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마술처럼, 그녀가 내 곁으로 왔다(18)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밤낮으로 듣는다. 내 가슴이 압축된 공기 같다. 머릿속은 콘크리트를 트럭으로 실어다가 퍼부어놓은 수렁 같다. 앉으면 일어서고 싶고 일어서면 도로 앉고 싶은 것.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등등 그런 이십대 시절을 크게 관통했던 관념들이 부활해서 내 육체의 여기저기 도처를 근질거리게 한다. 마치 작은 벌레들이 내 몸을 놀이터 삼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만 같다. 사람이 일반상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을 연쇄적으로 겪고 나면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내 생에는 완전히 없을 줄 알았던 호칭이었다. 아버님. 아버지가 아니고 아버님 말이다. 나도 이제 남들처럼 장인어른을 모실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제 곧 그렇게 된다고 혼자서 좋아라 남몰래 싱긋 싱긋 웃기를 얼마나 했던가. 이제 곧 그때가 온다고 하는, 그 즐거운 미래형 시제가 순식간에 과거형으로 멀리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추도사 몇 줄을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지우고를 반복하고 있다.




아버님.
그렇게도 불러보고 싶었던 호칭 아버님, 때를 놓쳐버리고 이제야 혼자서 남몰래 불러봅니다. 아버님도 성당에서 익히 들어보셨을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아침부터 틀어놓고 온 종일을 몸부림치며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이렇게 가만히 불러보고 있는 제가 저 자신도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이 가고 훈풍이 부는 계절이 오면, 여기저기 꽃이 피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절로 화사해지는 그런 때가 오면 고개라도 푹 숙이고 들어가서 무릎 꿇고 엎드려 용서를 구하자고 저 자신과 약속을 했었습니다. 아버님과는 열일곱 살 차이밖에 안 나는 제가 스무 살이나 어린 따님을 사랑하게 돼버렸다고, 용서해 주시라고, 염치가 너무 없어 고개를 들 수도 없지만 그러나 헤어진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볼 수 없다고 그렇게 떼를 써서 아버님의 사위 자격을 얻고자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다. 사랑하는 막내딸에게 주겠다고 사과 농장의 사과 따는 일도 거뜬히 해내신 아버님이 그렇게도 한순간에 생사의 갈림길 속으로 던져져 버리셨다니요. 돌아보니 꼭 그 시간쯤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께서 웬 미치광이 같은 주정뱅이의 자동차에 치여 끌려가고 계셨을 그 시간쯤에 당신의 딸내미, 그 사랑스런 막내딸의 전화기에 한 줄의 문자가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심장마비로.
이렇게 되어 있는 아주 간단한 문자 한 줄이 당신의 막내딸에게 준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여고 동창 중 현재까지 연락을 취하며 삶의 미세한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해 왔던 유일한 친구였으니까요.
“어떻게 해, 어떡해, 버스 시간이 어떻게 되지? 아이 참 고창에서는 왜 경상도 쪽으로 가는 버스를 하나도 탈 수가 없는 거야.”
그랬습니다. 당신의 막내딸은 일초라도 빨리 친구 아버지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달려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해가 이미 지고 있어서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온 몸이 안타까움으로 젖은 채 훌쩍거리고 있는 당신의 막내딸을 마치 눈물의 수렁 속으로 밀어버리기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아버님 당신의 사고 소식이 전해져 왔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추도사를 써서 뭐 하려고? 답은 없다. 질문만 있고 답은 없는 게 인생이란 말도 있긴 하지만 이건 참 맹랑하다. 너무 맹랑하다. 내가 대체 뭘 해야 한단 말인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겨지는 세상을 사람으로 살고 있는 나는 또 무엇이란 말이냐. 내가 진정 사람인 것이 맞는가?

