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게로 왔다 (10)





여기를 가도 국화꽃이요, 저기를 가도 국화향이 코를 간질이는 국화세상이 한 달도 넘게 지속되더니 이제 끝나려 한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 무서리가 내려서 호박잎을 시들하게 데쳐버렸던 날에 오히려 그 품위를 빛내며 향을 발산하던 국화도 된서리 앞에서는 어쩌지 못하고 그만 차츰 시들어간다.

만약에 국화조차 없는 세상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은 죄도 딱히 없이 마음이 자꾸 서걱거려지는 가을에 국화조차 피지 않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에 내가 가령 살고 있었다면, 나는 아마 집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헛된 맹세를 되풀이하며 가슴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이렇게도 서글프게 마음을 버석거리게 하는 계절에 국화조차도 없이 무슨 희망으로 집구석에 붙어 앉아서 그래도 살아야지, 살아야지, 했을 것인가 말이다.

연륜이 오래된 사당이나 제각, 혹은 정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으레 눈에 띄는 것이 국화다. 국화 중에서도 그 향기가 날카롭기로 유명한 감국을 옛 선비들은 가까이에 심어놓고 그 향과 맛을 음미했다고 여겨진다. 국화 중에서 가장 작은 꽃이면서 향기는 가슴을 푹 찔러버릴 듯이 강렬한 감국은 아마 국화차의 효시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감국은 토질이 비옥한 곳에서는 그 키가 무려 2미터에 육박하기도 한다. 척박한 땅에서는 50센티도 채 못 자란다. 키가 크거나 작거나 대궁은 허약하기 짝이 없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가늘디가는 대궁에 줄기가 헤아릴 수 없이 뻗어나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줄기에서 또 줄기가 뻗어 나와 꽃을 피우는데 그 개체수가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이 덕지덕지, 무슨 구더기떼를 연상케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도 피어난다.


# 자동차가 살인적으로 내달리는 도로변에서도 국화를 만나면 달려간다.

그 작은 꽃을 한 송이 두 송이 조심스럽게 따서 뜨거운 물에 데치거나 시루에 쪄서 말리면 크기가 꼭 작은 녹두알만이나 하다. 그것을 끓는 물에 넣으면 잠에서 깬 어린아이가 기지개를 켜듯이 꽃을 피워내면서 향기를 뿜어낸다. 노랗게 염색이 된 그 뜨거운 물을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서 코에 대고 숨을 가만히 들이마시면 새로운 세계 하나가 열린다. 여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생각도 못 해봤던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서 주인공의 눈을 지그시 감겨놓는다.

그래, 그것은 눈을 감아야 한다. 국화차를 마실 때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그 향을 맞이해야 한다. 눈을 안 감으면 안 되는 걸까? 안 된다. 꼭 눈을 감아야 한다. 그것도 한 번에 질끈 감아서는 안 되고, 가만히, 천천히, 그러니까 지그시 감아야 한다. 물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내가 임의로 그런 생각을 해 왔을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맨 처음 본 사람이 그렇게 했었으니까.

서당 훈장님이었다. 내 나이 열 살, 아니 열한 살 쯤이었을까? 아무튼 그 즈음 겨울 방학 때면 서당을 다녔었다. 학어집(學語集)을 떼고 명심보감을 읽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하루 훈장님이 국화차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마치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이 환해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마 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훈장님이 마시는 국화차를 미래의 어느 날 내가 마실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마 그 어린 시절에 해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다만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기분 좋은 신음 소리를 낮게 토해내는 훈장님의 그 뭐랄까, 혼곤한 표정이 인상적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켜보는 즐거움을 남몰래 누렸을 뿐이었다.


# 논길을 가다가도 국화를 만나면 달려가고...

국화차와 나의 처음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철도 들기 전에 시골을 떠나 도시로 무단가출을 감행하면서 나와 서당의 인연은 끊겼고, 훈장님을 가끔 생각하기는 했지만 찾아가서 인사를 드린 적이 없으니 국화차를 마시는 장면을 목도할 기회도 더 이상은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내 나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나는 도시를 떠나 시골에 집을 한 채 장만하고 마당에 국화를 심었다.

