 괜찮지 않겠는가 말이다.

처음에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웅크려 앉은 채로 이를 달달 떨어가며 인터넷이나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5년 전 이맘 때 텔레비전을 끊었다. 연속극을 좋아하시는 어머니 덕택에 가끔 나란히 앉아 연속극을 보기는 했지만, 그토록 좋아했던 뉴스 같은 것은 아예 틀지도 않았다. 그러나 웬걸, 집에 인터넷 모뎀이 설치되어 있다 보니 뉴스는 저절로 내 머릿속에 입력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정말로 텔레비전을 끊게 되었다. 그러니까 텔레비전을 켜본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가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서 인터넷도 끊기로 했다. 교수신문에서 선정한 사자성어가 내 결심을 부추겼다고 볼 수 있었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의 거세개탁이라고 했다던가.


# 할머니 돌아가신 뒤의 빈집


어떤 사람은 관념의 유희라고, 자신들만의 놀이라고 폄훼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뭐 나는 그랬다. 거짓말이 난무하는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조금이라도 지키고 싶었다고, 뭐 이런 거창한 표현을 써도 무방하다. 하지만 아직 인터넷을 끊지는 못했다. 도롱뇽이 알을 낳고 매화가 꽃을 피기 시작하면 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내가 이 시끄럽게 난삽한 허위와 기만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진중하게 나를 돌아볼 수 있을까?

그렇게 되거나 안 되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만 그 간단한 질문이 한없이 어려웠다. 눈 속을 미친 듯이 걷다 보면 뭔가 해답 같은 것이 보일까? 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게 길을 나섰다. 술이나 퍼마시고 자빠져서 이놈의 세상, 이놈의 세상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날마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정말로 그런다면 내가 아마 죽어버릴 것이었다.

2년 전에 할머니가 떠나면서 사람 없는 집이 되어버린 빈집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한참이나 보았다. 거꾸로 자란다 해서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하는 고드름을 가만히 서서 보고 있노라면 나는 어느새 아련한 동화의 세계로 빠져들곤 한다. 그러면 나무들은 어떤가. 깨농사 고추농사로는 먹고 살기 어렵다고 심어놓은 그 이름이 메타세콰이어라든가, 하여튼 관상수 묘목이 줄지어 빽빽하게 서 있는 장면 역시도 내게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저렇게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어찌 토끼 한 마리 안 뛰어다닌단 말인가, 하는 불만과, 조만간 나를 찾아오는 친구가 있다면 내 반드시 저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서 토끼를 찾아보리라, 하는 뭐 그런 희망 같은 것이 뒤섞이면서 또 하나의 동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 벼를 베어난 자국들


# 조사료용 볏짚뭉치들


그런데 메타세콰이어는 그 나무 자체에 이미 동화가 들어 있었다. 언제였던가.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가 유명하다 해서 구경을 갔던 그날 나는 그 나무가 사철 푸른 종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이듬해 겨울 그 길을 다시 갔다가 그 나무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면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여튼 사철 푸른 메타세콰이어는 하나도 없고 죽었거나 혹은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만 앙상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 봄이 되자 푸른 잎이 마구 솟아나서 정말로 근사한 가로수길이 되는 것이었다.

나만 그런 식으로 속았는가 해서 속이 상했는데 아니었다. 그 나무를 처음 보는 사람은 거의가 그것이 사철 푸른 나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낯설다는 것, 나무의 형태가 동양풍이 아니라 서양풍이라는 것.

그랬다. 나는 한때 그것이 유럽 어디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식물학자들은 그것이 백악기 시대의 화석에서만 발견되는, 이미 멸종한 식물로 보고 있었단다. 멸종한 줄 알았던 그것이 1940년 무렵 중국에서 발견되었다. 그 뒤로 그것은 세계로 널리 퍼져 나갔다. 관상 가치가 높고, 번식이 아주 잘 되는 까닭이었다. 지구촌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그 나무는 그러면 왜 중국의 깊은 산에서 발견되었을까. 전문가들조차 멸종된 식물로 단정하고 있었던 그것이 중국에서 발견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너무나 한갓진 의문일까.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이 내게 말했었다. 관심의 대상이 너무 넓다고, 그래서 아무것도 안 된다고 했었다. 풍경을 볼 때는 그냥 풍경만 감상해야지 풍경 너머의 어떤 것을 보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뭔가 자꾸 의미를 부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나도 그 말에 동의는 하지만, 그러나 어쩔 것인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고, 또 그렇게 살아 온 것을 어쩔 것인가 말이다.


# 메타세콰이여 재배장


어딘가에 대통령이 사진이 있을 때, 아 저기 대통령이 있구나, 하고 말 수만 있다면 나도 아마 굉장히 행복할 것이다. 대통령을 보면서 대통령만이 아닌 그의 행로와 조상과 행적들을 보게 되니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되고 만다는 것, 그것을 내 자신 너무나 잘 알면서도 개선이 안 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그런 내가 싫다고 해서 내 스스로 나를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어쨌든 나는 걷고 있었다. 눈이 쌓인 거리를 걷고 있었다. 쌓인 눈은 촉촉하게 부드러웠다. 발을 들면 그것을 내딛기도 전에 뿌드득, 뿌득,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없었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간 흔적만 그림처럼 길게, 구불구불 보란 듯이 두 줄로 나 있었다.