소주를 4병이나 퍼마신 것으로 나중에 드러난 음주운전자의 트럭에 사람이 치였다. 만취한 운전자는 자신이 사람을 치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계속 운전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트럭에 치인 사람은 치인 채로 그 자리에 멈춘 것도 아니고 트럭의 어딘가에 끼여서 계속 끌려갔다. 끌려가는 동안 심장이 터지는 등 장기 태반이 망가지고, 뼈와 살과 근육은 으스러져 갔다.

그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안절부절 못해하는 그녀에게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엄마도 방금 전에 전화로 간단한 내용만을 들었기 때문에 간단한 얘기만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전하는 경찰관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 현재 119구급차가 출동해서 병원 응급실로 이송 중이라고, 그래서 엄마도 병원으로 달려가기 위해서 지금 현재 집을 나서는 중이라는 얘기였다.

119구급차가 달려가고 있는 병원은 포항 소재의 종합병원이었다. 사고는 포항 옆동네 영덕군에서 났다. 영덕군에도 종합병원이 있는데 포항의 더 큰 종합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이라면 상황이 심각하다는 얘기였다. 삼십 분쯤 뒤에 다시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직 병원에 도착하지는 않았다고, 그런데 병원 응급실 담당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자녀분들을 가능한 한 빨리 모이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함께 갈까?”
“어디를요?”
“병원에.”
“병원을? 가도 되나?”
“같이 가자. 내가 운전해서 갈게.”
“운전? 가다가 또 서 버리면 어쩌려고.”

내 차가 워낙 고물이라서 고속도로는 가능한 한 피해 다니고 있던 참이었다. 서울에서 그녀의 옷가지들을 실어오던 날 갑자기 멈춰서 버리는 바람에 그만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던 경험이 우리에게 아직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었다. 고창에서 포항을 가려면 일단 광주로 나가야 했다. 광주에서도 포항행 고속버스는 하루 네 차례밖에 없었다. 이 지독한 더딤을 어찌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불안이 없지는 않았다. 자동차가 서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이미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보다 큰 불안이, 근원적인 불안이 내 안에서 스멀거리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보시고 나면 심장이 약한 엄마가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아직 인사조차 못 드린 채 오늘이냐 내일이냐 적절한 때만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상황에서 얼굴을 내밀어도 되는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러 온 놈이라고, 때려죽인다고 그녀의 언니와 형부들이 덤비면 어떻게 하지? 하긴 뭐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설마 숨통까지 끊어놓기야 하겠어. 엄마도 그래. 남편이 명제경각에 이르렀는데 나 같은 인간이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 그래, 가자. 가야 한다. 안 가면 안 된다.

고창을 출발해서 담양 지나 남원, 장수, 거창 부근에 이르렀을 즈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가 사 년여를 살아 왔던, 계약기간이 남아서 일 년 가까이나 빈집인 채로 두고 있는 전셋집의 주인이었다. 팔십대로 접어드는 주인이 워낙 까다로운 성품이어서 집을 빼달라는 말도 못하고 계약기간이 만료되기만을 기다려 왔었다. 계약 만료일은 3월 중순이었다. 계약기간 다 돼 간다고,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전화가 왔던 게 겨우 보름 전이었다. 그때 집을 빼달라고 했는데, 그런데 벌써 집이 나갔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새 주인의 입주까지 남은 시간이 딱 이틀이란다. 요컨대 다음날 바로 와서 짐을 빼라는 것이었다.

