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 범부채와 호랑나비


사랑을 하면 양 어깨에 날개가 돋는 줄 알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터무니없다면 터무니없고, 소박한 꿈이라면 소박한 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꿈속 같은 감상의 세월을 건너온 탓이었을까.

여름이면 마당에 봉선화 꽃이 마치 수줍음이 많아서 엄마의 치마폭 뒤로 숨어드는 아이처럼 잎사귀들 사이로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그렇게 피고, 또 피고, 자꾸 피어나는 것이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까지는 아니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 누군가 곁에 있어 저 꽃을 따다가 손톱에 꽃물을 들여주고 싶다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다가는 깜짝 정신이 돌아와서 혼자 피식피식 웃기를 얼마나 했었는지, 헤아린다는 게 미련스러울 정도로 많이도 그런 세월을 살아왔던 내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여줄 수 있는 사람을 지금 곁에 두고 있다. 그렇게 되었다.

몽실몽실 떠다니는 저 구름을 타고 다니면 어떤 기분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그래서 구름을 타고 다니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온 종일을 하늘의 구름만 쳐다보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는 여자, 그런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다.


# 지난 겨울 마술처럼 내게 온 그녀

아 그래,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다. 아니다. 천지간 세상 널리에 고백하고 자문을 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해야 옳을까?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기보다는, 육 개월 이상이나 흘렀으니 대체로 봐서 개념이 잡혔다고 보는 게 옳다고,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까?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건데 일찍이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엄중한 질문을 하게 한다. 너는 누구냐? 하는 그런 질문을.

답답하게 에둘러 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사실만을 토로하자면, 한 여인이 내게로 왔다. 같은 시간 같은 밥상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내 앞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발생한 사건인데도 나는 아직 이 경천동지할 만한 사실에 대해 믿음이 잘 안 간다. 새와 나비와 두꺼비와 도롱뇽과 반딧불이와 도마뱀 그리고 개구리와 지네와 온갖 꽃들이며 풀들이 엉켜서 살아가는 시골 살림이란 사실 날마다 경이롭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사람이, 여인이, 도시물이 잔뜩 들어 있는, 한눈에 척 봐도 흙이나 된장보다는 시멘트와 페인트와 빠리바케트 류의 빵부스러기가 어울려 보이는 숙녀가 얼추 아버지뻘이나 되는 사내꼭지 홀로 기거하는 움막으로 와서 살겠다는 것은 글쎄, 이 사건을 도대체 뭐라고 이름 붙여야 옳은 거지?

그래, 이것은 사건이다. 내 자신이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처음 생각이 연애의 탄생과는 거리가 영 멀었던 만남이었고 보면, 눈 한 번 깜짝할 새에 발생해서 무르익어버린 연애의 진행상태 앞에서 나는 다만 뜻밖이었다고, 돌발상황에 준하는 사건이었다고 밖에는 딱히 할 말이 생각 안 나서, 다소 무책임하다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서 사건이었다고 밖에는 일단 할 말이 없다고, 그런 변명 아닌 변명 한 자락을 우선 깔아놓기로 하자.


# 꼬마해바라기에 반해서~

이런 궁색한 변명 앞에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근거 하나를 붙여놓기로 하자면, 그녀는 십여 년 전에 나와 한 차례 만남을 가진 적이 있기는 했다. 그것도 단둘이는 아니었고, 연치가 한참 아래인 내 고향 후배 두 녀석과 함께, 그러니까 네 명이 함께 종로와 인사동 거리에서 막걸리를 마셨었다. 그 당시 내 계획으로는 후배 한 녀석과 그녀를 엮어보자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 다 소 닭 보듯이 딴 얘기만 하는 바람에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십일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나와 함께 마당에서 쪽파를 뽑아다가 다듬기도 하고 오이 피클을 만든다고 법석을 떨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일을 어찌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범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긴 칠팔 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한 번 있기는 했었다. 그때는 타인의 입장을 내 입장과 동일한 무게로 파악하는 사려 깊은 어머니가 옆에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의 반대로 일찌감치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반대의 이유로 내세운 명료한 논리와 그 설득력 강하게 부드러운 어투의 말씀을 나는 아마 잊을 수 없으리라.

“너 늙고, 병 들고, 죽어뿌리먼, 그러믄 너보다 머시냐 그 몇 살? 스물네 살이나 어리다고 했지야? 그렁게 너보다 스물너이나 어린 그 여자는 으찌게 된다냐?”

그 말씀을 듣고 내 얼굴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올랐던지. 그때는 그랬던 내가 지금은 아니다. 부끄러움이 아주 없지는 않고, 염치없음과 민망함 같은 것은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해서 고개가 절로 수그려지는 순간도 있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 안에서는 “어쩔 것이냐, 인생이란 것이 염치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하는 소리가 수도 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지극히 상투적이면서도 중압적인 단어 ‘운명’을 들먹거려 가면서 나 자신을 설득하기도 한다. 이것이 너의 운명이다. 여러 소리 말고, 주변의 눈치도 살피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라. 


# 손길


# 존재의 증명

그러면 나는 지금 기쁜가? 기쁘기는 하다. 그렇다고 마냥 기쁜 것은 아니다. 기쁘기만 하기는커녕 무겁다. 밀란 쿤데라 식으로 말하자면 견딜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나를 종종 숨 막히게 한다.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십여 년 이상 차이가 나는 여인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그 계기와 과정을 떠나서 어쨌든 과분한 행복이라고 말하는 게 온당하다 싶기는 하지만, 행복이 보통스럽지 않고 특별하게 과분한 탓으로 그 행복의 느낌 뒤에 오는 두려움과 어리둥절함 또한 결코 그 무게가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필요하게 된다. 너는 누구냐? 하는 질문이.

