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미를 알랑가 몰러…모르지?”
“이 재미를 알랑가 몰러…모르지?”
  • 승인 2013.12.1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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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11)




#  벼이삭을 줍다가 추워서 얼이 든 그녀


수확이 끝난 들판에서 벼이삭을 줍는 재미는 독특하다. 이 독특함을 무슨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듣는 사람이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내가 아직 모른다. 사실을 보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문제까지는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가끔 만나는 후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할라치면 나는 매번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 재미를 알랑가 몰러, 모르지?”

이런 방식의 대답은 사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는 알지만 너는 아마 모를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모를 것이다, 라는 전제가 깔린 이런 공격적인 언사 앞에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후배 녀석의 질문이 이미 예의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는데 어쩔 것인가.

“벼이삭을 주우러 간다고요? 아따 형님도 참말로, 그게 뭔 청승이다요?”

내가 벼이삭을 주우러 간다고 했을 때 돌아온 후배 녀석의 반응이 그것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때의 웃음은 물론 온전한 웃음이 아니었다. 오, 그렇구나,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구나, 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득의만면 같은 것,  웃음 자체가 화살이나 총알 같은 무기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말이다. 

이삭줍기의 재미, 그것은 사실 말이 필요 없다. 스스로 해보면 알게 된다. 물론 아무나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이삭줍기 자체를 빈곤과 연계해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생각의 촉수가 그런 쪽으로 돌아가게끔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삭줍기의 재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려하기보다는 내가 왜? 하는 질문에 먼저 답을 해야 하는 곤혹스런 상황에 빠지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삭을 줍는 내 마음은 꽤나 외롭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가능한 한 사람이 없는 데서, 사람이 나를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데를 찾아다니며 나 혼자만의 재미를 누려야 했으니까. 가령 이런 것이다. 내가 이삭을 줍고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뭐하냐고 묻는다. 벼이삭을 줍는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 보기를 마치 정신병자 보듯이 한다.



가끔은 논배미 주인이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쫓아오기도 했다. 자기 논에서 웬 사내 녀석이 어슬렁대고 있으니까 수상해서 달려온 것이다. “아니 시방 남의 논에서 뭐하는 짓이라요?”하고 주인이 물었고, 나는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아 예, 나락이 통째로 많이 떨어져서, 쫌 줍느라고요” 했더니 주인장 가라사대 “허허이 참 내, 참, 별, 별”하면서 한참이나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그 모습이 내게는 할 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차마 입에 담지를 못하고 그저 쩔쩔매는 것으로 비쳐지던 것이었다.

물론 요즘 세상이라고 이삭 줍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인삼을 캐고 난 뒤의 인삼 밭에는 남녀노소가 떼로 몰려들기도 하고, 고구마를 캐고 난 뒤의 고구마 밭에도 역시 꽤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런 현상이고, 따라서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삼이나 고구마 이삭은 현금과 동의어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서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도 꽤 있으니까.

하지만 벼이삭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벼이삭은 인삼이나 고구마에 비해 너무 흔해빠지게 널려 있고, 값도 싸고, 그래서 하루 종일 주워봐야 자기 일당은커녕 껌값이나 겨우 될까 말까 할 정도의 허섭스레기로 파악되는 까닭에, 그래서 그것을 줍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거의 어렵다.

그런데 나는 해마다 그것을 줍고 다닌다. 왜? 그 이유는 나도 뭐라고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적어도 지나가는 사람이 벼이삭을 줍고 있는 내게 뭐하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을 즉석에서 납득시킬 만한 말재주가 내게는 없다. 그러다 보니 나를 발견한 사람 앞에서 나는 부득이 정신병자 비슷하게 되어버린다.

“그것 참, 사람은 멀쩡하게 생겼고만, 허헛 참.”

그렇게 고개를 회회 저어대는 사람을 반복적으로 만나면서 나는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나를 노출시키지 말자는 맹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삭을 줍는 나와 이삭을 줍지 않는 그가 부딪히면 서로가 민망하기도 하려니와,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살짝 맛이 간 게 아닌가 싶어져서 사람을 피하게 되던 것이었다. 물론 내가 좀 더 강인한 사람이라면 누가 보든 말든 내 하고 싶은 대로만 했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남의 입질에 오르내리는 것을 못 견뎌하는 성격이고 보니 어쩔 것인가.


