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5)



# 막내씨 여기 이 산삼도라지 먹어봐요.

추석 명절의 시작은 역시 벌초라, 벌초를 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참 많이도 얻었다. 인간이 힘을 얻고 살아가는 원리를 새삼스레 터득했다고나 할까. 자본이 세상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해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 동력은 역시 사람이구나 하는, 적어도 아직은, 아직은 그렇다, 라고 선언을 해도 뭐 그리 크게 잘못된 ‘오만방자’는 아니겠다 하는 자신감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큰 소득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조차도 얻었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인간의 마음이란 그 어떤 잣대로 따져본다 해도 오묘한 것이어서, 특수한 어떤 경우에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힘이 싹 빠져서 그만 다 포기해버리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경우에는, 그러니까 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누군가 한 사람이 나를 지켜봐 준다는,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의 지원병이라도 얻은 것처럼 힘이 불끈불끈 솟아서 그 어떤 힘든 일이라도 힘 드는 줄 모르게 게눈 감추듯이 해치워 버릴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벌초가 하나의 소풍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해보지 못했다. 소풍이라니. 벌초를 하다가 뱀에 물려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하고, 벌집을 건드려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는 보도가 한두 건이 아니고 보면 벌초란 결코 소풍길이 아니었다. 땔나무로 밥을 짓고 난방을 하던 시절에는 그나마 산에 길이라도 있었지만, 나무꾼이 사라진 요즘의 산은 그 앞에 도착하는 순간부터가 밀림이어서 벌초는 그야말로 비장한 각오가 없이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그런 벌초 현장을 그녀가 따라 나서겠다고 했을 때 나는 뭐랄까, 처음에는 놀라서 어리둥절해 하다가 조금씩 천천히 감격하는 마음이 되어갔고, 다음에는 뱀 꼬리를 밟으면 어쩌나, 벌집을 건드리면 어쩌나 등등 열 손가락을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걱정거리가 우수수 쏟아져서 불안에 빠져들었고, 그 다음에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온갖 잡동사니 생각에 치여 시간가는 줄을 몰랐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러니까 벌초를 진행하는 당일에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아무 거리낌도 없이 마치 천진한 아이처럼 웃어대고 떠들어대느라 배꼽이 빠져버린 줄도 몰랐다고, 이렇게 말하면 과장일까?


# 산도라지를 무더기로 발견하고~


# 적어도 5년 이상된 산도라지

여자는 벌초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런 금기, 혹은 불문율이 우리 집안에 내려오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무수히 흘러간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도 여자가 벌초에 참여한 적은 우리 집안에서 한 번도 없었다. 벌초라는 것은 당연히 아주 자연스럽게 남자들만의 행사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 일이 워낙 거칠고 위험해서 남자들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상과 관련해서 뭔가 비의 같은 것이라도 있어서인지, 등등 그 어떤 것도 우리는 생각해보지 않았고 따져본 적도 없었다.

우리는 다만 때가 되면 남자 형제들끼리 모여서 연장을 들고 산으로 갔을 뿐이었다. 여자는 제수씨든 형수씨든 누이든 그 누구에게도 함께 가자고 해본 적이 없었고, 그녀들 또한 그 누구도 함께 하겠다고 나서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벌초는 오직 남자들만의 일이라는 쪽으로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가끔 한 번씩 이웃의 아주머니나 혹은 할머니가 혼자서 벌초를 하는 장면이 눈에 띌라치면 그 모습이 그렇게도 이상하고, 그렇게도 안쓰럽고, 그렇게도 수상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의 그녀가 벌초에 따라나선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강경하게,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처럼, 오래 전에 이미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처럼 “나도 가요, 나도 갈 거야”하고 나선다. 이게 뭐냐? 아직 공식적인 결혼 절차를 거친 것도 아니고, 그녀의 부모님과 형제 그리고 친척들로부터 내가 인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인정은커녕 맞아죽을까 두려워서 감히, 차마 아직은 인사조차도 드리러 갈 엄두를 못 내고 있어서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 관계가 지극히 애매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자기 자신의 조상도 아닌 남자의 조상 묘소에 성묘도 아닌 벌초에 참석하겠다는 것이다.

