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변방의 ‘전라디언’ 중앙 방문기



# 청와대가 불안하다.


나는 ‘전라디언’이다. 거두절미하고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렇다. 돈도 없고 권력도 명예도 없는, 그런 것들을 크게 욕망하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자긍심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전라디언’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전의 나는 전라디언이라는 용어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어느 날 홀연 그 용어를 접하고는 아하 이것이다, 이것이야, 무릎을 치며 조용히 탄성을 질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인디언을 연상케 하는 전라디언, 이런 기발한 작명을 개발해서 널리 퍼뜨려준 얼굴 모르는 누군가에게 나는 아마 죽는 순간까지도 감사와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런 내가, 변방의 전라디언이 중앙을 방문해봐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소풍은 아니었다. 특별한 누군가의 무슨 초대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중앙에 별 볼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을 뿐이었다. 나비효과라는 말도 있듯이, 중앙이 흔들리면 변방은 자칫 추풍낙엽이 될 수도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는 변방의 전라디언들은 대체로 중앙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필요하다 싶을 때면 직접 달려가서 확인해보는 습관이 몸에 배여 있었다. 

요즈음 변방의 최대 관심사는 거짓말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두 번째 관심사는 ‘내’ 것이 좋으냐 ‘우리’ 것이 좋으냐 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다 형편없이 어처구니없는 문제들이기는 했다. 도대체 왜 그런 초등학교 아이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새삼스레 고민해야 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중앙에서는 그런 문제들로 인해 날마다 밥그릇 깨는 소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들이’ 대체 무슨 속셈인 것인지 달려가서 직접 확인까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흘러가는 물길 정도는 파악해둬야만 갑자기 죽을 일을 당하더라도 억울함이 덜할 것 같았다.



# 경찰이 왜 세종대왕상을 지키나 했더니...


날도 추워질 것 같고, 눈도 많이 내릴 것 같다 해서 약간 망설이기는 했었다. 내가 집을 비우면 우리에 갇힌 채로, 줄에 묶인 채로 사람이 주는 밥만 먹고 살아가는 오리와 개는 어떻게 하나. 사료는 한꺼번에 ‘왕창’ 부어놓으면 저희들이 알아서 먹을 만큼씩만 먹는다지만 물이 띵띵 얼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등등 고민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한 번 질러보기로 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세상을 살면서 한 번쯤은 모질게 눈 딱 감고 행동을 먼저 해버릴 필요도 있는 법이었다.

예산은 바지락 체취 현장에서 6만원씩 받은 사흘치 일당 십팔 만원으로 잡았다. 일정은 나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열흘을 넘기지는 말자고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꼴랑 십팔 만원 예산으로 밥을 사먹을 수는 없어서 쌀을 준비했다. 고사리 삶은 것도 밥솥에 담아 배낭에 넣었고, 잘 익어서 향기가 맛깔스런 배추김치도 2킬로그램쯤 준비했고, 청국장과 우거지 삶은 것도 챙겼다.

하루 팔백리를 달린다는 적토마 같은 명마를 내가 타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그런 철부지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떨쳐 버리고 고속버스 승차권을 사들고 앉아 시간을 기다렸다. 고창에서 서울까지 현금으로 일만 오천 칠백 원. 싸다. 이것을 만일 정부에서 규제완화라는 아름다운 명목으로 풀어버린다면 지금보다 두 배, 아니 어쩌면 세 배까지도 가능하겠지? 아니 어쩌면 구간마다 물어야 하는 엄청난 통행료를 승객 개개인이 부담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정부가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전국의 모든 도로를 구간별로 떼어서 민간업자에게 관리를 맡긴다면, 그러면 정부는 도로를 유지 보수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민간업자는 통행료 수입으로 세금까지 납부하니 정부는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겠지? 이 무슨 미친 상상이냐고 나무랄 사람도 있겠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이들도 사람인 이상 그런 미친 상상의 유혹을 받지 말라는 법도 않지 않을까?