# 잠깐만 주워도 이만큼이다.

하여튼 그랬다. 도시 생활 정리하고 시골에 내려온 이후 십 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나는 그렇게 숨어서 이삭을 줍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바꿔 말하면 십 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도 이삭 줍는 재미를 함께 누릴 만한 동지(?)를 못 만난 셈이었다. 그런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하긴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아니, 아니, 그보다는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지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대단한 성취에 이른다는 말에나 비유를 할까?

어쨌든 그녀가 왔다. 내 곁으로, 얼추 아버지뻘이나 되는,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이십 년, 내가 세상에 태어난 뒤로 이십 년이나 기다렸다가 태어난 그녀는 신기하게도, 겁도 없이 내 곁으로 와서 ‘내여자’가 되어버린 그녀는 의외로, 뜻밖에도 이삭줍기의 재미를 알고 있었다. 아니다.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그것을 한 번 해보는 순간 그 행위 속에 내재된 재미를 발견하고 누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아마 옳을 것이다.

그녀는 농사꾼의 딸이 아니었다. 그래서 농사와 관련된 추억도 없었고, 농사의 고달픔 속에 숨어 있는 즐거움을 선험적으로 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한 마디로 말해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나와는 근본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벼이삭 줍기의 재미를 안다. 알 뿐만 아니라 충분히 누리기도 한다. 오, 이것이 무엇이냐? 첫날 이삭줍기에 나섰다가 돌아오면서 나는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왜 그런 노래를 불렀는가는 나도 모른다. 하여튼 그런 노래를 혼자 속으로 반복해서 불렀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벼이삭 줍기에 나섰다. 오늘 벼이삭이나 주우러 갈까?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마자 그녀는 그래요 그래, 하면서 금방 장갑을 챙기고 있었다. 그때 보여준 그녀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나는 아마 오래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몹시 추웠으니까.
바람도 제법 거칠고, 손도 시린 날이었다. 하늘에 구름은 없어도 구름이 잔뜩 낀 것처럼 을씨년스런 날이었다. 처음 삼십여 분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가 떡떡 마주칠 정도의 추위가 느껴졌다. 추위 속에 덜덜덜 떨어가면서, 검불을 뒤질 때마다 일어나는 먼지들 때문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서 재채기에 기침에 콧물을 줄줄 흘려가면서도 그녀의 입에서는 도대체가 그만 하고 돌아가자는 말이 안 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시험하자는 마음 같은 것은 내게 전혀 없었다. 나는 다만 그녀와 함께 벼이삭을 줍는 그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아무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벼이삭만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우리는 공부도 하고 있었다. 보라, 벼이삭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이 깔려 있는 논이 있고 그렇지 않은 논이 있다. 까닭은 무엇인가?


# 어느 따뜻한 날의 벼이삭줍기

그 이유에 대해 그녀와 나의 생각은 금방 일치를 보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이삭은 재래식 농법 대비 적어도 십 퍼센트는 늘어났다. 이 논배미 저 논배미 다니며 이삭을 줍다 보면 그 논을 기계로 관리하는 사람의 심성이랄까 성격까지도 엿볼 수 있다. 어떤 논은 열 걸음 이상 걸어야 벼이삭 두세 개를 주울 수 있는 반면, 어떤 논에서는 한 자리에 앉아서 스물, 서른 개의 이삭을 주을 수도 있다.

