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게로 왔다 (두번째)




# 천사의 쌍나팔

장대비가 마구 쏟아지면 돗자리를 들고 숲으로 가자고 그녀는 내게 말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글쎄 몇 번이나 말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여러 차례 그런 말을 했었다. 한 자리에서 연거푸 말한 것도 아니고 며칠씩 사이를 두고 말했으니 즉흥적인 발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다소 과장을 하자면 일생의 소원이라 해도 그리 썩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장대비는 좀처럼 쏟아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빗방울이 몇 개 듣다가 말던 날 그녀는 속옷 차림으로 마당에 누워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 두 개를 마주해놓고 그 위에 앉은 듯이 누워서 두 팔을 쫙 벌리고 손바닥은 펴서 빗방울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그 모습이 흡사 커다란 나비 같았다. 날고 싶어 하는 나비라기보다는 뭐랄까, 나는 것도 이제는 그 비밀을 다 알아버려서 날기를 그만두고 뭔가 다른 것을 도모하는 나비 같았다.

방에서 창문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매우 깊은 놀람으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가슴에서 거창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아 이런, 이런, 내 집 마당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것도 여자가 저런 자세를 취하고 있을 줄이야. 그날 아침에 나는 아마 그녀의 모든 것이라기보다는 중요한 어떤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알았다는 느낌이었다고 말할까?

느낌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하나의 단어를 빌려 말하자면 아마도 해방, 혹은 해방감쯤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현관문에 자물쇠를 일곱 개나 설치해야 하는 서울의 그 벌집 같은 다가구 주택에서 그녀는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 것인가. 밖에서 집으로 들어갈 때도 전후좌우를 살피고, 집에서 밖으로 나올 때도 여기저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그래야만 하는,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서울살림을 칠 년 너머 십 년 가까이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비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녀와 둘이서 빗속을 신나게 마구 달린다면 무엇이 보일까? 무슨 새로운 영감이 발동해서 이 비루하게 험악하고 진부한 세상을 단숨에 걷어차 버릴 수 있을까? 비도 그냥 비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질 때만이 그 무엇은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장대비는 좀처럼 쏟아지지 않았다. 보슬비나 이슬비 혹은 가랑비만 잠깐씩 내리는 듯이 뿌리다가 그마저도 이내 멈춰 버리곤 했다.


#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아 그래, 비가 없었다. 물이 말랐다. 있는 물마저도 폭염으로 금방 사라져 버렸다. 마당의 화초가 시들어가서 물을 주면 서너 시간 뒤에 다시 시들어가는 식으로 세상의 모든 수분을 폭염이 압류해가고 있었다. 비 구경을 한 지도 벌써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일기예보에 비가 내리는 것으로 돼있다 해도 서너 방울 투둑, 소리를 내다가 그쳐 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기상청 웹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비가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원에서 고창의 형한테 장어를 사주겠다는 명목으로 내려온 동생의 말을 들어보니 그쪽에는 비가 참 아주 단골손님이 되었단다. 그것도 날마다 오는 단골이란다. 동생은 그런 얘기 끝에 한 가지 사례를 들려주었다. 어느 하루 밖에서 들어와 샤워를 하려고 하니 딸내미가 하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고. “아빠, 씻지 말고 그냥 주무세요, 수건을 벌써 며칠째나 못 말려서 하나도 없어요” 하더라나.

동생의 그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웃었다. 동생과 나, 그렇게 ‘우리’가 아니라, 그녀와 나, 그렇게 ‘우리’가 함께 웃었다. 그녀와 나. 우리. 이 단어는 너무나 알뜰해서 함부로 쓰기도 아깝지만, 요즘의 나는 마구 쓰고 있다. 너와 내가 손을 잡았을 때 발생하는 그 무엇으로서의 우리, 이것을 전문용어로 ‘상호침투’라고 한다던가? 상호침투거나 말거나 어쨌든 그 우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의 어감은 글쎄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하나. 일언이 폐지하고 달콤하다. 달콤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뭔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워서 허리 근처에 커다란 기둥이라도 갑자기 새로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어찌 아낄 수 있으랴. 어찌 낭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 비 올까요?”
그녀는 요즘 자주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오늘 날씨 어떨 것 같아요?”

