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게로 왔다(8)



# 고깔도 한 번 써보고~

가을이 한창 맛나게 익어가는 계절에 고창의 선운산 골짜기에서 한판 굿이 벌어졌다. 해리면과 상하면 그리고 심원면에서 나름대로 한가락씩 한다하는 재주꾼들이 모였다. 꽹과리에 장구에 북이다, 징이다, 소고다, 저마다 멋대로들 손에 익은 것들을 들고 나와서 머리에는 꽃송이도 풍성한 고깔을 쓰고, 몸에는 백의민족이라 흰옷을 입고 어깨에는 띠를 두르고, 엇싸 어얼싸, 입소리에 악기 소리를 내며 겅중겅중 뛰고 돌며 맺었다가 풀고 풀었다가 다시 맺고 다시 푸는 농악놀이에 그녀와 나는 넋을 잃고 한참이나 빠져들었다.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그런 축제의 현장이었다. 역사도 전통도 없는 축제가 아니었다. 사람의 변하는 기호에 맞춰 급조된 상업적인 축제도 아니었다. 묻어지고 잊혀졌던, 혹은 끊어졌거나 밀려났던 역사와 전통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복원한 것이니 그야말로 축제라 할 만한 축제 중의 축제였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도솔산(혹은 선운산) 인근 바닷가에 도적들이 많았단다. 확인하기 어려운 전설에 의하면 선운산 인근이 척박한 오지라서 귀양 오는 양반 부자들이 많았고, 그래서 도적도 상대적으로 많았다고 하지만, 어쨌든 도적이란 예나 지금이나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놓고 다닐 만한 직업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떳떳하지 않지만, 먹고 살아갈 만한 일거리가 마땅치 않은 세상이고 보니 도적은 어쩔 수 없이 도적질을 해야만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가며 도적질을 해 오고 있었다. 도적들의 이런 고충을 간파한 검단이란 사람이 나섰다.

검단은 선운산 골짜기의 명당에 자리한 선운사의 승려였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원력을 세워놓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온 승려의 눈으로 봤을 때 도적이란 실로 안타까운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도적들의 소굴로 찾아가서 마주앉았다. 거칠고 힘도 세고 무기마저 잔뜩 지닌 도적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중놈’ 하나 내쳐버리는 것쯤 아무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단신으로 소굴까지 찾아온 그 대담한 배포와 해박한 지식에 감탄해서 그만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는 게 전하는 이야기의 골자였다.


#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 리더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네~

바닷물을 이렇게 저렇게 걸러서 가마솥에 넣고 끓여라, 그러면 소금이 될 것이다. 인간이란 소금이 없으면 못 사는 것이니, 그 소금을 사람들에게 팔아라. 그러면 너희는 너희들 자신도 떳떳하지 못한 도적질을 안 해도 먹고살기에 걱정이 없을 것이다 등등, 검단선사의 이런 이야기에 도적들은 감화되었고, 마침내 도적들은 칼과 창을 버리고 바닷물을 걸러서 가마솥에 끓이는 염부가 되었다. 여기서 나온 소금을 자염이라 불렀다. 물을 끓여서 만든 소금이라는 뜻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소금을 만들고 또 만들다가 날씨가 서늘해져서 더 이상은 소금을 만들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염부들은 도적이었던 자신들의 신분을 양민으로 거듭나게 해준 검단선사에게 무한한 감사의 정을 느꼈고, 그래서 그 해에 생산한 소금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싸서 들고 검단선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역시 그렇게 가을날의 어느 하루 좋은 날을 받아 소금을 싸서 들고 검단선사를 찾아갔다. 물론 그냥 소금만 싸서 들고 간 것은 아니었다. 은혜를 보답하러 가는 그 즐거운 행차에 음주가무가 없을 수 있겠는가. 보은염 축제의 시작이랄까, 기원은 이와 같았다.