국화를 심으면서 국화차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가을이면 별나게도 허해지는 내 마음을 그나마 위무해주는 꽃으로서의 국화를 마당에 심은 것일 뿐이었다. 처음에 심은 국화는 꽃이 제법 큰 녀석들이었다. 가장 작은 것이 구슬처럼 동그랗게 피는 노란 금국 정도였다. 꽃이 크거나 작거나 모두 시장에서 포트 하나에 천 원씩 파는 것을 사다가 심어놓고 이삼 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번식을 시켰다. 금국에 비하면 꽃의 크기가 반에 반도 채 안 돼서 꽃 같지도 않아 보이는 감국을 집에 심은 것은 극히 우연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 뒤에 그 규모와 위용이 상당하게 독특한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만 경매로 넘어갔다. 정자의 소유주가 무슨 중견기업 임원이었던 까닭으로 그 기업이 해체될 때 덤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새로운 주인은 전주에서 고건축 사업을 하는데 그 정자를 고스란히 뜯어서 전주로 옮겨가 버렸다.

정자가 있었던 자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각종 식물들의 천지가 되어갔다. 칡넝쿨에 산딸기에 자리공이며 이삭여뀌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식물들 중에 감국이 있었다. 아마도 백 몇십 년 전에 정자를 세운 사람이 감국을 심어놓고 가을이면 그 꽃을 따서 더운 물에 담가놓고 눈을 지그시 감아보곤 했었으리라. 어쨌든 나는 그 중에 몇 포기를 떠다가 마당에 심어놓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의 훈장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아 그래, 나도 이제 국화차를 입에 물고 눈을 지그시 감고 그 향기를 음미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꿀 나이가 되었구나.”


# 이제 막 따낸 감국에 사마귀가~

어떤 사람은 국화차를 만병통치약에 준하는 것으로 선전하기도 한다. 고전으로 분류되는 의학서를 보면 대체로 그런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에게도 좋고 남자에게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고 어른에게도 좋다. 어디에 좋은가 하면 일단 감기에 좋고, 두통에 좋고, 생리통에도 좋고 현기증에도 좋다고 되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국화차에는 비타민A와 카로틴이 많아서 눈이 쉽게 피로해지는 사람에게 좋고, 신경이 예민해서 이런저런 여러 이유로 발생하는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 그런가 하면 혈류량을 증가시켜주는 효과가 있어서 관상동맥경화로 인한 고혈압 및 협심증, 고지혈증, 뇌혈관 순환장애 개선에도 일익을 담당하며, 미용에도 탁월한 무엇이 국화차에 함유되어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일본에서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각종 암세포의 성장 억제율이 55%에 이른다는 발표를 내놓기도 했다. 쥐를 상대로 실험해서 그런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일본 황실의 문양이 국화라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일본 쪽의 국화에 관한 연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며 편집증적이라는 느낌조차도 있다.

어쨌든 이만하면 국화차를 만병통치에 준하는 무엇이라고 부를 만도 하지 싶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식물들 가운데 약용 가능하지 않은 게 무엇이 있을까마는, 꽃은 서릿발이 성성한 늦가을에 피면서 잎은 무슨 할 일이 그리도 많다고 초봄에 일찌감치 새싹을 내놓는 국화는 확실히 다른 식물에 비해 뭔가 다름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해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이면 국화차를 만든다고 쪼그리고 앉아서 꿈지럭거려 온 내 마음에도 아마 만병통치와 관련된 어떤 관념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꽃을 포기하거나 다음 순위로 밀어내본 적은 없었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커피 한 잔을 끓여 들고 국화꽃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코를 킁킁거리는 재미를 누리고, 밤이면 달빛에 목욕이라도 하듯이 요요한 빛깔을 내는 국화 특유의 생김새를 누릴 만큼 누리다가 서릿발이 성성해지면 국화차, 국화차, 하면서 꽃을 뚝뚝 따고 물을 끓이고 해왔을 뿐이었다. 길을 가다가 야생 감국을 만나면 차를 세우고 달려가서 그것을 취해본 적도 당연히 없었다.


