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12)



# 너무 진지한 그녀

무게 십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거대한 곡괭이를 휘둘러서 땅파기를 하루 4시간씩 사흘 정도 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야 뭐 그저 그런 몸 풀기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어쩌다 한 번이거나 혹은 오랜만에 곡괭이를 잡은 사람에게는 노동도 그런 중노동이 없다.

나는 뭐랄까. 손과 발을 동시에 움직이는 일을 두려워하는 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십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곡괭이를 4시간이 넘게 휘두를 만한 체력도 아니었다. 그런데 겁도 없이 4시간 이상 그것도 사흘씩이나 그 짓(?)을 했다. 그렇게 해서 그만 몸살이 나고 말았다.

약초를 캐러 나섰던 길이었다. 작은 곡괭이가 있었다면 아마 몸살까지는 안 갔을 것이다. 집에 있는 큰 곡괭이가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작은 곡괭이를 새로 구입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러니 결국 내가 몸살을 불러온 셈이었다.

몸살이란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한 전략으로서의 꾀병이거나 혹은 내가 나에게 주는 경고라는 게 전통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역시 그런가 보다. 이불을 덮고 누운 채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비몽사몽의 혼몽한 시간을 10시간 정도 보내고 나니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새벽 4시 즈음, 말끔해진 정신으로 국화차 한 잔을 마셨다. 이때부터 이런저런 온갖 생각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간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일까.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가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깨어 있을 때 가는 것인가. 한 번 간 시간은 다시 오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시간이라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저기 어디 멀리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그렇다. 우리는 가끔 시간의 문제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들여다본다고 했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냄새도 없고, 바람처럼 살랑거려서 내 피부를 자극하거나 기분을 바꿔놓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간이 갔다거니, 왔다거니 하며 깜짝 놀라기도 하고,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신기해서 눈을 잇달아 깜빡거리기도 한다.


# 약초를 겁나게 캤다고,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

“아이 참, 언제 이렇게 되었지? 한 달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대, 그대, 봐요, 응? 봐봐. 벌써 팔 개월이나 지났네?”

그녀가 나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고 있는 나도 역시 이상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녀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이상해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혼자서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겠다는 결심까지 했던 내 옆에 지금 그녀가 와 있는 것이다.

“그렇네 정말, 언제 이렇게 되었지?”

넋이라도 나간 듯이 중얼거리는 나, 처음은 아니다. 그녀와 함께 해온 팔 개월은 신기함과 이상함의 연속이었다 해도 뭐 그리 틀리지 않다. 어떤 날은 대단히 많은 세월이 흐른 것 같지만, 또 어떤 날은 세월이 흘러가기는커녕 후퇴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십 년 된 것 같은데, 겨우 팔 개월밖에 안 됐네?”
“정말이네. 정말로 그렇네?”

우리는 늘 바쁘고, 그리고 또한 늘 게을렀다. 우리는 늘 깨어 있으면서 잠들어 있었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으면서도 깨어 있었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그녀는 책을 보거나 노트북을 열어놓고 키보드를 두드렸고, 그녀가 잠들어 있을 때 나는 영화를 보거나 키보드를 두드렸으며, 둘이서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고, 둘이서 나란히 팔짱을 끼고 시장 거리를 배회하기도 했으며, 마당에서 이런저런 온갖 일들을 처리하거나 혹은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었다.


# 다니다 보면 가끔 이런 예술 같은 집을 만난다.

그런 어느 한순간에도 우리는 시간이 간다거나, 온다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몸으로 시간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요컨대 어 저기 시간이 있네? 하는 식의 대화를 나눈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그런데도 세월은, 시간은, 간 것인지 온 것인지 하여튼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가을도 가고 겨울이 왔다고,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신기하고 이상하고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눈을 잇달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 그리고 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 왔다.