# 교통정체의 주범은 경찰


요즘 변방에서는 그보다 훨씬 강력한, 핵폭탄 같은 상상도 바람결에 떠도는 실정이었다. 대통령이 가난한 농민을 너무나 사랑해서, 합리적인 농정정책을 강력하게 수립하라고 내각에 특별 지시를 내렸다는 소문이었다. 내각의 수장은 대기업 산하 경제연구소에 용역을 주었고, 연구소 대표는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연구원들을 동원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물을 한 달 뒤에 내놓았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농민은 너무 불쌍하다. 이십 년 내리 손해만 보는 농사를 지어 왔으면서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불합리 중에서도 최고 등급의 불합리인 바, 국가는 이제라도 이러한 불합리를 해소해야 한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농민은 대체로 가난하다. 가난한 농민이 적자만 가중되는 토지를 굳이 소유할 필요가 있는가?

돈이 많은 재벌들은 현재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재벌들의 이런 불용자금으로 가난한 농민들의 땅을 몽땅 사들인다면, 농민들은 세금부담을 덜 수 있어서 좋고 재벌들은 투자처를 찾아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으니 모두가 좋다는, 경제연구소의 이러한 연구결과를 내각의 수장은 즉각 수용했고, 대통령은 내각의 수장이 들이미는 파일을 한 시간쯤 들여다보고 나서는 좋아요, 좋아요, 이런 좋은 아이디어가 있었다니 나는 축복 받은 대통령이네요, 하고 선하게 웃었다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이런 일이 조만간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변방을 떠돌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나를 가리켜 미친X이라고 손가락질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로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그저 불안에 떨고 있는 변방의 전라디언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풍설인지,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라도 개연성이 있는 루머인지 확인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해두고 싶었다.

이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는 불신에서 비롯된 초조감이기는 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같은 무지렁이들로 하여금 그런 의심을 훈장처럼 달고 살게 한 것은 대통령 각하들이셨다. 권력은 오래 전에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듣던 날에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경천동지도 그런 경천동지가 없었다. 인간의 비루한 탐욕과 착취의 기술을 적절한 선에서 통제하라고 뽑아놓은 대통령의 입에서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등 기득권자들의 입지를 넓혀놓는 발언이 나온다는 것은, 유리지갑 하나 달랑 갖고 있는 서민들은 이제부터 정글 속으로 내던져질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들리던 것이었다.


#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더라~


아니나 다를까, 그 뒤의 대통령들은 듣기에는 매우 아름다운 민영화니 작은 정부니 하는 논리를 내세워서 이것도 팔아먹고 저것도 팔아먹고, 이것은 언제 팔아먹고 저것은 또 언제 팔아먹겠다는, 서민들의 안전장치를 하나하나 제거하겠다는 정책을 연달아 내놓고 있었다. 나 같은 무지렁이의 생각에 그것은 마치, 무능하고 책임감도 없는 가장이 논밭을 팔아먹고 소와 돼지도 팔아먹고, 부인의 장롱 속에 든 패물도 꺼내다가 팔아먹고 나중에는 새끼들도 매물로 내놓고 싶어 하는, 새끼를 팔아먹은 뒤에는 마지막으로 부인까지 팔아먹고 죽겠다는 심사로 밖에는 안 비쳐지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신병자 같은 상상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뿐일까. 아니었다. 두 눈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보면 열에 일곱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래라는 것은 그 용어의 쓰임새부터가 이미 현재보다는 낫다는, 최소한 나을 것이라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두려워한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왜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우리의 속담은 오, 얼마나 아름답게 인간사의 핵심을 찌르고 있는가.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경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이런 속담은 아마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속담을 이미 알고 있는 자가 어찌 시끄러운 중앙의 흐름을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 변방의 전라디언은 귀하디귀한 현금을 물쓰듯 써야 하는 방식의 보따리를 챙겼다. 그리고 중앙에서도 중앙, 서울에 도착했다. 밤이었다. 딸랑 우거지청국장 한 가지로 밥을 지어먹고, 아침을 기다렸다가 아침에 또 청국장우거지 한 가지로 뱃속을 채우고 거리로 나섰다.

서울에서도 종로, 지금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피맛(避馬)골을 뒤에 두고 있는 이 거리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80년대를 청춘으로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때 그 시절이 가슴에 화인처럼 새겨져 있으리라. 최루탄과 페퍼보그와 지랄탄에 백골단이 난무했던 그 시절의 그 함성을 어찌 그리 쉽게 떨칠 수 있으랴.



