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잡동사니농법 상반기 농사 결산



# 입구에서 본 마당


보름 전에 매실 수확을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나무에 달린 열매가 솔찮다. 그것을 손으로 따다가 간짓대로 투덕거려서 모아놓고 보니 커다란 바가지로 한가득이다. 이것을 저울에 달아보면 족히 오 킬로그램은 되겠다. “어따야 이것이 다 머시다냐?” 그것 참 신통방통 오방통한 일이어서 입이 절로 찢어진다. 차제에 금년 상반기, 그러니까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삼개월여 동안 텃밭에서 거둬들인 열매와 푸성귀들을 가늠해 보기로 했다.

우선 매실로 치자면 그것이 자그마치 사십 킬로그램 이상이었다. 열매를 바라고 심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꽃이나 보자고 심은 것이 이듬해 열매를 맺기 시작하더니 삼 년째에는 오 킬로그램 정도가 나왔다. 그 다음은 십 킬로그램, 이십 킬로그램, 그렇게 계속 늘더니 금년에는 무려 사십여 킬로그램이 나왔고, 그 중에 이십 킬로그램은 심지어 팔아먹기까지 했다.

뽕나무에서 열리는 오디는 또 어떤가. 뽕나무는 사실 내가 묘목을 사다가 심은 것도 아니었다. 자연이 내게 선물해준 것이라고 하면 다소 추상적인 얘기가 될까? 그렇다 해도 나로서는 그렇게밖에는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는 새에 어느 날 불쑥 개 집 근처에서 뽕나무가 나와 있었으니까. 아마도 새가 어디에서 뽕나무 열매를 먹고 날아가다가 대변을 봤는데 그것이 우리 집 마당 개집 앞에 떨어졌으리라. 그리하여 그 씨앗이 싹을 틔웠다. 그리고 뽕나무가 되었다.

처음에는 뽑아버릴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신기해서, 혹은 귀여워서 그대로 두고 가끔 들여다보았다. 삼 년째 되던 해이던가 열매를 맺기 시작하더니 그 이듬해부터는 아주 풍성해졌고, 금년에는 무려 삼십 킬로그램 이상을 따 내는 기염을 토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 절반은 설탕에 버무려 효소를 담갔다. 그리고 절반은 ‘담금주’라는 이름의 소주를 사다가 부었다. 이제 곧 오디주와 오디효소가 그 진한 핑크빛을 자랑하며 유리잔에서 찰랑거릴 것이다.


# 부엌에서 본 마당


# 감자꽃

다음은 자두, 자두 중에서도 맛나기로 소문난 피자두가 있다. 이 나무는 묘목을 사다 심은 것도 아니고 그냥 얻어온 것이다. 얻어다가 심은 이 피자두가 열매를 어찌나 오글오글하게 많이도 맺어놓는지 해마다 절반 이상을 어렸을 때 따내곤 했었다. 따서 누구를 주거나 효소를 담갔는데 금년에는 누구도 주지 않고 죄다 효소를 담기로 했다. 그 양이 족히 십 킬로그램 이상이었다. 나중에 익은 것을 따면 그 양이 아마 이십 킬로그램은 이상은 될 것이다.

그 다음은 딸기, 익는 대로 하나씩 따 먹는 재미가 일품인 딸기, 비록 개미와 새와 달팽이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아픔이 있기는 하지만, 아니 그래서 차라리 더욱 알뜰하고 살뜰하게 느껴지는 딸기, 이 녀석은 그야말로 익는 대로 한두 개씩 혹은 한 종지기씩 따 먹은 까닭에 그 개체수가 몇인지, 중량은 얼마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으니 그냥 우리 집에는 딸기도 있다, 하는 정도로만 말해두자.

작년 가을에 심었다가 금년 봄에 라면상자로 족히 다섯 상자는 뽑아낸 쪽파는 또 어떤가. 그뿐이 아니다. 아직도 열심히 뜯어먹고 있는 상치와 쑥갓 그리고 아욱이며 부추, 대파도 빼놓을 수 없는 작물들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는 엄나무와 두릅이 또 있다. 두릅이야 너무도 유명해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개두릅이라고도 부르는 엄나무는 엄나무백숙으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그 잎으로 장아찌를 담그면 그 맛이 그야말로 죽여준다. 아, 또 있다. 죽순, 6월이면 예리한 창끝처럼 불쑥 땅을 밀고 올라오는 죽순을 꺾어서 삶은 뒤에 잘게 찢어서 반건조시킨 것이 냉동실을 반이나 채우고 있다.

