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모쟁이를 하고 와서


# 현대식 지게

오랜만에 선운사로 나들이를 나섰다가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며칠 뒤에 모내기를 하는데 모쟁이를 좀 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필지가 아니라 모쟁이 작업만 하루 종일을 해야 하는 대농이었다. 우리 동네는 모내기가 대부분 다 끝났는데 소농도 아니고 논농사만 백 마지기도 넘는 집에서 뭔 소리인가 했더니 그게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금년은 봄이 오락가락 널뛰기를 지나치게 많이 했다고나 할까. 화사한 꽃이 피는가 하면 서릿발이 성성한 겨울이 마당을 점령하고 있었고, 지구가 곧 멸망한다더니 벌써 그때가 되었나 해서 우울한 심사로 밤을 새고 나면 죽어가던 꽃이 다시 화사하게 입을 열고 봄, 봄, 하다가 또 며칠 뒤에 서리가 내리는 식이었다. 그 바람에 적잖은 농민들이 농사 일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허둥거려야 했다.

농촌에서 농사란 역시 벼농사를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쌀값이 똥값이라 해서 벼농사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 사람에게는 낫도 단단하고 우직한 조선낫이 손에 익더라고, 아직은 고기나 밀가루 음식보다는 쌀밥이 위장을 편하게 해주는 민족이고 보면 쌀농사를 빼놓고 농사를 말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쌀농사를 지으려면 일단 못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볍씨를 한곳에 수북하게 부어서 일정한 크기로 키운 뒤에 옮겨심기를 한다는 것쯤이야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요새는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조차도 체험학습을 통하지 않고는 모르는 사람이 제법 많다. 어쨌든 못자리를 하려면 날씨가 고르게 좋아야 한다. 낮에 아무리 따뜻해도 밤에 서리가 내린다거나 해서는 싹이 튼 볍씨가 얼어 죽어버리기 때문에 안 된다.


# 트렉터에 실린 못판을 다시 자동차로 옮겨 싣고...


# 자동차에서 내린 못판을 이앙기에 옮기면...


그런데 밤에 서리가 내렸다. 얼음도 얼었다. 그런 이상한 봄날이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그 바람에 모내기를 일찍 하는 사람은 아주 일찍 했고, 늦게 하는 사람은 아주 늦어져 버렸다. 일찍 한 사람은 비닐하우스에 모종을 키운 까닭이고, 늦게 한 사람의 경우는 딱히 모종을 키울 만한 비닐하우스가 없었거나 비닐하우스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거나 혹은 농사가 너무 많아서 비닐하우스에 의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에 모종을 키우면 때 아니게 내리는 서리나 얼음을 피해 쑥쑥 자라날 수 있지만, 비닐하우스가 아닌 노지에 직접 못자리를 만들면 그야말로 풍찬노숙이어서 때 아니게 내리는 서릿발을 피해갈 길이 없다. 얼병이 든 볍씨가 악취를 풍기며 곯아터지기 일쑤고, 살아남은 것도 느닷없이 변해버린 밤의 쌀쌀한 공기 속에서 갖은 고생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성장이 더디기 마련이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혹은 견뎌내고 살아남은 모종을 이제 드디어 본바닥으로 옮겨 심게 된 그날, 복도 많게도 내가 그 현장을 직접 두 발로 뛰게 된 것이었다.

사실로 그날은 내가 참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아침 여섯 시 삼십분에 집을 나와서 현장에 도착한 시간이 일곱 시. 그리고 일이 끝나서 집에 돌아온 시간이 밤 아홉 시였다. 오는 시간 가는 시간 한 시간을 빼고 점심과 간식 먹는 시간 사십여 분을 또 빼고 나면 얼마가 남나? 어쨌든 그 남은 시간, 그러니까 적어도 열두 시간 이상 열세 시간 가까이를 뙤약볕이 쏟아지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들판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노동을 한 셈이었다. 이런 일은 내 개인적으로 유례가 아주 전혀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진귀한 체험이랄까 공부를 한 셈이 되는 거였다.