그녀와 나의 관계가 애매하다는 것은 남동생들의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제수씨들은 이유야 어떻든 형님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형님이라 호칭하고 있었고, 여동생도 오빠의 여자라고 언니라 부르고 있었지만, 남동생들은 아직 아무런 호칭도 못 만들어놓고 있었다. 공식적인 호칭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그녀를 불러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절차가 그렇게도 복잡할 수 없었다.


# 그녀가 이렇게도 씩씩한 줄은 나도 몰랐다.

가까이 있을 때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를 하면 그것이 곧 호칭이었고,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저기요”하면 그것이 또 호칭이 되기도 하지만, 멀리에 있을 때는 애써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눈을 쳐다보며 말을 건네야 하는 고충이랄까 수고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당연히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기는 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턴이다. 나이 차가 다서일곱도 아니고 이십 년이나 나는데 어떻게 감히, 하루아침에 금방 함부로 부부를 선언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헤어질 것이냐?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해볼 수 없다. 그러니까 일정 기간 동안 함께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경험해보고, 그 뒤에도 쭈욱, 계속 함께할 자신이 서로에게 생겨 있으면 그때 부부를 선언하겠다.”

내가 동생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공개하면서 했던 말이 대충 그와 같았다.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의 나는 나 자신의 나이 많음이 그렇게도 이상하고 억울하고 한심해보일 수 없었지만, 어쨌든 현실은 현실이어서 이를 악물고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자 동생들은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고, 제수씨들은 드디어 형님이 생겼다고 환호작약에 축하의 박수까지 쳐주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제수씨들은 그녀를 형님으로 아예 굳혀놓고 아무 스스럼없이 형님, 형님, 하고 있었지만, 남동생들은 여전히 심각해서 그녀를 불러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은근히 허둥거리는 눈치였다. 그렇다 해도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밀감은 또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동생들은 그녀의 얼굴만 봐도 그냥 신이 나고 재미있어 죽겠는 모양인지 절로 벙긋거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혼자서 늙다가 죽을 줄만 알았던, 보기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오는 큰형한테 여자가 생겼으니 이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웃을 만한 일이기도 할 터이었다.


# 예초기로 못하면 낫으로 한다.

“어? 형님 혼자 오셨어요?”

그날 벌초 현장의 입구에 혼자 서있는 나를 발견한 동생들이 보인 첫 반응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던 까닭에 우선 나를 발견한 녀석들이 순간적으로 실망을 한 것이었다. 동생들의 그 실망스런 질문이 내 귀에는 그렇게도 반갑게, 뿌듯하게, 신명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아, 이 녀석들이 ‘내여자’를 좋아하는구나, 형수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신뢰하고 따를 준비도 되어 있구나, 하는 뭐 그런 마음이었달까. 하여튼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벌초를 위한 산행에 나섰다. 금년에는 죽어도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어느새 와 있었던 것인가. 쨍쨍한 태양 아래서도 바람은 제법 선선했고, 하늘은 어느새 찾아온 가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훌쩍 높아져 있었고, 길가에는 지독한 여름 가뭄으로 미처 피지 못한 칡꽃이 뒤늦게 마구 피어나고 있었고, 곳곳에 서 있는 야생 밤들은 가을은 무슨, 아직 멀었지, 하는 투로 여름철의 푸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숭얼숭얼 매달려 있었다.

“나도 할래, 나도 해보고 싶어.”

그녀는 예초기 작업을 자기도 하겠다고 보채기 시작했다. 남자들도 위험해서 함부로 다루기 어렵다고, 그래서 경험도 없는 여자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었다. 잘못 다루면 발목이 잘려질 수도 있고, 돌이 튀어서 눈알이 쏙 빠져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듣고서야 그녀는 겨우 “으응 그런가?” 하고 물러나는 자세를 취하기는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칡꽃이나 좀 따면 어떨까?”
“칡꽃?”
“칡꽃이 저게 싱싱한 채로 술을 담그면 신선주가 되고, 말렸다가 우려서 차로 마시면 그 맛이 또 죽여주거든.”