몰라서 하는 질문은 아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누구라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꺼이 자꾸 그런 질문을 한다. 그런 질문이 무엇을 가져오는지, 무엇을 낳는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나도 알고 그녀도 물론 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실체가 아닐까? ‘우리’가 아니라면 그 어떤 관계에서 이런 뻔한 질문과 답변의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 이슬비 내리던  날의 나리꽃

우리가 함께 한 날이 얼마였나? 서로에 대한 익숙함으로 말하자면 한 삼십여 년쯤 흐른 것도 같고, 감각적인 회상으로만 보자면 서너 시간 정도밖에 안 된 것 같기도 해서 어리둥절하다는 느낌조차도 있지만, 달력을 펴놓고 들여다보면 육 개월을 넘어 칠 개월도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대번에 나온다. 아 그래, 어느새 반 년이나 흐른 것이다. 그녀와 내가 목소리를 섞어온 날이.

그러니까 지난 1월 초의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었더랬다. 갯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중에 팔목 인대에 이상이 생겨 병원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집 전화였다. 몇 년 전이던가. 보이스피싱에 한 번 당할 뻔한 뒤로 나는 가능한 한 집 전화를 안 받고 있었다. 받으면 어눌한 발음으로 검찰청입니다, 혹은 우체국입니다, 어쩌고 하는데 그때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회의 같은 것이 몰려들면서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집 전화는 집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용하기가 아주 불편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은 내 마음에서 무엇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인지,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향해 나는 뛰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한 번 통화를 했고, 약속을 했다. 만나기로.

무슨 바람이 불었던 것인지, 무슨 불꽃이 튀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수요일에 첫 통화가 이루어졌고, 금요일에 만날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 나는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서울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요일 오후부터 시간을 낼 수 있었다고는 해도, 무슨 그리 깊은 정이라거나 의리 같은 것으로 맺어진 인연도 아니면서 어찌 그리도 지금 당장 못 보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초조하게 서둘러댔던 것인지.

내가 서울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과 고창 사이의 어디에 장소를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고창으로 내려오는 방식의 만남, 약속이었다. 장소는 고창 버스터미널의 약속다방, 이 소박하게 촌스런 명칭의 다방은 유서가 아주 깊어서, 세월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느라 ‘다방’이 아닌 ‘휴게실’로 업종변경을 하긴 했어도 약속이라는 대의명분(?)은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는 곳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십 년 됐다고 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삼십 년도 넘었다고 하지만, 연륜이야 어떻든 만나야 할 사람들이 간편하게, 부담없이 만남을 약속하고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주인과 허튼소리를 나누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하여튼 멋대로 해도 괜찮을 만큼의 한가함과 나른함이 실내 전체에 퍼져 있는 곳이었다.


# 약속다방

그 약속다방에서 우리는 서로를 몰라볼 줄 알았다. 나도 그녀를 몰라보고, 그녀도 나를 몰라보고, 그래서 누구 한 사람이 곁으로 다가가서 “혹시 누구 아니세요?”하게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좌우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쭈뼛거리는 투로 다가설 필요도 없이 우리는 금방 서로를 알아보고 미소를 띠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에 ‘우리’는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고, 그녀가 나를 알아보는, 그래서 의례적인 인사조차도 차릴 경황이 없이 웃음소리부터 내고 있었던 그 순간에 우리의 내부에서 아마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발생하고 있었다고, 그것이 ‘우리’의 씨앗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 지형은 물론이고 외양에 대해서도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었다. 그녀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어떠한지, 키는 어느 정도인지, 공간 면적은 얼마인지, 전화기가 아닌 실생활에서의 목소리는 어떠한지 등등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있어 필요한 그 어떤 정보도 내 머릿속에 입력돼 있지 않았다. 그녀도 물론 나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의 시작은 그렇게 허술했다. 그리고 전적으로 우연에 기대어 있었다. 온라인이라는 거, 그 얼마나 엄청난 우연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 말이다. 십삼 년 전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시골에 집 한 채 구입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한 공사장을 찾아다니는 다소 팍팍하게 쓸쓸한 삶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쓸쓸함을, 밤마다 그 즈음 한참 열풍을 타기 시작한 인터넷 공간에 털어놓고 있었다. 그 중에 어떤 글을 그녀가 보고 댓글을 달았던가 어쨌던가, 하여튼 그리저리 어리버리하게 그녀와 나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한때의 유혹이었다고나 할까? 아니다. 지나가는 바람의 꼬리라도 잡듯이 뭔가 나름대로 절박한 마음에 댓글을 주고받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나이를 추론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농담처럼 “너는 내 친구의 딸내미 또래나 될 것 같은데 말얌. 이제부터 나는 너를 딸랑구라고 부를란다” 했더니 그녀는 즉각 “오케이 아방, 아방”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나의 딸내미 아니 ‘딸랑구’가 되었고, 나는 그녀의 ‘아방’이 되었다.


