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 열다섯 번째


#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은 갯벌


자전거를 타고 갯벌을 달리면 어떨까. 무엇이 새로 보일까. 무슨 새로운 소리가 클래식 음악처럼 부드럽게 귓전을 파고 들어와 줄까. 트렉터를 타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혹은 볼 수 없었던 무엇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나 여기 있었다는 듯 새롭게 나타나서 나를 감동시키고 놀래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는지 모른다. 갯벌에서 조개잡이 노동을 시작한 지난해 9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툭하면 그런 생각 아니 유혹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채 해를 넘기고 3월을 맞이하고 말았다. 나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었다고 봐야겠지만, 꼭 그것만도 아닌 다른 무엇이 있었다.

바다라는 것이, 갯벌이라는 것이 그런 어떤 묘한 망각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면 내가 참 어불성설한 사람인 것 같아서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로서는 달리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는 기묘한 뭔가가 갯벌에는 있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생각이 다르다는 속담도 있기는 하지만, 갯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생각이 그렇게도 완벽하게 달라져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트렉터를 타고 갯벌로 들어설 때는 “아아 참 또 잊어먹었다. 내일은 반드시 자전거를 갖고 와서 타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거의 맹세를 하듯이 다짐을 하지만, 작업을 끝내고 나올 때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 그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 날 다시 트렉터를 타고 갯벌로 들어설 즈음에야 겨우 생각이 나면서 아아 이런, 이런, 하는 식이었다.


# 홀로 외로이 떠나는 경운기


어떤 사람은 갯벌에서의 작업이 너무 고단해서, 힘들어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작업이 끝난 뒤에는 매사가 다 귀찮아져 버리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글쎄, 꼭 그렇기만 할까. 천문학자들은 우주 공간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암흑에너지가 있어서 우주를 끝없이 팽창시킨다고 하는데 혹시 갯벌에도 그런 것이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인간의 모든 계획과 생각들을 말소시켜 버리고 다음 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아아, 이런 식의 추론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그야말로 블랙홀에 빠진 형국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어쩌랴. 설익은 가설은 일단 접어두고 자전거 이야기나 마저 끝내는 수밖에.

서울에 있을 때 흔히 오일육 광장이라고 일컫는 여의도 광장으로 툭하면 달려가서 임대용 자전거를 타는 것이 내 취미였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서울 생활 그만두고 내려왔을 때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자전거였다. 처음 자전거를 구입할 때의 목적은 교통비 절감용이었다. 시골에서의 버스요금은 도시와 달리 매우 비싸다. 기본요금 천이백 원에서 면소재지 하나를 지날 때마다 오백 원 단위로 요금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 아직은 겨울인 염전


그런 이유로 구입한 자전거 타기를 통해서 나는 조금씩 다른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매끄럽기만 한 여의도의 아스팔트 광장에서는 볼 수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던 어떤 존재들이 내 눈을 새롭게 하고 있었고, 내 귀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속도 위주로 마구 달릴 때는 아무 특이한 소리도 들리지 않고 새로운 어떤 것도 눈에 띄는 게 거의 없지만, 소녀가 나비를 잡으러 가듯이 신중하게 천천히 오솔길을 달리고 있을 때면 귀한 손님처럼 여러 많은 것들이 내 눈을 채우며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페달을 자발스럽지 않게 가만가만 밟고 나아가노라면 여치나 귀뚜라미, 개구리나 두꺼비, 심지어는 꽃이 피어나는 소리까지도 들린다는 매우 풍요로우면서도 다소곳한 느낌에 빠져드는데 이 모든 생명들의 소리와는 또 다른 소리, 어쩌면 지구가 숨을 쉬는 소리인지도 모를 기묘한 소리가 들린다.

바퀴가 로마 병사의 투구와 방패처럼 위압적으로 거창한 산악전용 자전거로는 그런 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자전거 자체의 소음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사용 자전거라고 하는, 바퀴의 요철이 거의 없는 자전거를 타고 살그머니 가만가만 나아가노라면 바로 이거야, 이런 분위를 나는 좋아해, 하는 듯이 숨어 있던 소리가 사박사박 귀를 간질이며 나를 긴장시키는 것이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 내밀한 소리를 나는 일단 지구가 숨을 쉬는 소리라고 멋대로 정의해놓고 툭하면 그런 시간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 밀물이 시작되면 일제히 몰려드는 갈매기들


갯벌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아니 뭐 꼭 그런 소리가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다른 소리가 있을까? 바람소리나 파도소리, 갈매기나 도요새들의 소리가 아닌, 흙을 물었다가 뱉고 또 물었다가 뱉기를 되풀이하는 칠게나 농게들의 소리가 아닌, 아주 작은 숨구멍으로 물을 뿜어내는 동죽이나 백합 같은 조개들의 소리도 아닌 그 무엇, 그 어떤 소리가 있을까?

