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가장 에로틱한 삶의 현장 갯벌에서 (열여덟번째)




# 구름은 있어도 비는 없다.

가을이 깊어졌다. 누가 봐도 완벽한 가을이다. 가을의 상징이라 할 국화가 벌써 전에 피었고, 가을의 제왕이라 해도 무방한 단풍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대의 관광버스를 동서남북 도처에서 불러들인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도 좁고, 좁고도 넓다. 한쪽에서는 가을이 불탄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불타는 가을 때문에 바다가 목이 말라 죽어간다고 아우성이다.

“단풍놀이가 뭔 말이여, 맞아죽을 소리제.”

농번기에 농부들이 하는 말 같지만 그것은 아니다. 농촌의 일은 사실 거지반 다 끝났다. 거둬들일 만한 곡물류는 다 거뒀고, 남은 일이라 봐야 콩깍지를 골라내는 것 정도 아니면 늙은 호박을 갈무리하는 정도다. 그런 일이란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 하지만 바다, 갯사람들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확 달라진다.

바닷물이 짜다. 아니 짜졌다. 짜도 너무 짜졌다. 그 바람에 각종 양식장에 초비상이 걸렸다. 겨울 한철 벌어서 먹고사는 해태 양식업자들이 가장 먼저 큰일이 났다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뒤를 이어 바지락 양식장에서 한숨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만한 에너지조차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중 일부는 수돗물을 받아다가 바다에 뿌려보기도 하지만, 그래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이다.

말로만 들었다. 바다에 물을 주는 사람이 더러 있다는 얘기를 간간 듣기는 했었다. 그것도 폭서가 극심한 여름 한철의 일이었다. 가을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상상은 차마 해보지도 못했다. 내 견문이 참으로 짧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았다. 바다에도 가뭄이 있다는 것을 일찍이 한 번도 들은 바가 없고, 본 적은 더욱 없었으니 어쩔 것인가. 어쨌든 그렇다. 요즘의 갯벌은 들어서면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 따개비를 골라내는 사람들

국내 최대의 바지락 생산지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고창 하전 갯벌의 경우 작년 겨울에 이미 초토화되고 말았다. 돈을 주고 사다가 뿌린 종패의 십 퍼센트나 겨우 건질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십 퍼센트는커녕 일 퍼센트도 안 남아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바지락이 폐사된 원인은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확실하게 밝혀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채로 갯사람들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 들어갔다.

속이 시커멓게 탄 채로 가을을 맞이했다. 11월은 바지락 농장에 새로운 종패를 뿌리는 계절이다. 종패를 뿌리기 전에 몇 마리 남아 있는 바지락을 캐내야 했다. 그런데 캐낸다 해도 판로가 이미 막혀 버렸다. 물량이 워낙 소량이다 보니 오래 전부터 거래해 온 유통업자들 태반이 하전 바지락을 포기하고 중국산 수입물량을 대폭 늘려버린 탓이었다.

그나마 판로를 뚫을 수 있는 시기가 조금 즈음이었다. 조금 즈음에는 썰물 때도 바닷물이 멀리 나가지를 않고 마치 빚쟁이들처럼 가까이서 진을 치고 도는 까닭에 바지락 채취가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전을 떠났던 유통업자들이 다시 하전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하전 갯벌은 넓고도 길어서 축양이 가능하고, 축양이 가능하다 보니 바닷물이 가까이서 맴도는 조금 무렵에도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축양이란 수심이 깊은 양식장에 있는 바지락을 캐다가 수심이 얕은 곳에 옮겨서 일정기간 동안 보관하는 일종의 재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본격적인 바지락 양식이 불가능하지만 일시적으로 보관해두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하전 갯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축양의 방식을 적극 활용해 왔다.


# 일을 해도 힘만 들고 재미가 없어...

하루 생산능력이 이십 킬로그램짜리 백 자루인데 주문량이 팔십 자루밖에 안 된다거나, 혹은 아예 주문이 한 자루도 안 들어왔을 경우 축양의 방식을 활용하면 노는 날이 없이 고르게 여러 사람이 작업에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생산량이 너무 적은 경우에도 축양은 효과만점이었다.