# 예초기로 못하면 낫으로 한다.

그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차를 좋아하는 그녀는 칡꽃을 따기 시작했지만, 그 또한 잠시뿐이었다. 내가 벌초하러 왔지 무슨 꽃이나 따러 왔나, 하는 투로 칡꽃은 열 송이나 겨우 땄을까 어쨌을까, 이내 그만둬 버리고는 다시 예초기 날이 웅웅, 소리도 요란하게 돌아가는 근처로 다가와서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심오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뭐랄까, 저것을 내가 반드시 접수해야겠는데 말이지, 어떻게 하면 저 맹꽁이 같은 기계를 내 손에 넣을 수 있지? 하는 뭐 그런 표정이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어느 한순간에, 그야말로 순식간에 날아온 작은 돌멩이 하나에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그렇게 한 대 예고도 없이 얻어맞은 뒤에서야 그녀는 예초기의 위력을 실감했다는 듯이 뒤로 물러서기는 했지만, 그 또한 잠시뿐으로, 이번에는 내 손에 들린 낫을 빼앗아들고 나섰다. 저놈의 기계와 어떻게든 한 번 겨뤄보겠다는 듯이, 예초기와는 무덤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서 낫질을 해대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내가 그만 기함을 할 지경이었다. 벌초를 생전 처음 해본다는 그녀가 그렇게도 용감하게, 그렇게도 씩씩하게, 그렇게도 거침없이 일을 척척 해치워도 되는 것인가 싶어서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낫질뿐만이 아니었다. 다 베어진 풀을 갈퀴로 긁어서 한쪽으로 치우는데 그 갈퀴질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일을 능숙하게 기술적으로 잘 처리해서가 아니라, 도시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 특유의 머뭇거림이나 겁냄이 없이 들소처럼 결단력 있게 치고 들어가는 그 모습이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요컨대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만약에 누군가 그녀에게 그 일을 시켰다면, 강요했다면 그녀는 아마 일 초도 안 돼서 더는 못하겠다고 나자빠지고 말았을 터이었다.


# 칡꽃


# 개금


한 마디로 말해서 관심이 있다는 것, 몸과 마음이 동시에 작동하는 일종의 신명이  있다는 것, 나는 그녀의 그것을 보고 있었고, 내 동생들 또한 내가 보고 있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자칫 지루하고 힘들기 짝이 없었을 벌초 작업은 하나도 힘들지 않게 마치 소풍처럼 천천히 놀아가면서 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에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변의 환경이, 자연이 우리의 ‘소풍’을 한결 풍성하게 해주고 있기도 했다.

도라지가 있었다. 심심산천에 백도라지는 아니고, 보라색 꽃이 앙증스레 피어난 보라색도라지라고나 할까, 하여튼 도라지가 여기에 하나 있다 하고 보니 저기에도 있고, 또 저기에도 있고, 여기저기 도처에 도라지꽃이 피어 있는 것이어서, 셋째 동생은 산도라지가 5년 이상 묵으면 산삼보다 더 좋다 하더라는 얘기를 했고, 그녀는 정말이에요? 정말? 정말? 해대면서 우리 저거 캐 먹어요, 응? 응? 하고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잠시 벌초는 뒤로 미루고 도라지를 캐는 재미에 취해 들어갔다.

벌초를 하면서 무슨 호미나 곡괭이를 가져온 것은 당연히 아니어서, 낫으로 도라지를 캐는데 이게 뿌리를 다칠까봐 아슬아슬한 그 재미가 또 여간 아니었다. 그러면 산에 도라지만 있었을까? 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산밤과 도토리가 도처에 있었지만 그 녀석들은 아직 때가 아니어서 손도 대볼 수 없었다 해도, 생각지도 못한 개금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서 까먹는 재미에 푹 빠져드는 진귀한 경험을 해볼 수는 있었다.

국어사전을 펼쳐도 개금이라는 명칭으로는 등재돼 있지 않은, 그래서 그 열매의 정확한 명칭은 알 수 없는 채로 우리는 그 열매를 개금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땔나무를 채취하던 시절에 아버지가 가끔 한줌씩 가져다주시던 것으로, 열매는 은행 정도의 크기에 그 껍질의 단단함은 은행을 뛰어넘고, 그 맛으로 평가하자면 알밤의 열 배는 족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탱글탱글하게 단단한 녀석을 우리는 그동안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의 산소 옆에 그 녀석이 그동안 자라고 있었고, 작년까지도 볼 수 없었던 열매가 금년에는 스무 개도 넘게 열려서 우리를 아주 기쁘게 해주던 것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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