논갈이도 그렇고, 모내기도 그렇고, 수확 또한 농지를 소유한 사람이 직접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농인 경우는 직접 하지만, 소농은 대개 위탁을 한다. 평당 얼마씩 그렇게 가격을 정해놓고 작업을 하다 보니 기계를 소유한 사람의 인품에 따라 정갈하게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수년간 벼이삭을 주우러 다녀본 내 경험에 따르면, 나이가 젊을수록 물량위주의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그나마 연치가 지긋한 사람은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알곡이 땅에 떨어지는 것 자체를 속상해 하며 가능한 한 바닥에 깔리는 것이 없게 하고자 노력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일부를 버린다 해도 그날 하루 처리하는 단위면적이 넓어지는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하는가, 등등 그런 추상적인 주제를 놓고 그녀와 나는 그 추운 날 남의 논배미 안에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거창하게 무슨 토론을 했다기보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는 말이 옳겠지만, 지구 전체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바로 이웃인 북한에서만도 굶어죽는 사람이 다수 발생한다는 뉴스가 보급되는 현실에서 함부로 버려진 식량을 취미 삼아 줍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사뭇 엄숙하기도 하던 것이었다.

마을마다 한두 명씩은 이삭줍기로 생계를 해결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우리 마을에서는 석탄댁이 그 방면으로 달인의 경지에까지 올랐었다. 뭔가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들판을 그냥 배회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좀 애매한 자세의 그녀를 며칠 전에도 보고, 어제도 보았는데 오늘도 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그녀의 집에 가서 보면 벼가 두세 가마씩이나 토방에 쌓여 있곤 하던 것이다.


# 주워온 벼이삭을 억수로 좋아하는 오리들

이삭줍기가 석탄댁의 유일한 직업은 아니었다. 이웃에서 누군가 품을 팔라 하면 가서 일을 했고, 일이 없을 때는 산에서 도라지를 캐기도 하고 버섯을 따기도 하고, 산밤이 익는 계절에는 또 그것을 따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벼 수확이 끝나면 벼이삭을 줍고, 한 달 가까이나 벼이삭을 줍고 난 뒤에는 또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우렁이를 잡으러 다녔다.

석탄댁이 하는 그 많은 일들 중에서 벼이삭 줍기는 특별히 내 기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까닭은 아마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넓어진 들판과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아진 그녀가 섞여져서 이루어내는 어떤 장엄한 풍경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내내 꽉 차있었던 들판이 가을 수확과 동시에 텅 비어버리는 그 마술 같은 현상, 그 허허하게 텅 빈 들판을 돌아다니며 가끔 허리를 숙이는 그녀의 아주 작은 몸, 그것은 한 폭의 거대한 그림이었다.

거대한 들판이 아주 작은 석탄댁을 꼭 품어 안고 있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석탄댁 자신이 자발적으로 들판의 일부가 되어 저벅저벅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한, 보고 또 보고 다시 봐도 또 보고 싶어져서 눈을 갸름하게 뜨고 한없이 보고 있어야만 했던 내 어린 시절의 그 한 폭의 그림은 저 유명한 밀레의 이삭줍기 그림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밀레의 이삭줍기가 세 명의 남루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배치한 다음 후경으로 부자들의 낫가리 쌓는 모습을 슬쩍 보여주는 방식으로 빈부격차의 문제점을 얘기하고 있었던 반면, 내 어린 시절의 석탄댁은 아무도 없이 그냥 그녀 혼자서 외롭게, 외롭고도 외롭게 혼자서 이삭을 줍다가 그녀 자신이 어느 순간 마치 허허하게 텅 빈 들판을 채워주는, 혹은 받쳐주는 기둥인 것처럼 자연과 한 몸으로 뒤섞여져서 보고 있는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해주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 벼이삭을 줍는 사람도 없고, 그것으로 생계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벼이삭 줍기는 일종의 취미생활인 셈이다. 그렇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주워온 벼이삭을 찧어서 쌀을 만들고, 그 쌀로 밥을 지어먹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달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말이다.

우리가 벼이삭을 줍는 마음은 물론 떨어진 알곡이 아까워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새나 쥐들의 먹이로 사라지거나 혹은 썩어서 없어질 벼이삭이 아깝다는 마음은 최초의 동기일 뿐 목적은 아니다. 주워온 벼이삭을 오리에게 주고, 오리가 그것을 맛나게 먹어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그 또한 부가적인 즐거움일 뿐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그녀와 나는 왜 벼이삭을 줍고 다니는 데서 오는 어떤 것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그 ‘어떤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안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겠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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