지금까지 열거한 품목은 금년 상반기의 결실일 뿐이고, 중반기에 수확이 예정된 품목을 열거하자면 대추토마토와 일반 토마토 그리고 가지와 고추와 오이가 이미 주렁주렁 열렸다. 고추도 한 종류가 아니라 오이고추와 일반 고추 그리고 꽈리고추와 청양고추 그렇게 무려 네 종류나 된다. 감자 꽃이 피었으니 이제 곧 감자를 캐야 하고, 피망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고, 참외는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호박은 아직 꽃도 피지 않았지만 장마가 끝날 즈음이면 그 커다란 꽃을 자랑하며 벌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 양귀비와 샤스타데이지의 조화


# 그야말로 주렁주렁인 피자두

그렇게 여름이 끝나고 가을도 깊어지면 고구마를 캐야 한다. 땅콩도 캐야 한다. 생강도 캐야 하고, 단감나무에 열린 단감도 따 먹어야 하고, 대봉 나무에 열린 대봉을 따서 곶감도 깎아야 한다. 그리고 금년부터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대추도 따야 한다. 아, 빠뜨릴 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마당의 습한 곳을 파서 수련을 심고 구색을 맞춘다고 풀어놓은 붕어가 그동안 새끼를 얼마나 많이도 까놓았는지 그야말로 물반 고기반이라서 이제는 매운탕도 좀 끓여 먹어야 한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내가 무슨 먹는 것밖에 모르는 걸귀 같은 느낌도 있고 해서 좀 억울하다는 생각조차도 든다. 그래서 변명 삼아 자랑을 좀 해 보기로 하자면 우리 집 마당은 사실 꽃밭이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온갖 종류의 꽃들이 마당을 알록달록 현란한 색칠을 해 놓는다. 정말이다. 오죽하면 교회를 가던 사람들이 뭔가에 홀린 듯이 마당으로 불쑥 들어와서 여유만만하게 산책을 하다가 주인을 보고는 그만 혼비백산해서 “아이쿠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들어와 버렸네요. 어쩌지요” 하겠는가 말이다.

아직 얼음이 녹기도 전의 이른 봄에 피어나는 튤립에서 늦은 가을의 국화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내가 얻어오거나 돈을 주고 사다가 심은 꽃의 종류가 글쎄 몇 가지나 되는지 나 자신도 이제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적어도 백여 종은 넘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국화도 한두 종이 아니라 여럿인데 그 중에 식용도 있어서 그것으로 만들어 마시는 국화차가 또 일품이다. 국화차를 언급하고 나니 둥글레와 어성초 그리고 인동초와 쟈스민과 흰민들레가 떠오른다. 모두 우리 집 마당에 있는 것들이고 생각날 때면 언제라도 내 손으로 차를 만들어서 마실 수 있는 품목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이백여 평 남짓한 텃밭에서 이루어진다. 이천 평이 아니라 이백 평 말이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힐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잡동사니 농법을 도입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 매실


# 매실이 항아리로 한가득

고구마 밭에 오직 고구마를 심고, 고추 밭에 오직 고추만을 심는 것을 일러 순수농법이라고 한다면, 2월에 감자를 심고, 5월에 감자 밭 사이사이에 고구마를 심는,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또 나팔꽃이나 코스모스 같은 꽃 피는 식물을 심는 것을 일러 잡동사니 농법이라 한다. 이 농법은 학술적으로나 농사 기법상 정리된 개념은 당연히 아니고, 내가 그냥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서 발견한, 혹은 터득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리 나쁘지는 않다.

보다 섬세하게 얘기하자면 이런 식이다. 3월에 튤립이나 히아신스가 피기 시작하면 바로 그 옆에서 수선화가 고개를 내민다. 수선화가 질 무렵이면 그 옆에서 오골제비꽃이 나오고, 오골제비꽃이 질 즈음이면 바로 그 옆에서 샤스타데이지와 양귀비가 꽃대를 내밀기 시작한다. 샤스타데이지와 양귀비가 한 달여 걸친 꽃잔치를 끝내갈 때쯤이면 엉겅퀴와 백합이 우렁차게 솟구쳐 오르고, 엉겅퀴와 백합이 한 송이 두 송이 져갈 즈음이면 글라디올로스와 비비추, 범부채, 도라지 같은 꽃들이 피어나고, 그 옆에서는 또 국화와 코스모스 같은 가을꽃들이 바톤터치의 자세로 무럭무럭 자라는 식이다.

