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만질 수 없는 엄마에게 쓰는 편지 스물다섯 번째



# 고인돌박물관쪽에서 보는 옛 매산마을


엄마!
정월도 가고 이월도 가고 삼월이 왔는가 싶더니 벌써 흘러가고 있어요. 3월, 음력으로 3월, 이 계절이면 엄마가 참 많이 바쁘곤 했었는데 지금은 어떨까. 응? 그곳에서도 여전히 바쁠까? 그곳에서도 여전히 제수음식을 장만하느라 열흘도 전부터 이것저것 준비하고 고민하고 의논하고 장을 보러 다니느라 밤낮으로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까?

그래요. 매년 돌아오는 그날이 금년에도 어김없이 왔어요. 산에는 산벗꽃이 화들짝 놀란 것처럼 피었고요. 진달래는 언제 그렇게도 많이 피었는지 모르게 피었다가 벌써 지고 있더군요. 밤에는 소쩍새가 돌아가신 엄마를 부르는 아이처럼 비통한 소리를 내고 있고요. 아침에는 박새며 동박새 같은 작은 새들이 가시덤불 사이를 뛰듯이 날아다니며 재재재 소리를 내고 있고요. 낮에는 까치와 어치와 때까치와 참새들이 마치 무슨 올림픽 게임이라도 하듯이 서로가 잘났다고 제 목소리를 내며 요란을 떨고 있지요.

금년에는 봄도 참 봄 같지가 않게 아주 이상한 형태로 오고 있지만 살아 있는 것들은 작년이나 별 차이가 없이 움직이고 있더군요. 밤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도 꽃들은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는 듯이 의연하게 피어버리고 있고요. 한겨울에나 있음직한 바람이 매차게 귀뺨을 때리며 불어와도 무덤가에 고사리는 그 가녀린 고개를 숙인 채로 올라오고 있더군요.


# 공원관리소에서 제공한 카트


그러고 보면 오직 사람만이 날씨가 수상하다며 갈팡질팡 하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하긴 사람이 자연 속에서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요.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소나무나 은행나무 혹은 느티나무에 비하면 사람의 수명은 턱도 없이 짧고요. 기술과 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했다고 큰소리 뻥뻥 치지만 그 기술과 문명이 진정으로 무엇을 위함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지요. 아아, 엄마의 아들이 지금 뭔가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일까요? 그런가 봐요.

“아이 참, 그 많던 고모들 다 어디 가버리고 둘만 남은 거여, 어?”
시제를 모시던 그날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지요. 오랜만에 상면한 고모 두 분이 서로를 껴안은 채로 그만 죽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붙어 앉아서는 떨어질 줄을 모르는데 말이에요. 큰댁 작은댁 해서 열세 분이나 되던 고모들이 이제 달랑 두 분만 남아 계시다는 것을 그때 문득 깨달았던 거예요.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렇게도 이상한 소리가 내 입에서 그냥 뭔가가 터지듯이 튀어 나오더라고요.

그래요. 죽는 줄을 알면서도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인간이란 그렇게도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고 틈만 나면 입버릇처럼 말은 잘 하지만 엄마의 아들은 아직도 이렇게 철부지 소년티를 못 벗고 있어요. 아니 어쩌면 영원히 소년인 채로 살고 싶은 욕망이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긴 하지요. 그런데 고맙게도 고모들은 나를 어른으로 대해주시는 게 아니라 세 살이나 다섯 살쯤의 아이로 대해주신단 말이거든요.


# 관리소 직원이 제수음식을 실어다주고


“아이 수복아, 아따 이 써글놈아 내 말 좀 들어보란 말이다.”
아, 어른들의 이런 말투가 나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하지만 나를 이렇게 대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오직 고모들만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시는 거예요. 내리 딸만 태어나던 집안에서 아들을 보게 되었다고, 그래서 열세 명이나 되는 고모들이 서로 자기가 사내아이를 업고 놀겠다고 우기고, 싸우고, 땡깡을 부리고 등등 난리를 피웠었다지요? 그래요. 지난 세월 동안 사내로 태어났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받아야 했던 호강과 호사에 관한 이야기를 참 많이도 들었지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이 수복아, 너는 이놈아 작은할아버지 산소에 가면 절을 스무 번씩 해야 한다잉? 알았지야?”
엊그제 서울 손녀딸 집에서 팔순잔치 상을 받고 내려오신 복례고모가 그러시더군요. 그러자 갱순이고모께서 고개를 아주 크게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치고, 그때부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지요.
“너는 이놈아 작은할아버지 아니었으면 폴새 얼어 죽었어야. 그런 줄도 모르고 썩을놈이, 그 동안은 성묘도 잘 안 가고, 그랬었지야?”

