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16화(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



남편이란 존재는 그런 것 같다. 잘해줄 필요가 없다. 선을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적당히 못되게 굴어야지, 한 번 잘해주기 시작하면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른다. 왕처럼 떠받들고 온갖 수발 다 들어줘봐야 돌아오는 건 하녀 취급뿐. 왕비 대접을 받으려면 남편을 먼저 왕처럼 대접해주라는 말이 있던데 다 헛소리다.

가만히 있으니 가마니로 보이고, 보고만 있으니 보자기로 보이는 세상.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적당한 수준의 못된 마누라로 사는 것. 그게 최고인 것 같다.

결혼 8년 차. 부부싸움이야 수 백 번도 더 해 봤지만 얼마 전 부부싸움은 정말 “이혼하자”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꾹 참았다.

유독 풍부한 감성에 삶 속의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걸 좋아하는 나.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이따금씩 찾아오는 스페셜 데이(크리스마스, 생일, 무슨무슨 데이 등)는 삶에 작은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작은 케이크 하나라도 사서 촛불을 켜고, 막대사탕 한 개라도 주고받고, 천 원짜리 빼빼로 한 상자라도 선물하는 것. 그 작은 행동 하나로 인해 며칠 동안은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낼 수 있다.

하물며 일년 중 가장 특별한 날인 생일은 어떻겠는가. 나는 생일 2주일 전부터 “어머~ 며칠 있으면 내 생일이네~”라며 남편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내왔다. 특히 이번에는 백화점에 가서 작은 반지 하나를 선물받기로 했던 터라 생일에 대한 기대감은 커져만 갔다.





드디어 생일 전날. 나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이라 함은 아침에 눈 떠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이 둘 뒷바라지와 남편 식사 준비 등으로 하루 종일 집안일에 파묻혀 살았다는 뜻이다.

가족들 저녁밥을 먹이고, 길고양이 밥 줄 겸 내일 반찬거리 살 겸 잠깐 나갔다 오니 벌써 밤 9시가 넘었다. 그 때까지 밥도 못 먹고 있던 난 길에서 사온 토스트를 베어 물며 거실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하루 중 처음으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쉬는 시간이었다.

앉기가 무섭게 내 뒤에서 대자로 누워 꿈틀꿈틀 대던 남편이 “음료수!”라고 외친다. 다시 일어나서 냉장고 속 차가운 음료수를 가져오라는 말이다. 자리에 앉은 지 10초도 안 지났다. 오늘 들어 처음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보는 거다. 그것도 밥 대신 토스트 한 조각을 이제 막 먹기 시작하던 참이다.

나는 “나 너무 힘들다. 빵만 다 먹고 나서 갖다 줄게. 오 분만 기다려”라고 말했다. 아랑곳 않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음료수 노래를 불러대는 남편. 마음이 조급해진 난 빨리 먹고 일어나기 위해 토스트를 큼지막하게 베어 물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서 벌떡 일어나는 남편. 쿵쾅거리며 부엌으로 가더니 냉장고 문을 거칠게 열고 자기 음료수를 꺼낸 후 다시 쾅 하고 냉장고를 닫는다. 그 때까지 분위기를 파악 못했던 난 “내 것도 갖다 줘~”라고 부탁을 했다. 그랬더니 화를 내면서 거친 말을 쏟아내는 남편.





어이가 없었다. 밤 9시 넘어 저녁밥 대신으로 빵 먹고 있던 아내가 누워서 빈둥대는 남편 음료수 안 갖다준 게 그리 잘못한 일인가? 그것도 생일 세 시간 전에 욕을 먹어야 할 만큼?

먹고 있던 토스트를 바닥에 내던져버리고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일단 꾹 참았다. 내일이면 반지도 사러 가는데다, 조금 있다가 애들 먹이기 위해 케이크 커팅식도 해야 하니깐.

하지만 더 이상 한 자리에 같이 있고 싶진 않았다. 먹고 있던 토스트를 음식물쓰레기통에 버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화를 꾹꾹 참으며.

설거지를 끝내고 케이크를 가져왔다. 내가 초를 꼽고 불도 붙였다. 남편과 아이들이 둘러앉았다. 나는 딸에게 “자 노래 부르자”라며 날 위한 생일축하 곡을 스스로 부르기 시작했다. 박자가 엉망인 채로 열심히 따라하는 딸. 남편은 뭐하나 봤더니 입도 뻥끗 안하고 있다. 또 다시 솟아오르는 화를 꾹꾹 밀어내고 혼자서 박수 치고 자축한 뒤 아이들 먼저 케이크를 먹였다.