가령 금년처럼 바지락이 상당수 폐사해서 하루 생산량이 열 자루밖에 안 된다면, 하루에 천 자루 이상씩을 필요로 하는 유통업자에게 그 적은 물량을 받아달라고 애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혹은 열흘씩 작업한 물량을 축양장에 비축해 두었다가 여러 명의 양식업자가 한꺼번에 모아서 출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방식은 인건비가 이중으로 든다는 단점도 있었고, 본격적인 양식장에 비해 수심이 얕은 까닭에 돌풍이라도 불면 비축물량의 태반을 잃어버린다는 위험부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양은 일손을 놀리지 않고 계속 활용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 있는 방식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금년에는 그것조차도 어려워졌다. 아니 불가능해졌다. 가을이 너무 불 타 올라서, 가을 가뭄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한 달? 두 달? 아마 두 달 가까이 됐을 것이다. 그 바람에 바닷물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짜져 버렸다. 바다를 서식처로 정한 바지락은 물이 너무 싱거워도 살아갈 수 없지만, 너무 짜도 살아가기 어렵다. 역시 그런가 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들은 무엇이 ‘너무 해서는’ 안 되게끔 되어 있나 보다.


# 고무호스에 달라붙은 따개비

그런데 너무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흙을 이불처럼 덮고 들어앉아서 물이 들어오면 혀를 내밀어 자신에게 유용한 성분만을 빨아들이곤 했던 바지락이 너무 높아진 흙 속의 염분 때문에 모두 흙 밖으로 나와 버렸다.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어서, 살아갈 수가 없어서 이불을 박차고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러나 바지락은 더 이상 온전한 바지락일 수가 없었다. 조수에 휩쓸려 이리저리 흩어져서 폐사하거나 간신히 어떻게 살아남았다 해도 따개비의 공격으로 숨통이 막혀 사경을 헤매기 일쑤였다.

아무 데나 쩍쩍 달라붙는다 해서 갯사람들에게 ‘쩍’이라고 불리는 따개비는 일정한 서식처가 따로 없었다. 알에서 깨어난 유생이 바닷물 속을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돌다가 무엇이든 붙을 만한 것을 만나면 거기에 딱 붙어서 ‘여기가 내 집’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갯사람들이 구획표시용으로 쇠막대를 꽂아놓으면 쇠막대에 엉켜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조개를 캐던 누군가 호미를 두고 돌아가면 호미에 달라붙어서 죽기 전에는 떨어지지 않고, 작은 돌멩이라도 하나 뻘 속에 있으면 거기에도 즉각 달라붙는다. 살아있는 조개나 우렁쉥이 등 어패류도 예외는 아니다. 심지어 어떤 녀석은 꽃게의 등딱지에 붙어버리기도 한다. 사람도 아마 장화를 신고 두 시간 이상 서 있으면 따개비의 서식처가 될 것이다.

그렇게 아무 데나 달라붙는 따개비를 좋은 손님으로 인정하고 사이좋게 동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두 개의 딱딱한 갑옷으로 무장한 조개류에게 있어 따개비는 절대로 동거 가능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조개는 수시로 입을 열어 갯물에 함유된 유용한 성분을 흡수해야 하는데 따개비가 붙어서 자라기 시작하면 그것이 일종의 자물통처럼 조개의 양쪽 껍질을 하나로 묶어버리고, 그러면 조개가 입을 열지 못해서 죽어버리고 만다.


# 소라를 에워싸버린 따개비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해도 그 바지락은 이미 온전한 바지락이 아니다. 양분을 제때 흡수하지 못해서 바지락 특유의 풍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끓이면 따개비에서 각종 이물질이 나와서 그나마 사람이 먹을 수조차 없다. 그래서 따개비가 붙은 조개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야 한다.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바지락에서 따개비를 골라내다 보니 인건비는 두 곱 세 곱으로 들면서 수확은 그나마도 반으로 줄어든다.

아, 이게 뭐냐. 이게 뭐냔 말이다. 농장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당을 받기로 하고 일을 나온 사람들도 틈만 나면 하늘을 본다. 따개비를 골라내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문득 생각이 나면 하늘을 본다. 왜 안 오는 것이냐. 비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이냐.

물속에서 물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게 애달프다. 하늘은 왜 이다지도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게 맑기만 한가. 원망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어느 순간 다시 고개를 들어보면 구름이 보인다. 마치 실망하지 말라는 듯이, 위로하는 듯이, 요새 유행하는 힐링이라도 하듯이 검은 구름 몇 가닥이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다. 눈 한 번 깜빡거리고 나면 구름은 간 데 없고 도로 푸르디푸른 하늘에 햇살만 짱짱하다.