#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 카라

그리고 이 년쯤 뒤에, 나는 나의 ‘딸랑구’에게 애인을 하나 만들어주기로 작정하고 후배녀석 하나를 데리고 서울까지 그 먼 길을 갔었건만, 두 사람의 인연이 영 아니었던 것인지 씁쓸하게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로도 ‘딸랑구’와 ‘아방’의 대화는 간간이 계속되었다. 화나는 일이 생긴 날에는 화나는 일이 생겼다고, 기분이 쓸쓸한 날에는 쓸쓸하다고, 자주는 아니고 일 년에 서너 차례 정도, 이를테면 안부성 이메일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그것조차도 시나브로 끊어졌다. 그게 벌써 칠 년이나 팔 년쯤 전의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그녀의 존재사실 자체를 잊어갔다. 그녀 역시 나를 잊어갔다. 그녀는 남동생의 자살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앞에서 황망해 하느라 전라도에 있는 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나는 아들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이른바 중증치매 상태를 감당해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경상도 포항이 고향인 그녀를 생각해본 적이 터놓고 얘기하자면 한 번도 없었다. 하긴 서로가 그런 상황에서 아무 인연이랄 것도 없는 사람을, 그것도 나이 차가 이십 년이나 되는 사람을 무슨 오지랖이 그리도 넓다고 생각씩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드러난 결과만을 놓고 말하자면 우리는 잊었으면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만났고, ‘우리’가 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것을 대체 무슨 공식으로 풀어야 하는 것인가?

뭔가 낯선 것이 오고 있다는 느낌을 간간이 받고는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일 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날부터였다. 아무 특별한 일도 없건만 가슴이 설레고 손안에 뭔가가 쥐어지는 듯이 뿌듯한 느낌이 종종 나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것을 가령 어떤 예감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소설과 관련이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 때로는 호박꽃도 쌍으로...

내가 명색이 소설로 데뷔씩이나 해놓고 있었지만 그걸로 끝인 세월이 벌써 십칠 년이었다. 써야 한다는, 쓰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지만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게으름 때문에 번번이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소설 아닌 소설이나 끼적이다가 말다가 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오나보다, 소설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슬슬 풀리려나보다, 아하, 그러면 그렇지, 내 인생이 이렇게도 바싹 마른 장작개비처럼 끝나버릴 수는 없지, 아암, 등등 그런 쪽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 사람이, 그것도 여자가, 그것도 이십여 년이나 연하인 과거의 ‘딸랑구’가 성장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저기 어디쯤에서 오고 있다는 쪽으로는 글쎄, 도대체 사람 세상의 어느 누가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녀는 2012년을 보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하고 있었단다. 2013년의 첫째 목표로 과거의 ‘아방’을 찾아내서 만나는 것으로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찾고자 했는가에 대해서는 내가 차마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 부분은 어쩐지 보물 같아서 함부로 까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이기도 했었다. 하긴 그녀 자신도 아마 큰 틀에서는 몰라도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까지는 설명이 곤란했을 터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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