가슴에 손을 얹고 사실만을 말하기로 하자면 처음에는 사실 그랬다.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조용하게 살다가 때가 되면 죽을 곳을 찾아간다고 하는 코끼리처럼 가겠다고 생각해 온 나에게, 그런 내 팔자에 무슨 느닷없는 우렁각시가 출현한 것인가 하는 마음이었더랬다. 그런데 우렁각시 차원이 아니었다. 두 달여쯤 지난 뒤에 그녀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만일에 말이에요. 만일에 아이를 낳게 된다면 말이에요. 응? 그대가 기저귀도 갈고 잠도 재우고, 목욕도 시키고 재롱도 부려주고 등등 해야 할 것 다 해야 해요. 알았죠? 저는 아이한테 젖먹이는 것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책 읽고, 음악 듣고, 그림도 감상하고 등등 해야 할 일이 엄청 많단 말이거든요. 알았죠? 아아 참, 북도 배우러 다녀야 해요. 판소리 장단 맞추는 북 말고 그냥 북, 난타 같은 데서 두두두두 그렇게 쳐대는 북 말이에요.”

그러고도 한참을 더 뭐라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거의 듣지를 못했다. 어렸을 때 쌍둥이를 낳고 싶었다는 말을 그때 했던가? 그런 것 같다. 쌍둥이를 너무나 낳고 싶어서, 쌍둥이와 관련된 이야기만 들으면 귀를 반짝 세우고 경청했었다나 어쨌다나. 심지어는 군밤을 먹을 때도 쌍둥이 밤이 나오면 허겁지겁 감쪽같이 먹어치우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그저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도 그렇고, 그 아이의 젖은 기저귀를 내가 처리한다는 그렇고, 도무지 먼 나라의 낯선 사람들 이야기 같기만 해서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하나도 없이 멍청하기만 했다.


# 절구통 속의 노랑어리연

결혼도 그렇거니와, 아이도 역시 나와는 거의 무관하다 여기고 살아온 세월이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결혼은, 내가 아직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마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어떤 것으로 규정해 버리고 있었다고 하면 글쎄, 오만방자한 건방 그만 떨고 뒤비져서 잠이나 자라는 욕을 먹을까? 그렇다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고 선언한 어떤 소설가의 논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것이 내게 아주 일찍 들어와 있었다. 이 세상 모든 부부들이 그렇게 피 터지는 싸움을 하는 것인지 여부는 내가 아직도 잘 모르지만, 내 어린 시절의 주변은 그랬다. 사흘이 멀다고 싸우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밥상 날아가는 소리, 부부라는 게 그렇게도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원수지간인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철부지 어린 시절의 나는 참 많이도 하고 살아왔다.

그 뒤에 얻은 것이 아마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었을 것이다. 내가 설령 어찌어찌 해서 결혼을 한다 하더라도, 아이는 절대로 낳지 않겠다는 각오(?) 같은 것을 부지불식간에 하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에,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아이를 발가벗겨서 밖으로 내모는 부모들을 보면서, 인간이 아이를 낳는 건 용서받지 못할 악독한 범죄행위라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었다.

어린 시절의 그런 생각을 지금 뭐라고 규정해야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요새 흔히 쓰는 말로 하자면 아마도 트라우마쯤 되지 않겠나 싶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내가 직접 당한 고통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옆에서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괴로운 고통으로 느껴지면서 무슨 낙인처럼 기억에 꾹 각인되어 성인이 된 이후에까지도 선택과 행동의 방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서툴게 함부로 규정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로 그래서 내가 결혼에 그닥 관심을 안 가졌던 것인지,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사람들을 하나도 안 부러워한 이유가 정말로 그것 때문이었는지 여부는 나 자신도 뭐라고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결혼과 아이 낳기를 희망이라거나 미래의 비전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 왔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언제나 숨은 듯이 피는 봉선화

그랬던 내가 이제 조만간 아이를 낳는다? 아빠가 된다? 물론 그녀가 아이를 갖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에’라는 가정법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이미 아이를 낳아놓고 있는 것처럼 어깨가 무겁다. 무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날개가 돋아나는 듯이 가벼운 설렘이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 것인가. 그녀는 마술사인가?

집안을 둘러보면 확실히 무슨 마술사가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시장의 옷가게를 빼고는 일찍이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여성용 의류가 옷걸이에 걸린 채로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진귀한 풍경을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을 깜빡깜빡 해가면서 쳐다보고는 한다.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까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볼 때마다 달라 보이는 그 신기한 풍경을 마치 그림 감상이라도 하듯이, 혹은 난해한 독서라도 하듯이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이다.

여성용 의류뿐만이 아니다. 내가 신는 양말도 가지런히 예쁘게 개켜져 있고, 속옷도 그렇다. 공장에서 출고된 이후 한 번도 옷걸이 구경을 못해본 내 옷들도 보란 듯이 옷걸이에 걸려서 나를 문득문득 놀라게 한다. 뿐만인가. 화장실 수납장에 차곡차곡 개켜져 있는 수건들을 보라.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저렇게까지 가지런한 모양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도 못한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살아온 내 생의 말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범죄행위인 것일까. 아니라면 그녀가 정말로 무슨 마술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마술이라면 어서 빨리 풀리기를, 마술이 아니라면 어서 빨리 내가 정신이 돌아와서 이 사건을 사건이 아닌 인간 삶의 다양한 방식 중에 한 가지일 뿐이라고 그렇게 범상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그런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질 수 있게끔 노력하는 열정이 내 안에서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오기를…….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