있을 것이다.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리는 어떨까. 육지에서처럼 지구가 숨을 쉰다는 느낌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바다가, 아니 갯벌이 통째로  숨을 쉰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다가, 아니 갯벌이 숨을 쉬는 그 소리는 내게 어떤 느낌을 줄까.

갯벌에서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달리고 싶다는 나의 생각은, 그 욕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걷는 걸음으로는 오히려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 때문에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바람에 흙이 쓸려서 노출된 바지락


이유야 어쨌든 그랬다. 갯벌에서의 자전거 타기는 그렇게도 오랜 시간 나를 설레게 했지만 나는 한 번도 시도조차 못해본 채 해를 넘기고 1월, 2월, 3월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래, 3월이었다. 3월은 2월이나 1월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 있는가? 그런가 보다. 우선 느낌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게 작동한다. 2월이나 1월에는 해보지 못했던 생각이, 느낌이 나를 자꾸 어딘가로 밀어낸다. 어디로?

“아아 그렇구나, 벌써 3월이구나. 자전거, 갯벌에서의 자전거.”

어느 하루 집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던 나는 그렇게 벌떡 일어섰다. 그렇게 길을 나섰다. 그것은 뭐랄까, 벼락을 맞은 듯한 감정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날 그 순간의 나를 흔들어놓은 것은 분명히 벼락같은 것이었다. 나의 어떤 행동이 세상을 확 바꿀 수도 있다는, 바꿔놓을 것만 같은 느낌. 말하자면 그런 황당한 자가당착의 상태로 허둥지둥 길을 나선 셈이었다.


# 거센 바람에 죽어버린 조개


그런데 이건 또 뭔가.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바람이 너무 심해서 자전거를 타고 갯벌 깊숙이 들어간다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3월은 원래 바람이 많은 계절이긴 하지만, 그날의 바람은 예사 바람이 아니었다. 갯벌의 흙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서 얼굴에 처덕처덕 달라붙었고,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있으면 눈이 저절로 감겨져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돌풍인 것도 아니었다. 바람은 한쪽에서 일제히 고르게 불어오고 있었다. 하늘은 대체로 맑았고, 갯벌을 비추는 햇빛은 은빛 혹은 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 그런 날이었다. 멀리서 건성으로 대충 보면 하늘 맑은 날의 매우 평화로운 갯벌로 비쳐지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모래와 흙이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이주를 하는 그런 날이었다.

몽골이나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가 한반도를 뒤덮듯이, 바람의 유혹에 일어선 갯벌의 모래와 흙은 끝없이 계속 날아가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쌓이고 또 쌓여서 사구(砂丘)를 형성하게 될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날 갯벌에서의 자전거 타기를 즐기겠다고 집을 나선 나,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전거를 포기하고 걷기로 했다. 그동안 바지락 작업을 했던 농장까지는 걸어서 몇 시간이나 걸릴까, 하는 새로운 호기심이 추가되어 있었다.

게다가 갯벌의 전체적인 모양이 너무도 고왔다. 바람이 돌풍으로 불어올 때의 갯벌은 부스럼딱지처럼 마구 파헤쳐져서 영 흉측해 보이지만, 바람이 한쪽에서 일제히 고르게 불어오는 날의 갯벌은 마치 어마어마한 크기의 카펫을 깔아놓은 것처럼 요철 하나 없이 곱게, 부드럽게, 보기만 해도 그냥 앉아보고 싶을 정도로 끝없이 펼쳐져 있곤 했다. 트렉터를 타고 다니면서 그런 장면을 몇 번인가 보기는 했지만 두 발로 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부드러운 카펫처럼 깔려 있는 갯벌을 실제로 밟아보니 이건 도대체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하나. 한 마디로 말해서 딱딱했다. ‘징허게도’ 딱딱했다. 마당바위 같은 돌을 밟는 것 같았다. 갯벌 특유의 부드러움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람이 흙을 대리고, 또 때리는 동안 흙은 그만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었다. 아, 바람이란 이렇게도 강력한 것이로구나,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해진 갯벌은 그렇다면 죽어 있는 것일까?