내가 태어나던 무렵에 아버지가 군대에 계셨다지요? 친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그보다도 전에 돌아가셨고, 그래서 엄마 혼자 아들을 젖 먹여 키우는데 겨울이면 그렇게도 추웠다지요? 그래서 작은할아버지가 한겨울의 눈 속에 지게를 지고 솔가지 같은 땔나무를 해다가 마당에 부려주며 “아나 이놈 때서 수복이 저놈 안 춥게 해라” 하셨다지요? 어쨌든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요. 엄마도 그런 얘기는 안 해주셨으니까요.


# 여기서부터는 산속으로 각자 하나씩 짐을 메고 올랐다.


처음 듣는 그런 이야기를 접하고 나니 불현듯 뭔가가 애달파지더군요. 이제 달랑 두 분만 남아 계시는 고모들이 쇠약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옛날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싶다는, 들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것은 뭐랄까요. 달랑 두 분만 남은 고모들마저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갑자기 느껴버린 탓이었겠지요.
그래요. 갱순이고모나 복례고모나 시제에 참석하신다고 오시기는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일가친척들에게 얼굴이나 보여주러 오신 거였어요. 왜냐하면 산소에까지 함께 가실 체력이 없으니까요. 삼년 전까지만 해도 함께 가시곤 했는데 이젠 몸이 말을 안 들어주는 거예요. 특히 갱순이고모가 엄청 쇠약해 지셨더군요. 하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지요.

서울특별시 하고도 그 유명한 성산동 모래내 시장에서 생선이며 야채 같은 좌판 장사로 웅크리고 앉은 채 청춘과 중년을 모조리 보내버렸으니 오죽할까 싶더라고요. 사람이 세상을 살면 얼마나 산다고, 백 년도 못 사는 운명을 타고 나서 무슨 화창한 미래를 보겠다고 그렇게도 징글징글한 고생을 해야만 했던 것인지, 그것 참, 그래도 명색이 막둥이 고모인데 말이에요. 그렇게도 이뻤던, 그렇게도 이뻐서 모두가 한입으로 부러워했던 막둥이고모가 그런 험한 세월을 견디게 될 줄이야 누가 어찌 알았겠어요.

그렇다 해도 어쨌든 제사를 모시는 날은 즐거운 날이었지요. 일년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고모와 누나와 동생과 조카들이 있는데 우울 같은 것이 어떻게 끼어들 수 있겠어요. 옛이야기는 슬프다 해도 웃음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오늘의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우울하다 해도 그런 티는 하나도 안 내고 무조건 재미있는 소재만 골라내자는 무언의 약속이 되어 있는 법이니까요.


# 날씨는 추워도 고사리는 나오고


그러고 보면 제사란 그런 날인 것 같기도 해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먹고살기 바빠서 보고 싶다는 말조차도 못하고 묵묵히 각자의 세월을 견디던 일가친척들이 오랜만에 만나서 아무런 격의 없이 그냥 팍팍 웃어보는 것, 그러니 제사란 결국 명실상부한 축제가 되는 셈이겠지요. 그래요. 우리는 그렇게 웃고 떠들다가 마침내 길을 나섰지요.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침 아홉 시.

고인돌공원 관리사무소 측에서 트럭 한 대와 카트 한 대를 보내 왔더군요.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가 직접 우리 차에 제수음식과 사람을 태우고 들어갔는데 금년부터는 그게 안 된다네요. 공원지역 내에 관리자용 차량 외의 차량은 일체 진입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관리자들이 직접 음식을 실어다 주고, 사람도 태워다 주기로 했다는데 그것 참, 기분 묘하더군요.

할아버지가 이십칠 세에 과거 급제를 하셨었다지요? 고종황제 시절에는 궁내부대신과 서한 교류도 있었고요. 한일합방이라는 역사적 모욕의 시절을 거친 뒤에는 이른바 야인이 되셨지요. 적당히 타협을 하셨다면 지금쯤 그 후손들인 우리가 이 사회의 철면피한 주류가 되어 있겠지만 할아버지는 가난한 서당 훈장을 택하셨어요. 그것도 번듯한 집 한 채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장돌뱅이 같은 훈장,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선택하신 게 지금의 고인돌공원 지역이었다지요.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크고 작은 바위들만 흩어져 있을 뿐인 산 속에서 할아버지가 그때 보신 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할아버지 4형제는 그렇게 새로운 마을 하나를 건설하셨지요. 마을 이름은 할아버지의 아호인 매은(梅隱)에서 빌린 것으로 추정되는 매산(梅山). 따지고 보면 사방이 온통 무덤뿐인 그곳에서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었지요. 세상 어느 아이들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며 새처럼 토끼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었으니까요.



