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복 지음/ 알마 출판사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빈곤과 억압에 시달렸고 해방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 1930년대에 출생한 이들은 인생의 일관된 의미를 찾기보다는 생존과 최소한의 생활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파편처럼 부서진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속에서 삶의 근본 의미를 집요하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러는 한편, 일제하에서 자연스럽게 다중언어 사용자가 된 것은 아픈 역사가 남긴 일종의 수혜라고도 할 수 있다. 이어령, 김우창, 김열규 등 강점기 세대가 해방 후 세대보다도 인문학적 바탕이 넓고 튼튼했던 것도 이런 바탕에서 비롯된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한국 지성사의 맥락 속에서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자, ‘둥지의 철학자 박이문’을 다시 만난다.

이 책 《삶을 긍정하는 허무주의》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총체적 앎을 추구한 원로 철학자와 젊은 시절에 그의 책을 읽고 성장한 다음 세대의 사회학자가 오랜 기간 교유交遊한 결과물이다.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정수복은 박이문과의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심도 깊은 인터뷰를 진행하고 100권에 달하는 그의 저작을 모두 섭렵했다. 특히 노철학자에 대한 경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그 삶에 대한 이해와 인정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비판·비평하는 사회학자의 시선이 돋보인다. 그 결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박이문의 면모를 세계인, 철학자, 시인, 종교인, 작가, 지식인으로 정리하고, 다차원 간의 관계를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낼 수 있었다. 지적 투명성, 감성적 열정, 도덕적 진실성에 대한 천착이 시와 수필, 철학논문 등의 다작을 거쳐 ‘둥지의 철학’으로 모이는 철학자의 일생이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이 책은 박이문의 방대한 창조 작업을 최초로 정리한 지적 전기로서 학문사에서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치열한 삶을 살아낸 우리 시대 어른의 한 초상으로 기록될 것이다.


정리 이주리 기자 juyu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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