자염의 생산은 아마 일제 말기까지도 맥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연세가 구십 전후인 어르신들은 바닷가 도처에 서있는 염막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꿈결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구체적인 이유로 자염 생산이 완전 중단되었는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질보다는 양을 최대 가치로 내세운 전쟁국가 일본이 한국의 갯벌 도처에 소금밭을 만들면서부터 고품질 소량 생산체제인 자염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추론 정도는 해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비용 저효율의 생산체제가 일종의 악덕으로 규정되면서 자염은 그 맛과 질이야 어찌 되었건 무조건 퇴출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사라졌던 자염이 부활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은 양보다는 질 위주의, 하나를 먹어도 제대로 된 것을 먹자는 인식이 확산되면서부터였다. 때를 같이 해서 강력한 중앙중심의 체제가 미약하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앙이 모든 것의 중심은 아니라는, 지역이 있은 다음에 중앙도 있다는 생각이 지역민들의 머릿속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자의식은 중앙에서 내려 보내는 사업방식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해야 했던 새마을운동 이후의 강력한 관행에 대한 의구심과 반성으로 나타났다.


# 소금 얘기를 듣자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고창에서 자염에 관한 논의는 이십여 년 전부터 간간이 있어 왔었다. 지방자치의 시행과 궤를 같이 해서 지역축제가 우후죽순 격으로 마구 생겨날 무렵에 자염을 재현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 차원의 이야기도 나왔고, 향토문화를 연구하는 몇몇 문인들은 자염을 고창의 특산품으로 개발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이런저런 소수 의견이 모이고 또 모여서 다수의 관심을 끌기까지 십여 년, 그리고 또 육칠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염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가 수집되었고, 생산을 위한 기반시설이 조성되었으며, 미약하나마 판로까지 개척되기에 이르렀다.

고창의 자염은 이제 일 년 동안의 시험생산을 거치고 본격생산 이 년째를 맞이했다. 본격생산이라 했지만 그 성과는 아직 미미한 편이었다. 바닷물을 일차, 이차, 거른 뒤에 그것을 다시 끓이고 또 끓여서 소금을 얻는 일이다 보니 그 노동의 강도와 생산량을 비교했을 때 수치가 너무 벌어졌고, 가격은 자연 고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소금값이 금값인 셈이어서 대중화를 꾀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맛과 질이 여태까지의 소금과는 차원을 달리 하고 보니 전망은 좋다고 볼 수 있었다. 첫맛이 쓰지 않고, 짜지도 않고 달달해야 한다는, 예로부터 내려온 좋은 소금으로서의 조건을 자염은 거의 완벽하게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런 좋은 소금을 만들어놓고 널리 알리고 자랑하는 축제를 벌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었다. 그녀와의 동거 이후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빠져버린 나 같은 사람이야 축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어도 날짜는 잊고 있었지만, 고맙게도 하루 전날 전화로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 뭔 얘기를 저렇게도 열심히 하고 듣는지...

사실 누구 못지않게 소금 축제를 반가워한 사람은 그녀였다. 나의 그녀. 만약에 우리들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대가 다 해야 해요, 그대가 응?”하면서 진지하게 눈을 깜빡거리곤 하는 그녀, 호랑이 꼬리로 명명되는 포항의 호미곶 인근을 고향으로 둔 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다는, 그러나 국회의원 이상득 씨의 행적이 뉴스거리로 부각되면서부터 포항이 고향인 게 부끄러워져 버렸다는 나의 그녀, 그녀는 얼마 전부터 소금과 관련된 소설을 쓰겠다고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검단선사와 도적들의 관계, 자염과 보은염 축제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양 어깨에 날개라도 돋아나는 기분으로 다가왔을 터이었다.

우리가 축제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전행사로 농악 한마당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 그것은 실로 농악다운 농악이었다. 농악은 역시 확 트인 난장에서 벌여야 제 맛이 난다. 정해진 공간 안에서 벌이는 농악은 뭐랄까, 감옥에 갇힌 자들의 몸부림 내지는 절규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니 뭐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최소한 답답한 안타까움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다행히도 그날의 공간은 벌판처럼 넓었다. 북잽이는 북잽이대로, 쇠잽이는 쇠잽이대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양어깨에 돋아난 날개를 퍼덕거리며 허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은 넓었다. 그리하여 상쇠는 여기로 갔다가 저기로 갔다가, 발이 움직이는 대로 그냥 원없이 자신들의 무대를 확장해 가며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아, 저 아저씨, 저 아저씨. 봐요, 봐, 응?”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내 팔에 팔짱을 끼고 내가 보는 쪽과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던 그녀가 느닷없이 안타까운 소리를 질러대며 두 발을 동동 구른다.
“뭔 소리?”
“제가 찾던 사람이에요. 제가 찾던 사람.”
“엥?”
“제가 찾던 캐릭터라니깐요. 찍어줘요, 독사진으로.”