# 제수음식을 차리기보다는 각자 기분에 취해서~


생각해보면 그래요. 무덤을 놀이터로 삼고 살아온 아이들이 얼마나 있겠어요. 놀이 시설로 말하자면 고인돌만한 것도 아마 없을 거예요. 거대한 바위를 타고 오를 때의 기분도 그렇지만, 거대한 바위 아래 뚫린 구멍으로 쏙 들어가서 만화책을 읽고 있을 때의 기분은 지금 상상만으로도 오싹하게 짜릿해요. 은근히 무서우면서도 좋은 것. 아이들의 세계란 그렇단 말이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숨어있을 만한 곳이 필요하단 말이거든요. 그런데 고인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산이면서 동굴이기도 하단 말이거든요.

그랬던 고인돌이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된 거예요. 가까이 가서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올라가볼 수도 없고, 들어가볼 수도 없고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해야 할 곳이 된 거예요. 더불어 그 주변에 산소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이제는 함부로 마음대로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된 거예요. 이쯤 되면 기분이 그냥저냥 예사로울 수만은 없는 것이잖아요.

“아따 이것 참, 우리가 시방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확실한디 말이여 잉?”
특별대우, 그것은 그렇지요.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확실했지요. 공원 관리자들이 타고 다니는 카트를 타고 공원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말이에요. 아이들은 신이 나서 깔깔대고, 어른들도 생각은 복잡하지만 일단은 신기한 경험이라고 히죽히죽 웃어대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지요.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끝내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군요. 말이 좋아서 빗방울이지 사실은 뭐 이슬비 수준이었어요. 그렇다 해도 마음이 조급해지는 건 또 어쩔 수가 없었지요. 무엇보다 음식이 비에 젖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어른들의 심사야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아주 살판이 났지요. 여기저기 피어 있는 꽃들을 가리키며 저게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는 학습형 아이가 있는가 하면 이것저것 마구 셔터를 눌러대는 예술가형(?) 아이도 있고 말이지요.

드디어 산소에 도착하긴 했지만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더군요. 아이 어른 가릴 것이 없이 모두 바람이 들었다고나 할까. 빗방울이 듣고 있는데도 음식 차릴 생각은 안 하고 저마다 취향대로 딴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멀리 바라보이는 들판을 향해 심호흡을 연거푸 하는가 하면, 고사리가 나왔다고 그것을 꺾으러 다니기도 하고 등등 그야말로 제멋대로들이었지요. 마침내 우리 집안의 최고 어른이신 당숙께서 한 마디 하셨지요.


# 오랜만에 만난 고모들의 정담


“아따 믓들 허냐, 비오는디 얼른 허고 가자 아.”
일기가 참 묘하기도 하더군요. 비가 올 것도 같고 안 올 것도 같고, 연한 이슬비가 어느 순간 요란한 소나기로 변할 것 같기도 하고 완전히 그 반대일 것 같기도 하고, 잔뜩 흐린 날씨가 어느 순간 짠, 하고 햇빛을 드러낼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먹장구름을 몰고 올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날씨였어요. 그런 속에서 즉흥적인 어떤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요.

비가 온다, 안 온다, 태양이 나온다, 안 나온다, 한 사람당 빗방울을 몇 개나 맞을 것 같으냐, 등등 벼라별 게임이 시작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쏴아, 소리와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거예요. “와따 이것이 머시냐”하는 감탄사와 외마디 비명 소리 속에서 허둥지둥 상이 차려지고 향불이 피어오르고 술잔에 술이 채워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것은 또 뭡니까. 놀랐지? 하는 투로 빗소리가 뚝 멈추더니 금방 햇살이 비쳐질 것 같은 날씨가 돼 버리는 거예요, 글쎄.

마치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식으로, 흐린가 하면 맑고, 맑은가 하면 다시 흐리고, 비가 내리는가 하면 그치고, 그쳤는가 하면 다시 뚝뚝 소리를 내며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썬득썬득 차가우면서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그런 하루였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그 모든 것을 엄마는 그곳에서 보고 있었을까?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엄마의 아들은 지금 그것이 가장 궁금하단 말이거든요. 꿈에라도 한 번 찾아와서 그런저런 얘기를 해주면 안 될까, 응?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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