돌아보면 그랬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그런 중노동의 경험이 내게는 없었다. 오래 전 건설공사 현장에서 사흘 동안 내리 철야작업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손에 쥐어지는 현금이 하루 일당의 다섯 배였으니까 딱히 중노동이랄 것조차도 없었다. 게다가 건설현장 철야작업은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 아니라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작업이었다.


# 칠십 마지기용 못자리


# 하루 오십 마지기를 처리한다는 8조식 이앙기


그러고 보면 농사란 사람이 자율적으로 선택 가능한 부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아예 안 한다면 모를까, 일단 그 일에 손을 댔다 하면 상황이 시키는 대로 따라 움직여야 한다. 오늘 일은 몇 시에 끝나겠다거나, 끝내야 한다는 따위 계산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다 보면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게 오후 두세 시쯤 일이 끝나 버리기도 하고, 또 하다 보면 뭐가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 알 수도 없는 채로 해가 져서 어둠이 칙칙하게 내려오는 시간까지도 일에 파묻혀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게 농사다.

하루 열세 시간 가까이 노동을 했다고 해서 시간외 수당을 요구하는 농사일꾼은 없다. 시간외 수당을 요구하기는커녕 그날의 일이 잘못되지 않았는지를 주인보다 먼저 걱정하고 나서는 게 농사일꾼의 품성이다. 빠듯한 일손으로 저녁 어스름 무렵까지 서둘러 처리해 버렸으니 그 과정에서 혹시 빠진 대목은 없었는지, 지나친 것은 없었는지 등등 세세한 부분을 걱정하고 나서는 것은 그날 하루 고용된 농사일꾼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이다.

주인은 그런 걱정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늦게까지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어떻게 대접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비슷한 말을 반복하면서 밥상을 차려내거나 막걸리를 권한다. 그러면 그날 하루 고용된 농사일꾼은 어서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 하면서도 선뜻 돌아서지는 못하고 우물우물 하다가 그냥 자리에 앉아 버리고 만다. 이것을 딱히 무슨 자랑스러운 전통이라고 추켜세울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시간이 돈이라고 외치는 현대를 살면서도 농촌에서는 이런 인심이 아직 유통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날도 그랬다. 어둠이 짙게 깔릴 즈음에서야 일이 끝났으니 다들 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냉정하게 뿌리치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고, 술병과 술잔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 것인가. 마음이야 벌써 전에 집으로 가 있었다 하더라도 몸은 일단 밥상 앞에 앉혀야만 했다. 그리하여 주인은 한 번 더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인사말을 하고, 객들은 저마다 한두 마디씩 모내기와 관련된 추억담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 못판을 가득 싣고 출발하는 승용이앙기


# 트렉터에 못판을 일단 가득 싣고


과거의 이야기란 실로 오묘한 힘을 내장하고 있기 마련이어서, 듣는 사람들은 한 마디 말에서 열 마디, 스무 마디 상황을 유추해내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폭소를 터뜨리기 마련이다. ‘그때 그 시절’을 정확하게 일치된 환경으로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아, 너는 그때 그랬구나, 나는 그때 이랬는데’하는 정도의 정서적 공감대를 갖추고 있는 게 사람이고 보면, 지난 시절의 이야기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든 사람의 삶을 위로하고 위안하며 활력을 주게끔 되어 있다 해도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시간은 짧았다. 삼십여 분 정도 쯤이나 그렇게 저렇게 저마다의 모내기 경험담을 풀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헤어졌다. 딱히 무슨 결론을 내자는 이야기도 아니었고, 결론을 낼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돌아오면서 생각해보니 하나의 결론의 나와 있었다. 지금보다는 옛날이 훨씬 좋았었다는 것.

아, 옛날이여! 하고 지난 시절을 애타게 부르는 유행가도 있거니와, 어떤 시대 어떤 환경을 살더라도 사람은 당대의 삶이 힘들다고 여겨지게끔 되어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발전, 발전, 눈만 뜨면 발전을 얘기하면서도 그 발전과 인간 자신의 행복을 등치시키지 못하는 함정 혹은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일까? 그렇다 하더라도, 모내기 하나만을 놓고 보자면 지금보다 옛날이 훨씬 좋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무엇보다 옛날의 모내기 현장에는 노래가 있었고, 춤이 있었고,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질펀한 농담 그리고 청하지 않은 손님들이 물고 오는 새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사라진 농악대의 깃발과 고깔, 각종 타악기의 두드림 소리는 그 얼마나 청아하게 사람들의 흥을 끌어내었던가. 지나가는 거지와 한량들이 몰려와서 한두 잔씩 마신 막걸리의 흥취로 뽑아내는 육자배기 가락은 또 그 얼마나 애틋하게 혹은 흥겹게 낭만적이었던가.