# 오직 화장실에서만 사람이 되는 경찰


그러나 역시 역사는 되풀이되나보다. 종로는 이미 경찰이 점령하고 있었다. 집회 때문에 교통이 불편하다는 꼬리표 하나를 세워놓고, 서울 기동대와 경기 기동대 차량이 길게 차선 하나를 완전히 점령한 채 연두색 복장 차림의 대원들이 사거리마다, 삼거리마다, 샛길마다, 갈림길마다 늘어서서 행인들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검색하지는 않고 뚫어져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떼로 몰려 진을 치고 있는 경찰대원들 사이를 어렵게 뚫고 지나가는 사람들 그 누구도 혼잣말로 한 마디씩 투덜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들은 또 뭐냐,” “개새끼들, 퉤!!” 등등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표현들을 모아서 전시해 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꼴을 보는 내 눈에서 돌연 눈물이 나왔다. 우리의 잘난 아들딸 중 한 사람들인 경찰관을 이렇게도 멸시받는 ‘개’ 그것도 ‘새끼개’로 만들어놓고 대통령은 도대체 지금 무슨 평화를 누리고 계시는가. 

예나 지금이나 존경받아 마땅한 경찰관들이 개로 취급받는 현상은 똑같구나. 그래서 경찰관들은 행인의 눈을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행인은 경찰관들에게서 지독한 악취라도 풍긴다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후딱후딱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애를 쓴다. 하지만 화장실에 이르면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그렇다. 경찰관들은 다만 경찰관들일 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면 화장실로 가야 한다.

개는 아무데서나 코로 냄새를 맡아본 다음 오줌이든 똥이든 갈겨대지만, 경찰관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용변이 마려우면 사람과 똑같이 화장실을 찾는다. 그리하여 사람과 똑같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바지를 까 내리고, 그리고 손을 씻는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화장실에 들어와 있는 경찰관을 개라고 멸시하지도 않고,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는 듯이 후딱후딱 피해버리지도 않는다. 서로가 옷깃을 스쳐도 아무렇지 않고, 심지어는 실수로 발등을 밟았을 경우 죄송하다고 정중히 사람의 언어로 사과를 하기도 한다.


# 중앙에서의 식사는 이렇게


하지만 그런 행복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용변을 마친 경찰관이 밖으로 나와서 대열에 합류하는 순간 그는 다시 ‘개’가 되어 행인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변방의 전라디언은 부끄럽게도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 화장실에서 발견한 경찰관 한 명의 뒤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 보다가 발견한 것이니 망외의 소득인 셈이었다.

화장실에서 그는 제법 여유가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요리조리 고개를 돌려보기도 하고, 화장지를 빼서 코를 풀기도 하고, 무심결에 마주친 옆 사람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까딱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도 한가해 보이던 그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두 주먹을 앞뒤로 내저어가며 뛰기 시작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해찰 한 번 없이 오직 앞만 보며 헛둘, 헛둘, 구령이라도 외치듯이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서 지하도를 빠져 나오고, 그리고도 계속 뛰고 또 뛰어서 행인들이 ‘개’라고 부르는 그 대열 속으로 끼어들어갔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뒤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었다. 나는 일순간 당황했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나 드문드문 보이는, ‘데모꾼’ 한 명 보이지 않는 세종대왕 동상 주변에 경찰관들이 몰려서 무엇을 지키는 것이지? 의혹에 사로잡힌 채로 한참이나 사방을 둘러보고서야 겨우 알았다. 아 그렇구나, 세종대왕 뒤에 광화문이 있고, 광화문 뒤에 경복궁이 있고, 경복궁 뒤에 청와대가 있구나. 아 이런, 이런, 대통령이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경찰이 멀리서 옹위해주지 않으면 잠도 못 이룰 정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구나.

변방의 전라디언인 내가 서울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돼버린 것 같았다. 더 이상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사거리마다, 삼거리마다, 갈림길마다 경찰관들을 내보내서 청와대와 연결되는 길목을 지키게 해야만 그나마 안심이 되는 대통령이라면, 대통령이라는 그 엄중한 세 글자를 입에 담는 것조차 괴로운 일이었다. 어쩌다가 우리의 대통령이 이리도 째째해져 버렸노. 어쩌다가 우리는 이리도 못난 대통령을 두게 되었노.

민심이란 파도인 것을, 만약에 파도가 제대로 출렁인다면 경찰이 길을 막는다 해서 파도가 뒷걸음질을 치겠는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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