# 날이면 날마다 국화차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 그녀

금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달라도 많이 달라졌다. 그녀가 마술처럼 내 곁으로 오면서 달라진 게 어디 한둘일까마는, 국화와 관련된 세목은 특히 겁나게 달라져 버렸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면, 우선 길을 가다가 야생 감국을 발견하면 자동차를 세워놓고 달려가서 그 작은 꽃을 한 송이, 두 송이 그야말로 정성스럽게 따서 편지봉투 같은 것에 담아오는 이를테면 정성이 뻗쳐도 하늘에까지 뻗칠 정도로 달라졌다.

마당에서의 상황은 보다 충격적으로 달라졌다. 게다가 마당에서의 달라짐은 내가 배제된 상황이어서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그녀는 국화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바 있었다. 국화뿐만 아니라 다른 꽃들도 썩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단다. 대학 때 어떤 남학생이 꽃다발을 자꾸 가져오는데 하루는 화가 나서 그것을 던져버렸다나 어쨌다나.

사람이, 그것도 여자 사람이 어째서 꽃을 안 좋아하는가의 문제는 내가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이겠지만, 하여튼 그녀는 꽃을, 특히 국화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을 했으면서도 국화차는 좋아하기로 마음을 확고하게 굳힌 것인지 어째서인지 틈만 나면 국화꽃 송이를 뚝뚝 따버린다. 아침에도 따고 낮에도 따고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저녁 무렵에도 국화를 따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보통 심란한 게 아니다.

꽃을 볼 만큼 보다가 따도 늦지 않다고, 제발 좀 그렇게 하자고 애걸을 하다시피 해보지만 그녀에게는 마이동풍이다. 입으로는 알았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도 다음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 보면 새로 핀 꽃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아니 사라져버렸다. 꽃송이가 잘려나간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는데 그 모양이 내게는 마치 목이 댕겅댕겅 잘려나간 시체라도 보는 것 같아 엄청나게 속이 상하지만, 그녀는  히히히 웃어대면서 “알았어요, 내일은 안 딸게”하고 짐짓 애교를 잔뜩 떨어대며 위기를 모면하고는 다시 내일이면 또 꽃송이를 죄다 따버리는 것이었다.


# 데쳐서 말리는 중인 금국

그렇게 만들어놓은 국화차를 가령 시중 가격으로 환산하자면 족히 이백 만원어치는 될 것이다. 얼마 전 사촌 누이가 무슨 축제 현장을 갔다가 국화차를 사왔는데 한줌도 안 되는 양이 4만원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대체 이 많은 국화차를 어떻게 하려고? 내다 팔려고? 하고 물어보면 그녀는 못 팔 것도 없지, 하는 투를 보이다가는 이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대며 이런 말을 한다.

“여기저기 나눠줄 데도 많고, 그리고 또, 앞으로 찻집을 할 거라니깐요.”

찻집, 그래, 그녀에게는 그런 또 하나의 미래가, 꿈이 있었다. 소설을 쓰는 게 첫째 꿈이라면, 찻집은 두 번째 꿈이었다. 아니다. 소설과 찻집은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실은 한 몸이었다. 찻집을 열어놓고 찾아오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야기를 나누며 그 속에서 소설의 소재를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런 꿈은 사실 눈물겨운 데가 있기도 하다. 날로 달로 인구가 줄어드는 시골에서 한 마디라도 말을 섞을 만한 사람 한 명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렇다고 매번 여기저기 사람을 찾아서 고개를 기웃거리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므로 그녀는 찻집을 열어놓고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도록, 한 번 왔던 사람은 또 오고, 또 오고 그렇게 자주 찾아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찻집을 자신의 두 번째 꿈으로, 미래로 상정해놓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는 그녀가 아직 발표하지 않은, 혹은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제3의 목적, 이라기보다는 소망을 본다. 김수복이라는 저 인간,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돈을 버는 소질이나 재주는 없어 보이고, 그렇다면 내가 찻집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갈 방도를 미리 찾아놔야지 어쩌겠는가 하는, 국화차에 몰두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는 그녀의 그런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밖에서 돌아오면 댕강댕강 목이 잘려있는 국화를 보고 황당해하면서도 단호하게, 과감하게 안 돼, 소리를 못하고 거의 우는 소리로 “아이 이게 뭐야, 처참하게” 소리나 중얼거리듯이 하고 있는 나는 결국 그녀의 찻집 운영에 동참할 준비를 지금부터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보는 게 아마 옳을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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