갈대는 눈의 무게로 인해 고개를 한껏 수그렸고, 벼를 베어낸 자국이 선명하게 바둑판처럼 드러난 논에는 볏짚들이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무더기로 쌓여서 에스키모인들의 이글루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한우 사육 농가에서 조사료용으로 쓸 볏짚들은 벌써 전에 하얀 랩으로 씌워져서 차곡차곡 쟁여졌지만, 고창의 최대 작물 가운데 하나인 복분자 밭에 쓸 것들은 논바닥에 마치 버려진 듯이 작은 무더기로 쌓여진 채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보면 볏짚은 한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였다. 그래서 벼를 수확할 때 콤바인으로 잘라서 말렸다가 태워 버리곤 했다. 초가집이 없어서 이엉으로도 쓸 필요가 없었고, 아궁이가 없어져서 땔감으로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복분자 모종을 한 뒤에 좌우사방으로 볏짚을 덮어주면 보온과 보냉에 아주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볏짚은 쓸모가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국제곡물 가격의 폭등으로 사료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 이후 볏짚은 조사료용으로 아주 좋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볏짚은 이제 보물이 되었다. 


# 멀리서 아이가 온다.


보물로서의 볏짚이 어느 정도 가치를 지니는가는 고속도로에 나가보면 이내 알 수 있다. 12월에서 2월 사이 서해안고속도로는 볏짚을 옮겨가는 거대한 트럭들로 장관을 이룬다. 목적지는 대개 충청도 산간지역이나 강원도 산골짜기에 위치한 한우 사육농가들이다.

트럭은 거대하지만 적재 가능한 볏짚 뭉치는 고작 열두 개 남짓이다. 그런데 볏짚은 사람이 대충 뭉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수하게 제작된 중장비로 밤낮 가리지 않고 작업을 한다. 트럭에 실을 때도 중장비가 동원된다. 그렇다면 볏짚 한 뭉치의 가격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얼핏 가늠이 잘 안 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 하나는 얻을 수 있다. 어제는 쓰레기였던 것이 오늘은 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들판의 개천 옆 농로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먹이를 찾아 몰려다니는 까치들의 울음소리를 음악인 양 새겨들으며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걷고 또 걷던 중에 진짜 보물을 발견했다. 사람이었다. 저 멀리서 사람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시골, 농촌, 그 무슨 천형이라도 받은 듯이 적요해져 버린 이곳에서 사람 한 명 발견하기란 그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게 발견한 사람은 또 그 얼마나 고맙게 반가워져 버리는가. 

마치 나를 찾아오는 듯이, 나를 만나러 오는 듯이 점차 가까워지는 사람, 그 사람은 놀랍게도 아이였다. 어른도 아니고 아이가 눈 속을 걸어오고 있었다. 보물 중에 보물이라고나 할까. 나는 방향을 돌려 아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아 그래, 아이를 보면 괜히 즐겁고 반갑다. 내 자신의 아이는 한 명도 없지만, 그래서 살짝 염치없다는 느낌도 있기는 하지만 어쩔 것이냐.

“방학 안 했어?”
“했어요.”
“근데 그 책가방은 뭐냐, 아 학원 다니는구나?”
“아뇨. 학원 없어요.”

아, 그렇지 참. 내가 실수했다. 우리 고장 해리는 인구 3천이 채 안 되는 면 단위이고, 그 중에 5분의 4는 육십대 이상이다. 나머지 5분의 1 가운데 약 백여 명 정도가 유아 이상 초, 중, 고등학생 즉 아이들 계급이다. 이렇게 빈약한 아이들을 보고 무슨 학원이 간판을 달 수 있으랴. 그래, 우리 고장에는 학원 같은 것이 없었다. 어린이집이 하나 있고, 학생 수 이십여 명 남짓의 언제 폐교될지 모르는 학교가 서넛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학원을 다녀오는 중이냐고 묻고 있었다니.  


# 아이는 혼자서 간다.


“그럼, 어디 다녀오는 거야?”
“학교요.”
“그럼 학교에서 보충수업 하는 거야?”
“아뇨.”
“그럼?”
“놀러요.”
“학교에 놀러 갔다 온다고? 책가방을 메고서?”
“그냥 가면 심심하니까요.”

맨 몸으로 가면 심심해서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놀러 갔다 온다? 하긴 마을에 아이들이 어울려 놀 만한 또래집단은 없었다. 어느 마을 할 것 없이 아이들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있다 해도 두세 명이 고작이다. 그것조차도 유치원생과 고등학생 만큼의 나이 차가 있었다. 그래도 학교에 가면 또래 아이들이 여남은 명 정도 모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방학 중에도 먼 길을 걸어 학교로 거의 출퇴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거기까지는 이해를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책가방의 문제에 이르면 머리가 좀 아팠다. 학교에서 무슨 공부 같은 것을 하면서 노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하, 그렇다면 책가방 속에 간식거리를 가져가는구나, 하고 물었지만 그 역시 아니라고 했다. 군것질 정도는 돈 천 원이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그냥요.”
아이의 대답은 그토록 간단했다. 그토록 간단한 문제를 왜 어렵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투가 역력했다. 거기서 더 이상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면 내가 그만 완전히 바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 접기로 했다. 내 머릿속이 그동안 지나치게 실용주의화돼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그러자 문득,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미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너무 미안해서 아이의 얼굴조차 바라보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별나게도 추웠던 이 겨울의 끝을 나는 그렇게도 미안한 마음으로 보내고 있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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