상고해 보면 지난 6월에 백 밀리미터 이상의 비가 두어 차례 내린 이후 비다운 비가 이쪽에서는 한 번도 없었다. 태풍이 온다 해도 비는 없이 바람만 조금 불다가 말았고, 일기예보에 비가 내린다 해도 기껏 이십 밀리미터나 십 밀리, 오 밀리, 심지어는 영점 오 밀리짜리 비소식도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10월 들어서는 아예 한 방울도 없었다. 만약에 11월도 그렇게 끝나간다면, 아, 그것은 상상으로조차도 끔찍한 일이었다.

다 자라서 출하일자를 기다리는 성패의 문제가 아니었다. 금년 바지락 농사는 어차피 망했다고 포기한 참이었다. 정말로 문제인 것은 내년도 바지락 농사조차도 망했다는 말을 벌써부터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어른 바지락이 너무 짜져버린 흙 속에서 못살겠다고 밖으로 나와 유랑을 하는 판에 새끼 바지락인들 온전할 것인가.

자동차에 실려 오느라 긴장한 종패는 갯벌에 뿌리면 그 즉시 혀를 내밀고 흙을 찾게 돼있었다. 흙을 찾아서 혀를 내밀고 탐색을 해보다가 이제부터 여기가 내 집이로구나 싶어지면 이내 흙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금년의 종패는 삶을 포기해 버린 것인가. 아니면 다른 데로 옮겨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인가. 흙 속으로 들어갈 줄을 모른다. 첫날 흙 속으로 들어갔던 녀석들도 다음 날이면 벌써 죄다 기어 나와 있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 따로 없다.


# 축양장에서 따개비의 공격으로 죽어가는 바지락

“아따야 참말로 이십 밀리만 뿌려줘도 며칠은 버틸 것인디 말이여 잉?”
“이십 밀리로 되간디. 며칠 뒤에는 어쩌고?”
“아 며칠 뒤에는 또 이십 밀리만 내려주면 되는 거제.”
“아이고, 나는 수돗물이라도 받아다가 뿌려줘 볼라네.”

입이 있으니까 심심풀이로 그냥 해보는 소리는 아니다. 농담 같은 진담이랄까, 진담 같은 농담이랄까, 하여튼 무엇이든 한 마디 말은 해봐야만 할 것 같아서 해보는 말이라고 한다면 말장난으로 들릴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말장난 같지만, 농담 같지만, 눈앞에 닥친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그 말장난 같은 짓(?)을 하고 있기도 했다.

커다란 통에 수돗물을 잔뜩 받아서 트랙터에 싣고 바다에 뿌리고 온 사람, 그는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쳤다. 수돗물을 뿌려주니 밖에 나와 있던 종패가 흙 속으로 들어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의 그는 참으로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다음날 바다에 갔다가 돌아온 그는 의기소침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물어보나마나 뻔한 일이었다. 드넓은 바다에 수돗물 몇백 리터 뿌려서 해소될 가뭄이라면 누가 왜 걱정을 하겠는가 말이다.

“이것이 그렁게 시방, 보통 일이 아니여 잉? 여자가 대통령이 되었다 해서 우리가 모두 잘살게 될 것이라고 우리 여편네는 시방도 믿고 있는디 말이여. 잘 살기는 개뿔이나 이것이 뭐냐 이것이어 잉?”

육십 년 가까이를 갯가에서 살아온 장씨 할아버지의 느닷없는 한 마디가 우리 모두를 웃겨놓았다. 헛헛한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도 간간이 섞이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문득, 누군가가 맞장구를 치고 나선다.

“아니 그렁게 말이에요. 옛날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처하면 임금이 기우제를 드리고 궁궐을 나와 초가살이도 했다는디 말이여, 잉?”

민심은 천심이라 했던가. 이 말의 해석은 분분할 수 있겠지만, 하늘의 마음을 국민이 알아서 입으로 전달한다는 뜻이라고 보면 그리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해서 패션외교라는 용어로 찬양하는 방송을 지루하게 접해온 갯사람들에게 대통령에 관한 생각은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못할 터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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