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5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행복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한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눈앞의 현실이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으로 변하기도 한단다. 누구나 알고 있는 원론적 사실. 내 마음 하나면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얘기. 말은 참 쉽다. 현실은 말만큼 녹록치 않은데….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행복한 삶’이 인생의 목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 편한 삶을 살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감으로 충만해 있는 상태.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의 난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불행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정에 없던 쌍둥이 남매를 임신하고 7개월에 조산. 1kg으로 태어난 아이들의 인큐베이터 뒷바라지. 퇴원 후에는 미숙아 출신이란 점 때문에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육아. 돌이 되었지만 앉지도 기지도 걷지도 못하는 아들. 그 때부터 시작된 재활 및 발달 치료. 그리고 남편 및 시댁과의 갈등.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어린 아이 둘을 안고 ‘데리고 죽을까, 혼자 죽을까’를 고민하며 오열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5살이 되자 약간이나마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행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거나 일찍 들어와도 아이들과 적극적으로 놀아주지 않는 남편이 불만이었고, 고집부리며 짜증만 내는 딸도 가끔은 미웠다.
육체적으로도 한계가 왔다. 아직 배변 훈련이 안된 아들은 하루에도 3~4개씩의 이불빨래를 하게 만들었고, 계단도 오르내리지 못하는 탓에 매일 20kg 육박한 아들을 안고 4층까지 낑낑거리며 다녔다. 흰머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신체 곳곳에 이상신호가 왔다.



게다가 늘 지치고 힘든 표정. 기분전환을 할 만한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유일한 외출은 아들 치료실과 동네 마트, 그리고 동네 산책 뿐. 아들을 봐 줄 사람이 없어 친구도 못 만나고 외출도 못했다. ‘나만의 시간’이란 건 없었다. 오로지 집 안에 갇혀 아이들과 씨름만 하는 삶. 그렇게 4년 넘게 살다 보니 “아이고 죽겠다”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튀어나왔다.
분명 난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들도, 친척들도 모두 그랬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게 되면 어쩌다 내가 그렇게 됐냐며 위로했다. 내가 불쌍하다며 우는 친구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행했던 내가 요즘엔 행복하다. 늘 행복감에 젖어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음미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은 변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 낸 건 아주 작고 사소한 하나의 계기였다. 얼마 전 아들을 데리고 치료실을 가던 중이었다. 친정엄마 또래의 아줌마 두 명이 서너 걸음 앞서가고 있었다. 아줌마들의 걸음은 너무도 느렸고, 아들을 안고 낑낑대며 걸어가던 나는 속이 터져 그녀들을 앞지르려 속도를 높였다.

바로 옆을 지나가려던 찰나 한 아줌마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그 말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발걸음이 늦춰졌다. 왜 그렇지? 아이들이 어리면 이렇게 힘들기만 한데. 난 어서 아이들이 자라나 엄마 없이도 살 수 있는 그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육아의 짐에서 해방된 저 아줌마들은 이제 날개 달고 훨훨 날아오르기만 하면 되는데. 왜 그러지? 왜?





들려오는 건 다른 아줌마의 맞장구 소리. “그렇지. 아이들 키우며 살 때가 제일 행복했지.” 그리고 두 사람의 나지막한 웃음소리.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살 때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말. 동네 아줌마들의 일상적인 대화일 뿐인데 충격파는 크고 강했다.

그리고 그제야 몇 달 전 시어머니의 인생이 불현듯 이해가 됐다. 그날따라 이런저런 많은 얘기를 하시던 어머니.