그밖에도 이른바 잡초라고 불리는 온갖 풀들이 피어내는 꽃들이 양념처럼 여기저기 사방 도처에서 피고 지고를 되풀이 하니 그야말로 잡동사니 꽃밭이 되는 셈이다. 이 농법은 무슨 대단한 기술이나 기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한 가지 틀만 깨트리면 된다. 정원이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농사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우리의 저 오래된 견고한 틀을 깨트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것, 이것이 전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런 비판을 내놓기도 한다. 땅을 너무 혹사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착취하는 게 아니냐고. 이런 비판에 직면했을 때 나는 그저 웃고 마는 것이 아니라 “너 참 불쌍하다”고 한 마디 아주 큰 강펀치를 날려주곤 한다. 너무도 착하게 교과서스런 그의 인식이 나는 실제로 불쌍하게 여겨진다. 전지가위와 제초제 그리고 살충제로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정원과 농장이야말로 사실은 땅을 혹사시키고 자연을 착취하는 게 아닐까?

어떤 사람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흙 위에 두툼한 부직포를 깔아서 아예 잡초의 싹을 말려버리기도 버리기도 한다. 자연이란 태양과 바람과 공기가 어우러졌을 때 그 역량을 다할 수 있는 법인데 태양도 못 보고 바람도 못 쐬고 공기조차도 희박해져 버린 밀폐된 상태의 흙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깔끔 떨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깨끗해서 좋다고 말할 뿐이다.


# 군것질로도 그만인 오디


# 오디가 익어가는 풍경

사람의 손이 덜 탄 깊은 산에 들어가 보면 잡동사니 농법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 도라지와 원추리와 비비추와 생강나무와 싸리나무 그리고 소나무와 그밖에도 무엇무엇 수십 종류의 풀과 나무가 어울리는 풍경 말이다. 이들은 누가 관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거름을 주는 것도 아니건만 약속처럼 때가 되면 입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속에서 무엇은 약초이고 무엇은 나물이고 무엇은 잡초다, 라는 식의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독초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에게 이로운 약초가 되기도 하고 나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결국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온갖 법칙과 규범에 상당한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개똥을 모은다. 왜? 잡동사니 농법에 없어서는 안 되는 퇴비를 만들려고.

그렇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라는 온갖 식물과 나무들은 개똥을 좋아한다. 개 한 마리가 일 년 동안 생산하는 개똥의 양이 얼마인지 아는 사람 있을까? 나는 안다. 일 년 동안 모아놓은 개똥을 굳이 계량해보자면 아마 작은 트럭 한 대분은 될 것이다. 여기에 고구마 넝쿨이며 고춧대 같은 각종 식물들의 잔해를 섞어서 발효시키면 아주 훌륭한 거름이 된다. 생강 한쪽을 심어도 이 거름 속에 꽂아놓으면 한쪽이 스무 쪽으로 늘어나는 식이다.

개는 똥만 생산하는 게 아니다. 오줌도 생산한다. 똥은 내가 거둬들일 수 있지만 오줌은 그게 안 된다. 그렇다고 오줌이 그냥 땅으로 스며들고 마는 것은 아니다. 뽕나무와 키위 나무가 개 집 근처에 있어서 자동적으로 거름이 주어지는 형국이다. 얼마 전에 서울의 사촌이 집에 왔다가 뽕나무를 보고는 그만 기함을 했다. 무슨놈의 뽕나무가 저렇게도 크고, 무슨놈의 뽕나무가 저렇게도 많은 오디를 달고 있느냐는 거였다. 키위도 마찬가지다. 내 손으로 무슨 거름을 줘본 적이 없건만 아주 울창하게 자라서 열매도 씩씩하게 맺었다.

이런 식으로 마당을 관리하다 보니 마당에 달팽이와 지렁이가 지천이고, 연못에서는 도롱뇽과 다슬기가 기어 다니고, 다슬기가 있다 보니 우리가 어린 시절 개똥벌레라 불렀던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깜빡깜빡 수놓아주는가 하면, 아침이면 각종 새들이 날아와서 끼루룩끼룩, 뻐꾹뻐꾹, 등등 현란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해 주기도 한다. 자, 이만하면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게 살아볼 만한 것 아닐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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