농촌 살림의 특징을 들자면 아마도 내가 언제라도 주체적으로 무엇이든 일을 기획해서 주인공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게으르고 싶다면 언제라도 핀둥핀둥 게으름을 피울 수도 있기는 하지만, 도시의 골방에서처럼 하루 종일 게으르고 있기는 도무지 어렵다.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생각나고, 바람소리도 궁금하고 새소리도 궁금하고, 빗소리가 들리면 손님이라도 온 듯이 나가보고 싶고 눈이 내리면 또 그 눈과 함께 놀아보고 싶어지는 것을, 어쩔 것인가. 내가 자연이 좋아서 자연과 함께 놀자고 투정을 부리듯이 자연이 또한 나에게 게으름만 피지 말고 함께 놀기도 하자고 보채는 것이 농촌 살림인 것을 어쩔 것인가 말이다.

산에 들에 눈이 본격적으로 쌓이기 전의 12월은 약초를 캐러 다니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그렇게도 성성하게 푸르던 풀들은 모두 시들거나 쓰러졌고, 눈앞을 가로막던 나뭇잎들은 모두 떨어져 내렸고,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전전긍긍해야만 했던 독사들도 겨울잠에 빠져든 이 계절에는 딱히 무슨 중무장을 할 필요도 없이, 그저 간단한 점퍼 차림에 목장갑이나 손에 끼고, 곡괭이든 뭐든 연장이나 하나 챙겨서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와 뒷산으로 오르기만 하면 된다.

이 시기의 산은 그림처럼 아름답게 단아해서 볼 것도 많고 놀랄 일도 많다. 생리통에 아주 좋다고 하는 노박넝쿨 열매가 설치미술처럼 여기저기 바위턱에 걸려 있는가 하면, 찔레며 호랑가시나무에 냉감 등등 빨갛거나 노란 열매들이 벌거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마치 꽃처럼 열려서는 그냥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멀리서 보면 꽃 같은 노박넝쿨


그것들을 보는 재미에 취해 있노라면 도토리를 찾는 다람쥐의 발자국 소리가 수상해서 귀를 쫑긋거리게 되기도 하고, 커다란 날개를 갑자기 파닥거리며 꿩, 꿩, 소리와 함께 낙엽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꿩들의 기척에 그만 굴러 떨어질 듯이 놀라기도 하지만, 놀라움이 공포나 두려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저 가볍게 한 마디, 아유 깜짝이야, 소리나 중얼거리며 빙긋이 웃고 있노라면 어느새 새로운 풍경이 눈을 가득 채우고 있기 마련이다.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꽃처럼 화려한 색깔로 열려 있는 열매들은 배고픈 새들의 먹이가 되어 차례차례 사라져 갈 것이다. 하지만 새들은 열매의 껍질 부위만 양분으로 흡수할 뿐 씨앗 부분까지 전부 소화시켜 버리지는 않는다. 새들은 각종 열매들의 씨앗을 뱃속에 넣고 다니며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하는 식으로 배설을 하고, 다음해 여름이면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하는 식으로 새로운 싹이 나서 자라게 될 것이다.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자던 당신이라 했던가. 사람들은 그런 노래까지 만들어서 열심히 불러야만 할 정도로 미래를 불안해하며 과거를 원망도 하지만, 새와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세상에서는 그런 노래가 필요 없다. 굳이 그런 노래가 없어도, 그런 맹세와 언약으로 스스로를 묶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이것이야말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의 세계가 아닐까.

무위(無爲), 뭔가를 억지로 꾸며내지 않는 것, 그래서 자연스럽고, 그래서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 하지만 사람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무위가 어렵다. 사람이 머물다가 떠난 자리에는 그곳이 어디가 됐든 뭔가를 애써 억지로 꾸며낸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산속을 다니다 보면 그런 흔적을 참 많이도 발견하게 된다. 오래된 나무나 바위에 새겨진 각종 이름이며 사랑해, 사랑해, 같은 낙서는 기본이고, 공들여 지었을 건축물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무너져 간다기보다 이미 무너졌다고 보는 게 옳을 법한 오래된 집 한 채가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비바람을 많이 타는 서쪽의 기둥 하나가 밑에서부터 썩어 들어간, 그리하여 주저앉는 기둥과 함께 하인방이 무너지고 중인방이 무너지고 상인방이 제구실을 못하게 된, 마침내는 허공에 뜬 들보가 우지끈 부러지면서 지붕 한쪽이 삼각형으로 아슬아슬하게 내려앉은 집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열풍이 산골짜기를 제대로 훑고 지나갔음을 오롯이 증명하고 있는 집이기도 했다.


