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7)



# 나 이거 장으로 팔러 갈까~

5월과 6월 두 달 동안 새빨간 양귀비로 가득했었던 ‘잡동사니농법’의 우리 집 마당은 여름 내내 글라디올로스와 백합이 현란한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9월이 끝나가면서 코스모스 꽃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여기에 꽃무릇이 가세해서 마당의 풍경은 가히 꽃대궐이라 할만 해졌다. 코스모스와 꽃무릇이 함께 피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그 드문 경우가 선물처럼 우리 집 마당에 찾아와서는 그냥 우리의 입을 쩍쩍 벌어지게 한다.

도시에는 여름 내내 비도 많이 쏟아졌다지만, 우리 고장 고창에서는 여름 가뭄이  혹심했던 까닭에 꽃무릇의 알뿌리들이 아마 고생을 엄청나게 했었던 모양이다. 사람도 배가 너무 고파서 누워 있다 보면 하루가 열흘처럼 길게 느껴지면서도 정작 깨어나서 보면 열흘이 하루처럼 훌쩍 지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듯이, 한참 양분을 흡수해야 할 여름 한철 비쩍 말라버렸던 꽃무릇은 자기가 꽃을 피워내는 식물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잊은 채로 잠이나 쿨쿨 잤을까, 아니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 그냥 말라붙게 한 채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을까. 어쨌든 그렇게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듯 자빠져만 있다가 벼락처럼 가을이 와버렸다는 기미를 채고는 허둥지둥 꽃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고, 이렇게 말하면 내가 지금 꽃무릇을 너무 창피주고 있는 것일까?

내가 꽃무릇이 아니라서 그 심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해도, 사람 방식으로 생각을 해본다면 금년의 꽃무릇은 아마 엄청나게 민망하고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할 것이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가을을 불러내는 전사처럼 시뻘겋게 피어야 할 꽃무릇이 가을날의 코스모스와 함께 피거나 혹은 늦게 피어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는 선물이다. 선물도 아주 귀한 선물이다.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녀가 내 곁으로 온 것을 기념하는 선물이라고, 이렇게 자가당착적인 해석도 나는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이미 돼 있다.


# 코스모스와 꽃무릇의 어울림

“이 시뻘건 녀석이 그러니까 꽃무릇? 이름이 왜 꽃무릇인 거예요?”

태어나서 꽃무릇을 처음 본다는 그녀는 입이 귀에 걸렸다. 날마다 시간마다 사진을 찍어서 어디로 보낸다고 난리가 아니다. 질문도 많다. 궁금한 게 많고 호기심도 많다 보니 질문 또한 많을 수밖에 없다. 그녀의 그 많은 질문을 내가 다 소화해낼 수 있을까? 천만에 만만에 말씀이다. 예전에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조차도 그녀의 질문을 받고 보면 애매하고, 심지어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져서 허둥거리기 일쑤이다. 허둥거리는 심사로 혼자 몰래 들어가서 공부까지 한다. 그렇게 해서 꽃무릇의 어원이 마늘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꽃무릇은 꽃 한 송이를 뚝 떼어놓고 보면 만다라를 닮았다. 불교에서 근원, 본질, 핵심 같은 것들을 강조할 때 앞세우는 만다라의 기원이 꽃무릇이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이 꽃의 색깔은 사실 빨갛되 그냥 빨강이 아니다. 빨갛다거나, 붉다고만 해서는 뭔가 하나를 빼버린 것 같은, 심각한 결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밤을 새워 우는 소쩍새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 같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닌 사람이 죽었을 때 행하는 살풀이와 장송곡을 동시에 듣고 보는 것 같기도 한, 처절이라든가 참혹 같은 수식어보다는 차라리 현란하게 경건한 아름다움 식의 형용모순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어떤 심각한 아우라가 꽃무릇의 빨강색에는 깃들어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꽃을 아주 싫어하기도 한다. 멀리서 꽃무릇을 발견하기만 해도 꽃상여를 보는 것 같다고, 죽음이 몰려오는 것 같다고 애써 외면한 채로 후딱 가버린다. 요컨대 꽃이 꽃답지가 않고 매우 수상하다는 것이다. 하긴 색깔도 강렬한  것이 향기도 없고 화분도 없는 채로 나도 꽃이다, 하고 있으니 수상하다고 기피할 만도 하다. 그런 수상한 꽃을 피워내는 꽃무릇의 알뿌리를 나는 무려 천여 개도 넘게 마당에 심었다. 딱히 그 꽃을 좋아해서 돈 주고 사다가 심은 것은 아니었다. 산속에 무너져 가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그 주변에 산재한 꽃무릇이 칡넝쿨에 치여 죽어가고 있어서 그것을 캐다가 심은 것일 뿐이었다.


