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2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우리 아들은 발달장애다. 정확히 말하면 지적장애. 다섯 살 몸뚱이에 돌쟁이 수준의 정신연령을 지니고 있다. 언어표현력은 생후 7~8개월 수준. 다섯 살 어린이가 열심히 옹알이만 하고 있는데, 내 눈엔 마냥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들이 자폐는 아니라는 것. 지적장애와 자폐가 동반되면 꽤나 골치 아플 뻔 했는데 고맙게도 사람을 좋아하고 잘 따르고 눈 맞춤도 잘한다.

매일 아이를 데리고 치료실을 다닌다. 밤에는 동네 산책을 한다. 아이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빼놓지 않는다.
밖에만 나가면 자지러지게 좋아하는 아이. 짧은 다리로 힘차게 뛰어다니고, 비둘기도 쫓아다니고, 주인과 산책 나온 개들을 따라 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간다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시선. 장애 아이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문득 상처받을 때가 있다.
아직 인지능력이 부족한 우리 아들은 사람을 가릴 줄 모른다. ‘타인과 나’의 관계가 정립이 되어있지 않은 것. 내가 좋으면 남도 좋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소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곤 한다.

우리 아들은 초등학생 아이들을 가장 좋아한다. 또래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데다 길에서 초등학생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자기와 ‘잡기 놀이’를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초등학생은 그냥 뛰어서 자기 갈 길을 갈 뿐인데 혼자서 깔깔거리며 도망갈 길을 찾는 내 새끼.



아줌마와 할머니도 좋아한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호의적인 세 여자. 엄마와 양가 할머니들의 따뜻함을 기억하고 있는 아들은 그 또래 모든 여자들이 다 그럴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길에서 초등학생이나, 아줌마, 할머니를 보면 무조건 다가가 손을 불쑥 만진다. 어서 자기와 잡기 놀이를 하자고, 먼저 도망가라는 신호다.

사람들 정면에서부터 다가가 손을 만지면 괜찮다. “왠 어린아이가 오고 있구나”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니까 최소한 놀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의 사정은 봐주지 않는 우리 아들. 눈에 띄지도 않는 옆에서, 뒤에서 불쑥불쑥 내미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 사람들은 “엄마야”하고 놀라기 일쑤다.

대다수 사람들의 반응은 놀란 다음에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 해준다. 아직 1미터 남짓한 작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하지만 열에 둘 셋은 그렇지 않다.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이상한 시선을 보내며 우리 아들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며칠 전 밤에도 그랬다. 집 앞에서 열심히 달리기를 하고 있던 우리 아들. 40~50대 중년의 아줌마 셋이 지나가자 어느 샌가 따라붙어 가운데 아줌마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

“꺅”하고 소리를 질렀던 아줌마는 자신을 놀라게 한 작은 존재를 발견하더니 “얘 뭐야!”라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자기와 잡기 놀이를 한다고 생각한 우리 아들은 활짝 웃으며 더욱 속도를 냈다. 아줌마를 잡으려고 두 팔을 뻗고. 그러자 그 아줌마는 “얘가 대체 왜 이래!”라며 버럭 소리를 지른 뒤 팔을 휘저어 노골적으로 아이를 밀어냈다.



잽싸게 달려간 나는 아이를 붙잡고 “죄송해요. 모습이 닮아서 작은엄마인 줄 알았나 봐요”라고 사과했다. 부모의 사과에도 거두지 않는 시선. 흡사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한 술 더 떠 아줌마 일당은 계속해서 힐끔힐끔 우리 아들을 쳐다보며 “애가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고 있던 신랑. 폭발했다. “작은 애가 잡아먹기를 해? 뭐를 해? 어디서 남의 아들을 벌레 보듯 보고 있어!”

매일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는 나는 자주 보던 풍경인데, 신랑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혹시라도 싸움 날까 조마조마. 다행히 아줌마 일당이 멀어져갔다.

이런 일이 한 번씩 있고나면 나는 우리 아들의 미래가 걱정이 돼 견딜 수 없다. 혼자서 살아가는 법은 앞으로 많은 교육과 반복훈련을 통해 배워나가면 되지만, 보통의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방법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막막해진다.
초등학교를 특수학교로 보낼까하고 서울 시내 특수학교 두 곳에 문의를 해본 적 있다. 두 곳 모두 갈 수만 있으면 특수학급이 개설돼 있는 일반 초등학교를 보내라 했다. 발달장애아들이 일반인들과 생활할 수 있는 게 사실상 초등학교까지가 마지막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얘기였다.