# 새들의 겨울양식 찔레

황토로 이루어진 벽채와 지붕의 슬레이트, 그 부조화의 조화 속에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우리의 현대사가 녹아 있었다. 요새는 일급 발암물질이라 해서 애물단지가 되었다지만, 새마을운동 당시의 슬레이트는 만능열쇠급 대우를 받았었다. 초가집은 해마다 이엉을 바꿔야하는데 슬레이트는 그럴 필요가 없고, 초가집은 쥐들이며 새들이며 온갖 동물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데 슬레이트 지붕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정부 당국자들의 선전은 매우 집요하고 때로는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세상을 오래 살아오신 분들은 정부 당국자들의 선전을 믿지 않았다. 우리의 작은 할아버지께서도 정부 당국자들의 선전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지붕개량을 반대했지만, 반대가 먹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안 된다고, 못 한다고, 두 팔을 쫙 벌리고 반대를 하다가 끝내는 흙바닥에 벌렁 드러누워서 나를 죽이고 지붕개량을 하든 말든 멋대로 하라고 외치셨지만, 정부 당국자들의 머리 씀씀이는 귀신과도  같아서, 할아버지를 상처 하나 없이 들쳐 업어다가 방안에 가두고 지붕개량을 기어이 끝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해의 겨울은 참으로 추웠었다. 이불처럼 포근한 볏짚 이엉을 모조리 걷어내고 얄따란 슬레이트를 얹어놓았으니 안 추울래야 안 추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오늘날의 슬레이트는 일급 발암물질로 규정되었다. 초가집이 가난의 상징이라고, 그래서 슬레이트로 갈아치워야 한다는 발상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다 보면 정통성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세”류의 구호에 살짝 가려져 있는 그것,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밀어붙인 동기가 경제문제 때문이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놓는 그것.

그것은 전통과의 단절이었다. 우리 것은 나쁘거나 최소한 의심스럽다는 인식의 확산이었다. 일제가 미처 다하지 못하고 항복해 버린 민족성 말살 정책이 새마을운동의 기본 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동네마다 개성을 갖고 전해오던 풍물이며 굿 같은 여러 유형의 놀이문화가 새마을지도자의 지도(?)에 따라 창고 깊숙이 처박히고 말았다. 이른 봄이나 늦은 가을이면 저마다 곡괭이를 들고 약초를 캐다가 식구들 보약을 만들던 풍습 또한 어리석은 짓으로 매도되어 사라져 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도덕적으로 열등한, 그래서 정통성이 없는 친일세력과 쿠데타세력이 손잡고 이루어낸 새마을운동의 이러한 민족성 말살의 성과(?)는 우리 주변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놀이문화는 팔십 년대에 소설가 황석영 등이 주도해서 거의 모든 대학이 참여하는 문화운동을 거치면서 가까스로 복원이 됐다지만, 자기 몸의 상태를 스스로 감지해서 약초를 캐러 다니던 그림은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 타래박

민족의학을 주창하는 장두석 선생 등의 노력으로 그나마 명맥은 유지되고 있다지만, 농촌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디가 조금 이상하다 싶으면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서 독한 약을 한 움큼씩 받아오신다. 그것은 고스란히 약물중독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해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하루라도 약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혹은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약물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거나 이미 되어버렸다. 그 약값을 벌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깊은 간난신고가 필요한가.

아주 흔한 말로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내 몸의 상태를 내가 진단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만큼 약효가 높은 약도 없다. 비유를 하자면 자신감이란 결국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이런 자신감을, 이런 만병통치약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세력들이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모조리 끊어버렸다.

그렇다고 그것이 영원할까. 그들이 강제로 끊었다고 아주 끊어졌을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이웃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새마을운동의 세례를 하도 혹독하게 받은 까닭으로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할 기력조차 없는 상태고 되고 말았지만, 우리는 그분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길라잡이로 곡괭이를 휘둘러서 잃어버린 시간을, 묻혀진 전통을 캐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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