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제 ‘재논란’



주요 그룹들의 `사외이사` 문제가 다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검찰 수사에서 국세청 최고위직에 대한 로비 사실이 드러난 CJ그룹이 구속된 허병익 전 국세청 차장 외에도 3명의 국세청 출신 고위직을 계열사 사외이사로 둔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CJ와 검찰 수사를 받은 SK, 세무조사 중인 롯데, 삼성과 현대기아차 등 국내 5개 대기업 그룹이 선임한 사외이사 중 국세청,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등 3대 권력기관 고위직 출신이 52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대기업들이 방패막이용으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업계와 국세청에 따르면 비자금 수사를 받고 있는 CJ그룹이 전직 서울지방국세청장을 포함해 지방국세청장을 지낸 고위직 출신 4명을 주요 계열사 사외이사로 선임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갑순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CJ제일제당에서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김재천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CJ오쇼핑, 박차석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CJ CGV에서 각각 사외이사로 일하고 있다.

이번에 금품 수수 혐의로 구속된 허병익 전 국세청 차장은 부산지방국세청장 출신으로 CJ헬로비전의 사외이사를 맡고 있었다. 오대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은 CJ지주에서 사외이사로 일하다 올 3월에 퇴임했으며 같은 시기에 SK텔레콤 사외이사로 옮겼다. 국세청에서 국세청 차장은 국세청장에 이어 서열 2위, 서울청장은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최고위직에 속한다.

현직은 ‘접대’, 퇴직 후엔 ‘영입’ 

CJ는 현직 국세청 고위직들에게는 거액의 취임 축하금이나 수백만원대의 골프 접대 등을 통해 세무조사 무마 로비를 벌이고, 퇴직한 고위직들은 사외이사로 영입해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셈이다. CJ그룹 사외이사에는 김성호 전 법무부 장관과 이동규 전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1급)이 포함돼 있는 등 국세청은 물론 검찰, 공정위 출신까지 망라돼 있다.

각 기업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올 1분기(1~3월)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삼성, 현대기아차 등 국내 최대 2대 그룹과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롯데, 검찰 수사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SK?CJ 등 5개 대기업이 영입한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 중 검찰 출신이 22명으로 가장 많았고, 국세청 출신이 18명, 공정위 출신이 12명 등이었다.

삼성과 SK?CJ는 검찰 출신이 많았고, 현대기아차는 국세청 출신이 많았다. 롯데는 검찰과 국세청 출신이 각각 4명으로 같았다.
5개 대기업 가운데 현대기아차에서 영입한 3대 권력기관 출신들이 19명으로 가장 많았다. 현대기아차는 국세청 출신을 사외이사로 가장 선호했다. 전형수 박찬욱 전 서울국세청장 등 국세청 출신이 8명이었고 정호열 전 공정위원장을 포함한 공정위 출신이 7명, 신현수 전 대검 부장검사 등 검찰 출신이 4명이었다.

삼성그룹은 송광수 전 검찰총장, 정진호 전 법무부 차관, 문효남 전 부산고검장 등 검찰 출신만 3명을 사외이사로 뒀고 공정위와 국세청 출신은 없었다.
SK CJ 롯데 등 3개 그룹이 영입한 3대 권력기관 출신은 10명으로 똑같았다. 공통점은 검찰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정위’ 출신도 영입

SK는 6명의 검찰 출신 고위직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었는데, 신현수 전 대검 부장검사는 현대기아차에 이어 SK그룹에서도 사외이사를 맡고 있었다. SK는 또 오대식 전 서울국세청장 등 2명의 국세청 출신과 주순식 전 공정위 상임위원 등 2명의 공정위 출신을 사외이사로 들여왔다.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롯데그룹은 검찰 출신 4명과 국세청 출신 4명 그리고 공정위 출신 2명이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정병춘 전 국세청 차장과 강대형 전 공정위 부위원장, 김태현 전 부산지검장 등이 눈에 띄는 고위직 인사들이다.
한편 재벌 및 CEO 기업 경영 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20대 그룹 사외이사 489명 가운데 법조와 국세청, 공정위 등 관료 출신은 192명에 달한다.

전체 사외이사의 39.3%를 차지하는 셈이다. 이는 법조와 세무, 공정위 등의 공직자를 아우르는 수치로 2개 이상 겸직자 20명이 포함돼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 SK그룹, CJ그룹, 롯데그룹, 두산그룹 등 5개 대기업에만 91명이 포진해 있다.
192명 중 47.4%가 5대 그룹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것이다. 그룹별로 살펴보면 현대기아차그룹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22명으로 가장 많고 SK그룹이 20명, CJ그룹은 18명, 롯데와 두산그룹이 각각 17명으로 뒤를 이었다.

삼성, ‘화려한 이사진’

업계 관계자는 “사정 기관의 수사가 이뤄질 경우 회사에 자문하거나 진척상황을 파악하는 정도이지 조사, 수사에 영향을 미칠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며 “더구나 요즘처럼 사정당국이 서슬퍼런 칼날을 들이댈때는 사외이사들도 오해를 살 수 있어 조심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재계의 사정기관 출신 사외이사 영입에 곱지 않은 시선이 적지 않다. 독립성과 객관성을 가져야할 사외이사진이 특정시기와 특정인맥에 따라 구성돼 이른바 ‘방패막이용’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지난 3월말 주주총회 기준 상위 20대 대기업의 법조계 출신 인사 비중은 3.8% 높아졌고 국세청과 공정위 비중도 각각 3.5%, 1.2% 높아졌다. 새 정부 초기 사정당국에 대비한 권력기관 출신 영입이라는 분석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기업은 만약의 사태에 대한 방패막이용으로, 권력기관 고위급 출신들 인사들은 한 번쯤 사외이사를 해보는 것을 개인적인 커리어를 쌓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며 “기존 사외이사를 통해 추천을 받아 새로운 사외이사를 영입하는 인맥 중심형 인사가 여전히 팽배해 있는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삼성그룹은 재계에서 가장 화려한 사외이사진을 갖추고 있다. 이인호 전 산업은행장, 김한중 연세대학교 총장, 송광수 전 대검찰청 검찰총장을 포함해 35명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권력기관 출신 이사들이 기업의 방패막이 역할을 할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어 보완책을 적극 주문해 왔다.
기업이 고액 연봉을 줘가며 이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한 이유는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나 로비스트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른바 전관예우 관행을 이용한 저비용?고효과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외이사들에게 경영진의 독단과 횡포를 견제하는 임무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최근 1년간 대기업 주요 계열사의 안건 5700여건 중 사외이사의 반대로 부결된 것은 36건, 0.63%에 불과했다. 유명무실한 사외이사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각에선 기업의 방패막이 역할이나 하는 사외이사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사외이사제가 바로 서지 않으면 기업의 투명한 경영도 바라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권력기관과 대기업의 공생관계는 ‘사외이사제’를 통해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를 강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범석 기자 kim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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