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대기업에 떨어진 ‘지상명령’



새해가 됐지만 재계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저마다 ‘대대적인 변신’을 선언하고 나서며 자구책 찾기에 여념이 없다. 지난해 말부터 불기 시작한 감원 한파는 철도 노조 파업 등으로 더욱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재계에게 2013년은 잔혹했다. 한 때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었던 동양그룹, STX 그룹, 웅진그룹이 휘청했다. 동부그룹과 LIG그룹, 한진해운 등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60여년간 철옹성 같이 경영권을 지켜왔던 대한전선도 칼을 빼들 수밖에 없었다. 현대그룹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총수들은 검찰 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새해를 맞아 각 그룹들이 ‘탈바꿈’을 외치고 있는 배경엔 이 같은 위기의식이 깊이 깔려 있다. 환골탈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재계 분위기를 살펴봤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우연의 일치일까. 지난해 12월 중순 전국경제인연합회 신축회관 준공식에 참석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재계에 이렇게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21세기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국민에게 더욱 신뢰받고 모든 경제주체들이 함께 상생의 경제를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세계적인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속에서도 3년 연속 무역규모 1조달러를 달성한 재계지만 새해를 시작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함께 걸어가던 동반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지난해 중도탈락하거나 휘청거리고 있다. 

“지금은 위기 그 자체”

자극을 받은 재계의 신년 메시지는 “변화와 혁신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자”로 요약된다.
기본적으로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재계 총수들은 대체로 원화 강세와 정체된 시장을 의식한 듯 신성장동력 발굴에 나서겠다고 의지를 내비쳤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신경영 20년간 글로벌 1등이 된 사업도 있고 제자리 걸음인 사업도 있다. 그런데 선두사업은 끊임없이 추격받고 있고 부진한 사업은 시간이 없다”고 강조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앞으로 경영 환경은 위기 그 자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어 “원화 강세와 경기 회복 지연 등 경제 여건은 여전히 어렵다”며 “선도 기업의 독주는 더욱 심해지고 다른 범주에 속하던 기업과의 경쟁도 많아졌다. 앞서 나가던 기업들도 한 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기회를 놓치고 아성마저 무너지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구자열 LS그룹 회장은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성장 둔화, 환율 및 구리 가격 하락과 변동폭 확대 등으로 LS의 주력사업인 전력과 에너지 분야의 경영환경은 악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도 “기술의 융복합에 따른 산업의 변화로 불확실성이 더욱 증대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

그 해결책은 오직 변화와 혁신이라는 게 총수들의 생각이다.

“5년 전, 10년 전의 비즈니스 모델과 전략, 하드웨어 프로세스와 문화,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과 제도, 관행 등을 모두 떨쳐버려야 한다.” (이건희 회장)

“이 정도 만들면 잘 팔릴 것이라는 공급자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고객의 삶을 바꾸겠다는 신념과 열정을 제품과 서비스에 담아내야 한다.” (구본무 회장)

“불확실한 경영환경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기존에 해오던 방식만으로는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으며, 남의 뒤만 쫓아서는 트렌드를 선도하는 혁신을 이뤄낼 수 없다.” (허창수 GS 그룹 회장)

청와대가 꺼내든 화두도 비슷하다. 박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세우겠다”며 투자 관련 규제도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경제 침체 문제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중점 추진 과제로 ▲비정상적 관행의 개혁 ▲창조경제를 통한 역동적 혁신경제 구축 ▲내수 활성화를 통한 내수와 수출의 균형 등으로 꼽았다.

그는 특히 “서비스산업 육성이 내수활성화의 핵심”이라며 “이를 위해선 투자의 가장 큰 장벽인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뜨는 별, 지는 별

이처럼 재계의 위기감이 깊은 것은 현실적인 고민도 있지만 지난해의 경험이 뼈아프기 때문이다.

2013년은 ‘재계 잔혹사’라는 말이 나올 만큼 부침이 심했던 해였다. 고속을 자랑했던 STX, 웅진, 동양이 차례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현대 한진 두산 동부 한국가스공사 이랜드 부영 효성 한국지엠 등은 연결부채비율이 300%를 돌파했다.

그 신호탄은 웅진그룹에서 시작됐다. 그룹 주력 계열사였던 웅진코웨이와 웅진패스원, 웅진케미칼, 웅진식품은 매각됐다. 초고속 성장의 대명사였던 STX는 10여년 만에 재계 13위까지 오르며 각광을 받았지만 무리한 사업과 금융위기로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경고음이 들어온 기업들도 적지 않다. 연결부채비율 200%를 넘는 그룹만 해도 한라 하이트진로 한진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홈플러스 한솔 코오롱 한화 동국제강 대성 LS 등이 있다.
또 현대 한진 동부 효성 한라 등은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현대그룹이 눈물을 머금고 주력 계열사를 팔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다.

기존 그룹들이 주춤하는 사이 조용히 실력을 키워온 그룹들에겐 올 한 해가 기회가 될 수 있다. 아주그룹, SM그룹, SPC 그룹, 넥센 그룹 등이 꼽힌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시작하는 만큼 재계의 올 한해는 바쁘게 움직일 것으로 전망된다. STX와 동양을 시작으로 동부와 현대, 한진 등이 내놓은 매물이 엄청나다. M&A 시장 규모가 30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기업지배구조 변화 역시 2014년 재계를 강타할 변수 중 하나로 꼽힌다. 대기업들은 일감 몰아주기 과세 강화로 계열사 간 거래 비중을 낮춰야 한다. 신규 순환출자가 금지됨에 따라 확장 경영에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환율 변화도 대부분의 기업에 큰 영향을 미칠 요소다. 올해도 엔화 약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수출 기업들은 비상이다.

이와 함께 일부 대기업들은 기존 순환출자 고리를 정리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이런 순환출자 해소 속에 일부 대기업들이 경영권 승계 작업에 본격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수많은 변수와 ‘위기론’ 속에 2014년, 재계의 말발굽이 어디로 향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김범석 기자 kim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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