# 벌개미취 꽃

그 뒤로 이상한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다. 아무리 꽃을 좋아한다 해도 그렇지, 뭐 이딴 것들을 마당에 심었느냐는 힐문에, 힐난에, 심지어 비난까지 쏟아내는 사람이 꽤나 있었다. 하지만 나의 그녀는 그 꽃이 피어나자마자 와아, 와아, 감탄사를 연발하며 카메라 셔터를 마구마구 눌러대는 것이어서, 딱히 그 꽃을 좋아해서 심은 것도 아니었던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덩달아 그 꽃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는 새삼스럽게도, 꽃무릇의 생김새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해보게도 되었다. 알아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좋아해서 알아지는 것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꽃이 꽃이면서 구태여 꽃이라고 강조하는 이름을 달고 있는 꽃은 많지 않다.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거의 없을지도 모르겠다. 꽃무릇, 아니 꽃무릇 꽃이라니, 이게 대체 뭐냐 응? 이런 질문을 해놓고 스스로도 이상해서 혼자 피식피식 웃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그녀가 내 곁으로 온 뒤에 생긴 버릇이다. 이것도 아마 팔불출의 기본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내가 이 나이에 둘이 웃는 것도 모자라서 혼자 웃기를 버릇처럼 하고 있을 까닭은 도대체가 없을 테니 말이다.

“할머니, 콩은 언제 심어요?” 하고 물어야만 했던 완전 초보 농사꾼 시절의 윤구병 선생을 나의 그녀는 생각나게 한다. 이것도 물어보고 저것도 물어보는 호기심의 대왕, 그녀의 그런 호기심을 통해서 나는 세상을 다시 본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이, 알아도 건성이었던 것들이 벌떡벌떡 일어나서 나를 다시 봐줘, 다시 봐줘, 응? 한다고 하면 말이 좀 되려는지 모르겠다.

굳이 우주의 운행원리를 생각해보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아서 반응하는 계절의 순환, 그 완벽하게 익숙한 질서, 그 질서 안에서 누려온 우리의 삶을 가만히 앉아서 돌아보면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모호하기만 하다. 그야말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었던 형국이다. 그러니 네 것과 내 것의 구별은 또 얼마나 있었으랴. 그렇다. 우리에게 벽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었고,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 못갈 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산과 들이 모두 내 것이고 우리의 것일 뿐 남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 고사리를 찾는 표정이 어째 사냥꾼 같다.

“우리 저기 한 번 가 봐요.”
“난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글쎄, 이번에 한 번 가 볼까?”
“이것도 먹는 거예요?”
“글쎄, 난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말 나온 김에 한 번 먹어볼까?”

거칠게 요약을 하자면 대략 이런 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는 서울행 자동차 운전을 해보기도 했고, 이날이때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벌개미취를 먹어보고 그 맛에 함뿍 빠져들기도 했으며, 퉁퉁마디라 부르기도 하는 갯가의 풀 함초를 옛 사람들이 조미료로 쓰기도 하는 등 즐겨 먹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자신이 먹어볼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그것을 뜯어다가 나물로 무쳐놓고 “어 이거 맛 괜찮네? 괜찮네?” 하고 연방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식의 새로운 앎의 기회를 갖기도 했다.

벌개미취는 사실 내가 나물로 해먹으려고 씨앗을 사다가 심은 것들이었다. 그랬으면서도 반찬거리로는 생각을 못해본 채 그저 꽃이나 구경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오면서 상황이 확 달라졌다. 이것도 먹는 거냐고 묻는 그녀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아하 그렇지 참, 이게 취나물 가운데 하나였지, 하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뜯어다가 데쳐서 먹는데 그 부드럽게 달콤한 향기가 그만 죽여주던 것이었다. 혼자서는 해볼 수 없는, 해볼 생각조차도 못했거나 생각은 했지만 이미 잊어버린 것들이 둘이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조건 중에 으뜸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터득했다고나 할까.

봄나물을 뜯는다고 산으로 들로 마구 쏘다니던 때의 그녀는 비유를 조금 뻔뻔스럽게 하자면 한 마리 토끼 같았다. 대학 시절에 암벽등반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고사리를 꺾어보는 게 처음이라는 그녀의 발걸음이 그렇게도 가볍고 그렇게도 민첩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토끼를 찾아다니는 사냥꾼 같기도 했다. 고사리를 찾는 사람의 눈매가 어쩌면 그리도 형형하게 매섭게 사냥꾼처럼 불타오르던지.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서 뭔가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근육 같은 것이 마구 생성되는 느낌이었다.