다음날 아침. 생일이다. 남편은 뭐가 그리 당당한지 어제 그 사건 이후로 한 마디도 안한 채 침묵시위 중이다. 참아야 한다. 이따 반지 사러 가야 하니깐. 미역국 대신 미역을 넣은 라면으로 혼자만의 생일상을 차렸다. 남편은 미역라면을 와구와구 먹으면서도 느끼는 게 없는지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 없다.

반지도 사러 가야 하는데 남편이 아무 말 없다. 내가 사는 게 아닌 남편의 선물. 자존심 상하게 먼저 얘기를 꺼낼 수는 없다. 혹시 저녁에 나가자고 하려나? 시시때때로 솟아오르는 화를 꾹꾹 참으며 저녁까지 기다렸다. 이상하다. 저녁 6시, 7시…. 조금 있으면 백화점 문 닫을 시간인데 아무런 말도 없다. 밤 9시, 그리고 10시….





그랬다. 결국 이거였다. 어제 누워서 꿈틀대던 자기에게 음료수 안 갖다 줬다고, 아니 빵 다 먹고 나서 갖다 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고 남의 생일을 이렇게 망쳐놓은 것이었다. 눈물이 나고 눌러왔던 분노가 일시에 폭발했다.
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소리를 지른 뒤 손에 들고 있던 아이 장난감을 방문을 향해 힘껏 던져버렸다. 쾅 하더니 문 가운데가 박살나며 움푹 패어버렸다. 순간 뜨끔했지만 모르는 척. 저런 인간이랑은 이혼하고 말겠다며 한참동안을 방에서 흐느꼈다.

그런데 남편의 저런 행동은 내가 야기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 부부관계는 분명 잘못돼있었다. 뭐든지 남편이 1순위였다. 매일 물심부름은 당연한 거였고, 반찬을 해도 남편만 먹었다. 6토막짜리 고등어조림을 하면 딸이 한 조각 먹고 남편이 5조각을 먹었다. 어쩌다가 남편이 남긴 머릿 부분이 내 몫이었다. 외식을 해도 내가 좋아하는 고깃집은 간 적이 없다. 언제나 남편이 좋아하는 회를 먹든가 들깨요리, 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최근에는 더했다. 몇 달 전부터 남편이 회사일로 힘들어했다. 지친 모습이 안쓰러워서 집에서 먹는 거라도 잘해주자 생각했다. 매일매일 다른 메뉴의 저녁밥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제는 김치찌개, 오늘은 된장찌개, 내일은 동태찌개. 생전 처음 해보는 요리도 줄줄이 하기 시작했다. 차돌박이를 넣은 상추쌈밥, 콜라 찜닭, 당면을 넣은 불고기 전골 등등.

처음에는 효과가 좋았다. 매일 다른 저녁 밥상에 남편의 귀가 시간이 빨라졌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2주일 연속으로 혼자 아이들을 목욕시키기까지 했다. 나의 변화에 남편이 달라지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더 힘을 냈다.

그러나 특별함도 계속되다보면 일상이 되어버리기 마련. 매일 다른 저녁밥상을 오랫동안 받더니 남편은 더 이상 고마워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집에만 오면 텔레비전 앞에 누워 꿈틀대는 굼벵이가 되었고, 만둣국이 맛없다고 음식 타박을 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마누라 생일 전날 음료수 심부름 안했다고 생일 망치기 복수극까지 펼쳤다.







남편이란 존재도 마치 시댁과 같다. 못해주다가 한 번 잘해주며 칭찬을 받는데, 백번 잘하다가 한 번 못하면 욕을 먹는다. 매일 물심부름을 해준 나였기에 그 날 음료수를 안 갖다줬다고 남편이 그 난리를 친 것이다.

이제 할 일은 분명해졌다. 남편이란 존재한테는 굳이 애쓰며 잘해줄 필요가 없다. 부부 관계는 동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나는 현실에 파묻혀 우리네 어머니 시대가 그래왔듯 아내라기보단 하녀로서의 일상에 익숙해져 버렸다. 가정주부라는 이름하에.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여성 우월주의자도 아니지만 하녀는 더더욱 아니다. 어차피 앞으로 50년은 더 같이 살아야 할 남편이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50년이 괴롭다. 동등한 부부관계 구축을 위한 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기필코 승리하리라.

아, 앞으로 지속될 이 싸움과는 별도로 남편과는 화해했다. 생일 이튿날 친정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혼자서 백화점에 가 반지를 샀다. 작고 반짝이는 나비 모양의 새끼손가락 반지.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 순간 모든 화가 스르르 풀렸다. 역시 여자에게 반짝이는 최고의 엔도르핀 촉진제인 것 같다.


<류승연 님은 정치부 기자 출신입니다. 현재는 두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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