어머니가 젊고 남편은 아직 어리던 시절, 어머니가 살던 주택가 골목 끝에는 큰 평상이 있었단다. 해가 지면 골목의 아줌마들이 저녁준비를 마치고 평상으로 나와 수다 삼매경. 그러다 남편이 퇴근하면 한 명씩 한 명씩 자리를 떠났고, 늘 귀가가 늦었던 시아버지는 항상 마지막에 나타나셨단다. 이미 어두워진 거리. 저 멀리 골목 끝에 아버님이 보이면 어머니는 어린 남편을 불러 손을 잡고 아버님을 마중 나가셨단다. 추억에 젖어 그 시절로 돌아간 양 열중해서 얘기를 하시던 어머니. 아마도 그 때가 어머니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깨달음은 그렇게 왔다. 먼 훗날 내가 눈 감는 날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린다면 언제가 될까? 재미있었던 유년 시절? 잘 나갔던 대학시절? 열심히 일하던 처녀시절? 아이들 결혼시키고 난 뒤 남편과 단둘이 맞게 된 제 2의 신혼? 아니다. 모두 아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아이들이 어리고 예쁘고 내 곁에만 꼭 붙어 있는, 우리 가족 모두가 똘똘 뭉쳐 아웅다웅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이다.

하루하루 사는 건 힘들고 팍팍하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난 지금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비로소 내가 얼마나 행복한 일상들을 보내고 있는지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어머니와 같은, 나이 들어 추억할 수 있는 행복한 일상들이 잔뜩 있었던 것이다.

주택가 골목 끝 빌라 4층에 위치한 우리 집. 거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골목이 한 눈에 보인다. 남편 퇴근 시간이 되면 창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우리 딸. 저 멀리 골목 끝에 남편이 보이기 시작하면 동네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아빠~ 아빠~ 사랑해~”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손을 들어 ‘안녕~ 사랑해~’라는 손동작을 취하는 남편. 





매일 저녁밥을 먹은 후엔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산책을 한다. 아들과 내가 손을 잡고 앞서가면 딸과 남편이 손을 잡고 뒤따른다. 차가 안 올 땐 아이들의 손을 놓고 자유롭게 뛰게 하는데 내가 맨 앞에, 남편은 맨 뒤에, 아이들은 엄마 아빠 사이에 안전하게. 1:2:1의 대형을 유지하다 차가 오면 재빨리 2:2의 대형으로 전환한다.

그렇게 진형을 바꿔가며 산책을 하다 길고양이를 만나면 사료를 준다. 딸은 “귀엽다~”를 연발하며 고양이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데 아들 녀석은 쿵쾅거리며 돌진해 고양이를 쫓아내기 일쑤다.

심지어는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날조차도 행복한 일상일 때가 있다.

총각 시절, 좋아하는 유부남 선배가 술이 취하면 골목 끝에서부터 딸 이름을 부르며 귀가하는 걸 본 남편. 내심 그 모습이 보기 좋았고 부러웠나 보다. 만취하는 날이면 골목 끝에서부터 아이들 이름과 내 이름을 고래고래 불러댄다. 그럼 나는 거실 창문을 열고 남편을 향해 “빨리 올라와~ 사람들 다 깬다”라며 으름장을 놓는데 남편은 아랑곳 않고 우리 가족 이름을 불러댄다.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일상이, 가족과 함께 하는 현재의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알고 나니 그 다음부턴 더욱더 많은 순간의 행복함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을 낮잠 재우기 위해 이불 위에서 꼭 껴안고 있는 시간도 행복하고, 딸이 노래 부르며 율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하고, 남편과 텔레비전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주로 등장인물 욕이지만)를 나누는 순간도 행복하다. 왜 몰랐을까? 내 일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  우리 아들. 나랑 닮았나요?~

결국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이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말은 쉽고 현실은 녹록치 않다. “지금 당장 마음을 고쳐먹고 행복해져야지. 얍! 행복해져라!”라고 해봤자 고단한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마음 속에 행복의 무지개가 솟아오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주 운이 좋았던 나의 경우처럼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계기가 있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마음의 시각을 달리할 수 있는 계기. 그 계기를 핑계로, 그 계기에 기대어 행복해지는 힘을 얻는다. 

물론 그 계기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진 않는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행복을 알지 못하고 떠나는 이도 있으니.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일. 필요하다고 느끼면 스스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언제까지고 행복해질 계기만 기다리며 불행히 살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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