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풍, 재벌 회장들 ‘정조준’ 어디까지?




재계에게 있어 2013년은 ‘잔혹한 해’로 불릴 정도로 매서웠다. 동양, STX, 웅진이 휘청거렸고 동부그룹과 한진해운, 현대그룹도 마지막 칼을 뽑아야 했다. 하지만 새해가 됐다고 해서 분위기가 좋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어둠의 그림자가 몰려오고 있어 불안감은 가중되고 있다. 설 연휴 이후 도마 위에 오를 재계 총수들을 살펴봤다.


      # 왼쪽부터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이석채 전 KT 회장



바람은 차고 어둠은 짙다. 희망찬 쌍마의 말발굽 소리는 남의 얘기로만 들릴 정도다. 일부 재계 총수들을 둘러싼 연초 풍경이다.
지난해부터 검찰 수사를 받아온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이 그룹 총수 중 올해 처음으로 구속됐다. 현 회장은 사기성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발행, 판매로 투자자들에게 1조원대 피해를 끼치고 부실 계열사를 부당 지원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현 회장은 지난 2010년에도 ㈜동양의 한일합섬 인수,합병 과정에서 배임 혐의로 기소됐지만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하지만 지난해 ‘투기등급’이었던 부실 회사채와 CP를 판매, 대국민 사기극 여론이 들끓으면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랐고 결국 영어의 몸이 되는 불명예를 쓰게 됐다.

구속된 ‘재계 신사’

검사 출신인 현 회장은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의 맏사위다. 지난 2010년 배임 혐의로 기소되기 전까지 재계에서 신사로 통했다. 30년간 그룹을 경영하면서 단 한 번도 불미스러운 일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고 위기도 수차례 무난히 넘겼다. 지난 2008년 주력업종인 시멘트, 건설이 휘청였지만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이겨냈다.

법원은 현 회장과 관련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 정도, 증거인멸의 우려에 비춰볼 때 구속 사유가 인정된다”며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현 회장과 함께 정진석 전 동양증권 사장과 이상화 전 동양인터내셔널 사장, 김철 전 동양네트웍스 사장에 대해서도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현 회장은 또 지난 2012년부터 1년6개월 동안 적절한 담보없이 동양파이낸셜대부를 통해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등 계열사에 1조5621억원 상당을 대출해주는 등 부당 지원한 혐의도 사고 있다.
현 회장에 대한 구속이 심상치 않은 것은 재벌 총수들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줄 이을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줄줄이 재판 ‘리스트’ 올라

설 연휴 이후 재벌 총수들과 관련된 재판은 ‘리스트’로 불릴 만큼 적지 않다.
최태원 SK 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 화학 회장의 형사 재판이 기다리고 있다.

탈세와 횡령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현 회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 최초로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500억원 대의 세금을 포탈하고 900억원 대의 그룹 자산을 횡령한 혐의다. 검찰 기소 내용이 그대로 인정된다면 5년 이상의 중형 선고도 불가피하다.

이 회장은 2000억원대의 비자금 조성 및 탈세,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됐다. CJ그룹 임직원을 동원해 국내외 비자금을 차명으로 운용, 관리하면서 세금 546억원을 탈루한 혐의와 국내외 법인 자산 963억원가량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일본 도쿄 소재 빌딩을 매입하면서 CJ 일본법인에 569억원의 손실을 끼친 혐의도 있다.

역시 횡령 및 배임 혐의를 받고 있는 박찬구 회장에 대한 선고공판도 열린다. 김승연 회장은 당장 가시밭길이다. 지난해 12월 열린 결심 공판에서 1?2심과 같은 징역 9년에 벌급 1500억원을 구형했다.

김 회장은 2004~2006년 위장계열사의 빚을 갚기 위해 한화 계열사의 돈 3500억원을 가져다 쓴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에 벌금 51억원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그는 항소심에서 일부 배임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아 징역3년에 벌금 51억원으로 감형됐다.

이후 대법원은 계열회사의 금융기관 채무에 대한 지급보증행위를 별도 배임죄로 본 원심 판결 일부를 위법하다고 판단하고 사건을 파기환송한 바 있다.

상고심이 진행 중인 최태원 SK 회장도 2월 안으로 선고일이 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법원 정기 인사가 임박해 있는 만큼 시일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

효성 조석래 회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법원기 건강과 고령을 이유로 조 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하긴 했지만 아직 숨 돌릴 분위기는 아니다. 조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조원대의 손실을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0여개의 차명계좌를 통해 주식을 관리했고 1000억원대의 자산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법인세와 양도세를 내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계열사에 손해를 끼치고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도 있다.

검찰이 범죄사실로 추산한 탈세액은 1000억원이 넘는다. 배임 및 횡령 액수도 700억~800억원대에 달하는 등 전체 범죄액수는 2000억원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일단 하나의 고비는 넘겼다. 삼성가 장남 이맹희 씨와의 상속분쟁에서 맹희 씨가 삼성 에버랜드에 대한 민사소송을 취하한 것이다. 다만 이 회장에 대한 청구는 유지했다.

채권단 압박도 ‘부담’

재벌 총수는 아니지만 이석채 전 KT 회장도 ‘좌불안석’이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는 최근 이 전 회장을 강제 구인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지난 14일로 예정된 구속전피의자심문에 무단 불출석했다.

검찰은 이 전 회장이 사전에 관련 협의나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심문에 불응함에 따라 현재 수사관을 급파해 소재지를 파악하는 등 신병 확보에 나섰다.

검찰은 지난 9일 100억원대 배임 혐의와 수십억원대 횡령 혐의로 이 전 회장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지하철 영상광고?쇼핑몰 등을 운영하는 스마트몰 사업과 KT 사옥 39곳을 매각하면서 회사 측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고 있다. OIC랭귀지비주얼(현 KT OIC)과 ㈜사이버MBA(현 KT이노에듀)를 KT계열사로 편입하는 과정에서도 적정 가격보다 비싼 값에 인수하는 등 회사에 100억원대에 달하는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고 있다.
임직원에게 과다 지급한 상여금을 되돌려받는 수법으로 회삿돈 수십억원을 횡령한 혐의도 사고 있어 재판 결과에 관심이 모아진다.

지난해부터 연초까지 한국의 대기업들은 ‘고난의 연속’ 이었다. 재계 순위 3위인 SK그룹의 최태원 회장과 10위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은 수감 혹은 구속집행정지 상태에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14위 CJ의 이재현 회장은 장기이식 수술을 하면서 지리한 법정공방을 벌이고 있다. 25위 효성그룹의 조석래 회장도 구속 영장이 청구된 상태다.

6위 포스코 정준양 회장은 외압 논란 속에 사퇴 의사를 밝혔고, 사퇴 압박에 버티던 11위 KT의 이석채 전 회장은 진통 끝에 결국 물러났다. 이 밖에 한진(9위) 동부(17위) 금호아시아나(18위) 현대(20위) 그룹 등은 경영난으로 채권단의 압박을 받고 있고, 두산그룹(12위)도 최근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마무리했다. 35위 동양그룹은 존립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다.

재계에 불어닥친 이른바 ‘법풍’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털고 갈 것을 털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김범석 기자 kimb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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