사내아이들이 처음 술을 마시는 것도 모내기 현장이었다. 현장에서 어른들과 어울려 농담처럼 한두 모금씩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지만, 대개는 술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혼자서 술을 배웠다. 자전거도 귀하던 시절에, 술파는 곳이 멀리 있다 보니 그날 주문한 막걸리가 모자랄 경우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적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왕복하는 동안 아이는 목이 마르고, 그러면 손에 든 주전자 꼭지를 입에 대고 한 모금, 두 모금 자신도 모르게 마시게 된다.


# 한쪽에서는 써래질이 한창이고...


# 김밥과 음료로 이루어진 현대식 간식


그 시기의 어른들은 아주 자주 골탕을 먹었다. 대담한 아이는 자기가 오면서 마셨다고 아예 실토하면서 줄어든 막걸리 주전자를 내놓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가 마셔버린 만큼의 술을 도랑의 물로 채워서 가져가기 때문에, 어른들은 싫거나 좋거나 물 탄 막걸리를 마셔야 했다. 드물게는 아이가 아예 중간에서 술이 취해 잠들어 버린 탓에 막걸리를 기다리던 어른들이 아이들을 찾아 나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그렇게 어른들을 골탕 먹였다 해서 어른들이 아이를 징계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허라 이놈 봐라, 이놈 봐라, 하는 소리와 함께 저마다 각자의 술과 관련된 추억을 끄집어낼 뿐이었다. 막걸리 주전자에 물이 차 있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아이가 술이 취해 곯아떨어졌으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되고 웃음의 소재가 되어 인생을 활기차게 해주는 것이다.

현대식의 손익계산으로만 따지고 들자면 도무지 계산을 어떻게 해야 옳은지조차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산다는 것의 기쁨이 있었다고나 할까. 노동이 노동 같지가 않고 유희로 인식되는 마술이 옛날의 모내기 현장에는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바쁘다고 아우성을 치면서도 농담이나 육자배기 한가락 등의 딴 짓을 할 정도의 넉넉한 정신이 있었던 셈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모내기는 아주 규격화되었고 산업화되어 있다. 못자리에서 모판을 들어내는 것부터가 이미 예사롭지가 않다. 옛날에는 지게로 어린 모를 져서 날랐지만 지금은 트랙터와 트럭이 동원된다. 트랙터에 철제 박스를 장착해서 모판을 한가득 싣고 논두렁으로 일단 끄집어낸 다음 트럭에 옮겨 싣고 가서 이앙기에 넘겨주면 이앙기 기사와 조수 그렇게 두 사람이 하루에 오십 마지기 가까이를 심어 버리는 방식이다.  

작업이 그렇게 규격화되어 있다 보니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별로 없다. 간식도 십여 분 내로 끝나 버리고 식사 시간조차도 삼십 분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웃을 일도 거의 없지만 있다 해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 게 아니라 저마다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며 피식, 하고 간단하게 바람 빠지는 소리나 내고 만다.

무엇보다 예전의 못자리에서는 사람이 툭하면 넘어지면서도 그나마 걸어 다니는 데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바닥이 말랑말랑해서 발등이 빠지는 경우는 있었어도 무릎까지 잠기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요즘의 못자리는 무릎 정도가 아니라 허벅지까지도 쑤욱 들어가 버린다. 트렉터가 그 커다란 바퀴로 좌로 우로 마구 휘저어놓는 까닭에 완전 시궁창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계화농법 이후 능률은 옛날에 비해 스무 배 이상 향상되었지만 사람의 삶은 팍팍해졌고 심심해졌다. 스무 배 이상 높아진 능률은 그렇다면 무엇을 위함인가 하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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