# 잔뜩 뜯어온 쇠비듬을 택배상자에 담는다.

그러나 어떤 날의 그녀는 명실상부한 봄처녀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지랑이가 아롱거리는 5월의 들판에서 콧노래 흥얼거리며 나물을 뜯는 그녀의 뒤태도 그렇거니와, 머리에 쓰고 있던 밀짚모자에 한가득 나물을 뜯어 담아서 머리에 이고 “나 이거 시장에 팔러 갈까? 시장이 어디에 있지?” 하면서 저기 어디 멀리를 응시하고 있을 때의 그녀는 내가 모르는 세계에서 나를 유혹하러 온 전설 속의 ‘여시’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여시’로 변장해서 그녀를 유혹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런 어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면서 손가락이 절로 꼼지락거려지는 일종의 멘탈붕괴, 넋이 빠져버린 순간이 내게 있었다.

이미 내 곁으로 와서 ‘내 여자’가 되어 있는 그녀를 또 한 번 유혹하고 싶어 애를 태웠던 그날의 내 심사를 무슨 낱말로 해독해야 옳은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만약에 그녀가 매일 매시 그런 식의 꿈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다면 나는 아마 진즉에 숨이 막혀서 그만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뭐랄까, 그녀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에너지는 한 갈래가 아니었고, 그녀의 외모를 빛내주는 아우라 또한 한 색깔이 아니어서, 쇠비름이 필요하다는 친척에게 보낼 목적으로 쇠비름을 잔뜩 뜯어오던 날의 그녀는 거의 완벽하게 농사꾼 아줌마였고, 그 아줌마는 다름 아닌 내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던 것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쇠비름은 약이 아니라 그냥 풀이었다. 풀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풀이었다. 그놈의 풀은 새싹이 나오는 계절도 따로 없어서, 봄에도 나고 여름에도 나고 심지어는 늦가을에도 배추밭 고랑을 파랗게 덮어버릴 정도로 나오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생명력이 어찌나 강한지 뽑아서 한쪽에 버려도 죽지를 않고 습기가 조금만 있으면 이내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그 독하기만 했던 쇠비름이 오늘날에는 인체에 아주 유용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해서 너도나도 뽑아간다. 야생의 것을 뽑아갈 뿐만 아니라 대단위로 재배까지 한다.

야생의 쇠비름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사를 제초제에 의존하는 시절이고 보니 논두렁이고 밭두렁이고 경작이 가능한 들판에서는 풀도 이미 제 값을 해낼 수 있는 풀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쇠비름을 찾아서 헤매기 시작했다. 산에도 가서 보고 무덤가에도 가보고, 시냇가에도 가보고 저수지 근처에도 가서 샅샅이 뒤져보았다. 나로서는 사실 대단히 엉뚱한 일이었다.


# 제멋대로 자라는 함초

세상에, 내가 그 지독한 풀 쇠비름을 찾아서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날이 있을 줄이야. 마당 한쪽 텃밭에서 기른 고추라든가 쪽파 것들을 더러 멀리 도시로 보내보기는 했어도, 매실이라든가 호박 같은 것들을 보내보기는 했어도, 심지어는 뒷산에서 꺾은 고사리나 앞들판에서 캐낸 돼지감자를 택배로 멀리 보내보기는 했어도 쇠비름은 살다살다 처음이고 보니 나로서는 이게 영 낯설면서도 뭔가 모르게 감개가 무량하다는 느낌이던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날 헤매고 또 헤매던 끝에 드디어 쇠비름 군락지를 찾아냈다.

때는 햇볕이 무지하게 살인적으로 내리쬐는 7월의 어느 하루 오후 2시 무렵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그 무더위 속에서 그녀는 아주 그냥 열심을 팔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았다가 엎드렸다가, 일어서서 허리를 잠시 뒤로 젖혔다가 다시 엎드리는 그녀는 글쎄, 그 모습을 뭐라고 풀어야 할까. 세 시간여에 걸친 쇠비름 채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물에 씻어서 물기를 뺀 다음 택배로 보내기에 용이하도록 상자에 담고 있을 때, 그때 그녀의 표정을 장식한 진지함을 대체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어쨌든 농사를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함께 한다는 것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그녀가 내 곁에 있으므로 해서 내가 생전 해보지 않았던 쇠비름을 찾아 다녔듯이, 그녀 또한 내가 있으므로 해서 저토록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에 열심을 바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자가당착적인 생각이 또 한 번 내 머릿속을 찾아들던 것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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