우리 아들이 제도적 장치의 보호 아래서 보통의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고작 7~8년 남았다는 얘기다. 물론 부모가 고집을 부려서 발달장애아를 일반 중고등학교에 입학시킬 수도 있지만 많은 수가 적응을 하지 못하고 특수학교로 되돌아온다고 한다.

게다가 초등학교 교육마저도 발달장애아들에게 활짝 마음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인 친정엄마의 반에도 발달장애 아이가 있다. 국어, 영어, 수학 시간에는 특수학급으로 이동해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 시간은 교실에서 보통의 아이들과 함께 한다.



친정엄마는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에 발달장애아를 계속 돌볼 수도 없는 상황. 다른 아이들이 진도를 나갈 때 그 아이는 그림을 그리거나, 엎드려 있거나, 지우개로 장난을 치거나, 4~5세 아이들이 하는 학습지를 하거나, 잠을 잔다고 한다.
교우 관계는 어떠냐고 묻자 선생님이 시키면 친구들이 그 아이를 화장실도 데려가고, 음악실로 같이 이동도 하고, 체육 시간에 함께 피구도 하지만 지속적이지 않다고 했다. 선생님이 시키는 순간에만 의무적으로 행하는 봉사활동처럼.

수업 과정에 장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 아이들의 인식을 바꾸고 장애아들의 사회성을 키워줄 특별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런 발달장애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 특수 학급이 모든 초등학교에 설치돼 있지도 않다. 

장담하건데 앞으로 발달장애아의 비중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취업난, 늦은 결혼, 늦은 임신, 노산, 그에 따라 늘어가는 쌍둥이 임신과 조산의 위험.
우리 아들도 그랬다. 칠삭둥이. 임신 7개월 때 조산한 우리 아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태어나 뇌출혈이 왔다. 피는 전부 흡수되었고, 뇌 MRI 결과 특별한 이상도 없었지만 후유증이 왔다. 인지가 느려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공존’이다. 공존하지 못하면 일반인도 장애아도 전부 불행해질 수 있다. 우리 아들이 내미는 손에 흠칫 흠칫 놀라고 거부하는 사람들.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 역시도 그랬으니….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과 다르다고 해서 이 아이들을 끼리끼리의 울타리 안에만 가둬 나서도 안 된다. 장애 아이들에게 일반인과의 ‘공존’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 그것이 바로 일반인들이 잘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하기에.

실제로 발달 장애아들은 뉴스의 사회면에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양상을 보니 남자 아이들은 가해자의 위치에, 여자 아이들은 피해자의 위치에 주로 서 있다. 발달 장애아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보면 ‘잘 몰라서’ 일 때가 많다. 자신의 욕구를 일반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지 모르기에 극단적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좋은 부모를 만나 여러 곳의 치료실을 다니며 열심히 발달치료를 받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배우는 발달장애아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필요한 교육을 다 받지는 못한다. 돈 때문이다.
발달 장애아를 둔 가정의 엄마가 직장에 나가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 옆에서 한 시도 떨어질 수 없어서다. 요즘 세상에 남편의 외벌이로만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도 빠듯한데 발달치료비는 비싸기만 하다. 나라에서의 지원은 간에 기별도 안 갈 수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매달 100~200만원은 투자한다고 생각해야 돼. 100만원 투자하면 나중에 4~5세 정도의 학습능력을 지니게 되지만, 200만원 투자하면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학습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말도 있으니깐”이라고 발달 장애아를 키우고 있는 선배 언니가 내게 말했다.

이런 실정이니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태어난 발달 장애아들은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성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아이들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할까?

중요한 것은 공존이라 했다. 일반인과 장애아가 공존하려면 함께 할 수 있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 서로를 알려면 옷깃이라도 스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 무대가 바로 학교다. 공교육이다. 초등학교 6년만으로 만족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특수학교에 끼리끼리 모여서 ‘혼자 살아가는 법’만 배우지 말고, 일반 학교에서 일반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법’이 어떤 것인가를 내 아이가 배웠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공교육, 학교라는 틀 안에서. 비록 우리나라 교육정책이 그렇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해선 회의적이지만. 적어도 내 바람은 그렇다.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