# 굴 양식장에서 쓸려온 굴


아니었다. 콘크리트처럼 딱딱해진 갯벌 도처에 크고 작은 구멍이 있었다. 숨구멍이었다.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들의 무수한 숨구멍이 하늘을 향해 뚫려 있었다. 뚫린 채로 그냥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람은 끊임없이 숨구멍을 메워버리고 있었고, 그 안의 생명들은 끊임없이 막힌 숨구멍을 새로 뚫고 있었다.

사람이 만일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전쟁도 이런 전쟁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며 통곡을 하며 하늘을 원망하겠지만, 갯벌을 집이요 놀이터요 식량창고로 삼고 있는 흙 속의 뭇 생명들은 아무 이상할 것도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라는 듯이 바람에 묻혀버린 숨구멍을 뚫고, 또 뚫고, 또 뚫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부지런히 지켜내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흙 속으로 비교적 깊이 들어가 있던 녀석들은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숨구멍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녀석들은 바람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흙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몸을 반쯤 밖으로 내놓고 있었던 조개들 가운데 일부는 거센 바람에 조금씩 끌려가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일부는 바람의 압력을 못 견뎌 그만 죽어버려 있기도 했다.

인근의 굴 양식장에서는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굴이 몇 마리씩 서로 엉킨 채로 멀리 떨어져 나와서 뒹굴고 있었고, 해태 양식장에서는 역시 뿌리를 단단히 결속시키지 못하고 흔들리던 물김이 바람의 유혹에 떨어져 나와서 헤매다가 버려진 듯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내가 만일 이 갯벌 한가운데서 발뿌리를 아무렇게나 아무 방향으로나 멋대로 돌린다면, 아니 그보다도 정신줄을 살짝 놓아버린다면, 그런다면 나도 저 바람에 쓸려가는 조개나 굴이나 해태처럼 그렇게 되는 것일까? 하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보면서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아,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바지락을 잡던 농장은 아직 보이지도 않았다.


# 해태양식장에서 떨어져나온 돌김


이럴 수가 있는가. 거센 바람 속을 어렵게 ‘해찰’까지 해가며 걸었다고는 해도 내 걸음이 결코 느리지는 않았다. 바람 속을 걷다 보니 긴장감이 더해져서 오히려 빨랐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바지락 농장은 보이지도 않는다. 이렇게도 먼 거리를 트렉터가 없었던 시절의 바지락 농사꾼들은 걸어서 다녔다. 빈 지게를 지고 걸어 들어가서 바지락을 캔 다음 그것을 다시 지게에 지고 밖으로 나왔다. 맨 몸으로 걷기도 힘에 겨운 갯벌을, 지게에 잔뜩 바지락을 지고 바람 속을 휘청거리며 두 시간도 넘게 걸어서 나오곤 했다는 얘기였다.

불현듯 내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거센 바람 탓이었을까? 바람에 섞인 모래가 눈으로 들어갔던 것일까?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멀리서 경운기 한 대가 마을 쪽으로 고개를 튼 자세로 달리고 있었다. 굴을 따러 나왔었거나, 아니면 바지락 종패 뿌려놓은 것이 바람에 무탈한지 확인하러 나왔던 사람일 것이었다.

여기저기에 몇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앉아 있던 갈매기들이 한두 마리씩 허공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잠시 뒤에 갈매기는 하늘을 까맣게 덮은 듯이 무더기로 날아올랐다. 이것은 뭔가. 밀물 시간이 되었다는, 물이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니 신호라기보다 그들의 식사 시간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래, 갈매기들은 그렇게 산다. 물이 들어오면 그 물을 따라서 들어오는, 아니 들어온다기보다 물에 쓸려오는 어린 물고기들이 있다는 것을 갈매기는 안다. 그 어린 물고기들이 없다면 갈매기들은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야말로 물밀듯이 들어오는 밀물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는 두 시간이 넘었지만, 나올 때는 두 시간이 채 안 걸렸다. 들어갈 때는 이것저것 많은 것들에 관심을 쏟았지만, 나올 때는 마음이 바빴던 것일까, 그저 걷기만 했다. 아마도 밀물에 잡히지 않겠다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겠다는 긴장감 때문이었으리라.

밖으로 나온 뒤에는 다시 ‘해찰’을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길 옆쪽으로 염전이 있었다. 3월부터 일을 시작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들러보았지만, 염전은 아직 겨울잠에서 깨지 않고 있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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