# 그녀가 선택한 축제의 주인공

한참 뒤에야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농악에 참여한 삼십여 명 가운데 가장 가락이 안 맞는 남자, 몸을 왼쪽으로 틀어야 할지 오른쪽으로 틀어야 할지 순간순간 감을 못 잡고 허둥거리는, 한 마디로 말해서 가장 못하는 남자. 그렇지만 가장 열성적으로 뭔가를 하고자 하는 남자. 그 어눌하게 열정적인 남자를 그녀는 주목하고 있었다. 그 남자야말로 자신이 그동안 찾았던, 갈망해 왔던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요컨대 언제인가 쓰게 될 소설의 주인공 남자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또 그렇다. 타고난 재주와 솜씨는 없지만 성심껏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란 그 얼마나 깊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드는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사진을 찍어주고 싶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찍을 수가 없었다. 내 카메라는 값싼 디지털 카메라이고, 농악대는 삼십여 명 이상이 벌판 같은 난장을 이루며 뛰고 돌고 구르는 까닭에 특정한 개인을 포착한다는 게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녀는 아이 참, 아이 참, 소리를 연발하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아 참 나도 카메라가 있었지”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달려 나갔다. 그러니까 그녀는  뭐랄까. 값싼 디카보다 성능이 월등 좋은 스마트폰을 자신이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농악에 몰두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스마트폰도 역시 별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그 남자 한 사람만을 콕 찍어낼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그녀는 결국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아예 농악대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맺고 풀고, 또 맺고 푸는 농악대원들 속에서 그녀는 박수를 치며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앗싸, 아앗싸, 소리를 질러대며 난리도 저런 난리가 없겠다 싶은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머리채를 휘날리며 허리를 흔들어대는 그녀는 마침내 한 마리의 물고기를 연상케 해버리고 있었다.

물고기를 잡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얼마나 참담하게 간절하게 펄펄 뛰다가 치욕스럽게 눈을 까뒤집은 채로 안간힘을 다하며 생명줄을 놓쳐 가는지를, 그렇게 다 죽어가는 물고기를 다시 물에 풀어놓으면 얼마나 황홀하게 우아하게 유선형으로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며 자신의 살아 있음을 온 세상에 통보라도 하듯이  물고기를 잡았다가 다시 놓아본 사람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 눈이 딱 마주친 순간의 엄지식당 주인아줌마

물론 그녀가 잡혔다가 풀려난 물고기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서른도 넘은 나이에 빚을 내서 문창과를 다니고 졸업한 뒤에는 그놈의 빚을 갚느라 육 년이라는 세월을 저당 잡히듯이 살아야 했던 그녀에게 그것은 분명 심리적인 감옥이었을 것이다. 소설과 거의 동시에 ‘경상도 여자의 전라도말 배우기’라는 제목의 에세이도 한 권 쓰겠다는 등,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하늘이라도 찌를 듯이 높아져있는 그녀는 확실히 ‘끼’가 많은 사람이었다.

지구촌에 발 딛고 사는 사람 중에 끼 없는 사람이 누구 있을까마는, 모름지기 ‘끼’라는 것은 누군가 그것을 발견해서 격려하고 응원해주지 않는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끼’라는 것은 결국 어느 한 특정 분야에 집중된 에너지라서 보편성을 획득하기가 어려운 것일 테니 말이다. 그녀의 그런 에너지를 내가 옆에서 이상하다고 폄훼하지 않고 격려하며 응원해줄 준비가 확실히 돼 있는가 여부는 나 자신도 아직은 속단하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펄펄 뛰는 그녀를 보면 내 입이 먼저 알아서 웃어주는 게 사실이고 보면 자격은 어느 정도 갖췄다고 봐도 뭐 괜찮을 것이다. 

식전행사가 끝나고 농악대원들이 휴식을 취하러 준비된 장소로 이동할 무렵, 드디어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주인공 남자와 일대일 면담을 갖게 될 기회를 잡았다. 잠깐만요, 잠깐만, 예? 제발 잠깐만요. 그렇게 애원을 하고 또 해서 그녀는 어눌하게 열정적인 그 남자를 한쪽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 속의 남자가 언제 어느 소설 속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될지는 나도 모르고 그녀 자신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언제인가는 그렇게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고, 그렇게 말해도 뭐 괜찮지 않을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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