무슨 소꿉놀이도 아니고 내일 당장 집을 빼라는 게 이게 말이 되는 건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녀는 일단 상황 설명을 했다. 아버지가 지금 위독해서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서울에 갈 시간이 없다. 새 주인의 입주 일자를 최소한 열흘 정도 늦춰달라. 하지만 집 주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 다 찍었다. 계약금도 받았다. 새 주인은 무조건 모레 들어온다. 그러니 내일 중으로 도배를 끝내야 한다. 빨리 와서 짐 빼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이야기가 한참을 계속되었다. “할머니 정말 너무하세요.” 그녀는 마침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집 주인이 한 가지 절충안을 내놓았다. 큰 방 하나를 일단 치우고 도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집은 방이 둘에 거실과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새 주인은 할아버지 혼자라고 했다.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고, 그리고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서너 시간쯤 뒤에 또 전화가 왔다. 병원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상황설명을 듣고 난 뒤였다. 그녀는 이미 눈물을 수도 없이 쏟고 난 뒤여서 전화로 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찌 이런 막무가내가 있을 수도 있는가 싶었지만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 주인은 상황을 주도하는 집 주인이었고 그녀는 싫든 좋든 그에 따라야만 하는 세입자일 뿐이었다. 할머니 하시고 싶은 대로 다 하세요, 하고 전화를 끊는 것밖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집중치료실 앞 장의자에 그녀의 언니와 형부와 엄마가 천장을 응시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래, 그곳은 집중치료실이라고 돼있었다. 중환자실이라는 명칭이 다소 부정적인 느낌이 있다 해서 아마 그렇게 바꾼 것 같았다. 의사들은 말했다고 한다. 현대의학의 입장에서 손을 쓸 수 있는 부위가 하나도 없다고, 현장에서 절명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 수 있다고, 그래서 자녀들이 다 모일 때까지 특수한 약물로 생명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중에 하나를 간신히 붙잡아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생명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중에 하나, 그래,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도대체 몇 종류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온갖 장비와 링거와 소변 주머니가 줄과 선으로 신체와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었다. 각종 그래프는 일제히 바닥에서 간신히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고, 소변 주머니에는 소변이 한 방울이나 겨우 나와 있을 뿐이었고, 몸은 퉁퉁 부었는데 손을 대보면 얼음처럼 차고 아무런 맥박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한 부위 턱 아래 근육들만 산소호흡기의 강력한 추동에 의해 강제로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후 늦게 사고를 낸 운자기사가 왔다. 부인과 함께였다. 그리고 함께 술을 마셨다는 동료들도 따라왔다. 한눈에 봐도 삶이 신산한 사람들이었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살아가기 어렵다고, 너무 팍팍하다고, 친한 사람들 몇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자동차에 올랐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앞뒤 분간을 못할 정도로 술을 퍼마셔서 어쩌자는 건가. 사고 운전기사는 말하고 있었다. 사고 직전에 갑자기 눈앞에 아무것도 안 보여 버렸다고.





다음날 아침 일찍 집 주인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전화를 받자마자부터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큰소리의 내용인즉 이랬다. 방 한 칸을 치우려고 들어갔는데 책이 너무 많아서 엄두를 못 내겠다. 몇 번 옮겨 보기는 했는데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 손발도 덜덜 떨린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느냐. 집 가진 것이 죄냐.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이 무슨 특권이라도 된단 말이냐. 빨리 와라, 당장 와서 빨리 짐 빼라. 그리고 이런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젊은 것들이 말이야, 응? 세상을 좀 도덕적으로 살아갈 생각도 해야지. 도덕심도 없냐 응? 도덕심도 없어?”
도덕심, 그놈의 도덕심. 그녀에게서 할머니가 했다는 그놈의 도덕심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만 수렁에 빠져 버렸다. 수렁에 빠진 채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서울로 가서 짐을 빼 오겠다고.

서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할머니를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박치기로 일단 한 번 받아버리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가 잠시 뒤에 다시 이런 생각을 했다. 당신도 사람이냐? 만나자마자 그렇게 소리부터 일단 질러야겠다고. 생각은 그렇게 했었지만, 그런데 막상 할머니를 대하는 순간 내 입에서 이런 기막힌 황당한 말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 요구르트 하나 드실래요?”

내 손에 요구르트가 들려 있기는 했었다. 목이 너무 말라서, 뭔가가 마구 타는 것 같아서 물이라도 좀 마시려고 슈퍼에 들어갔는데 마침 물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 거나 되는대로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하필 다섯 개 한 줄로 묶여진 요구르트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기가 막히게도 그놈의 요구르트를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를 모르겠는 것이었다. 뚜껑을 돌려서 따야 하는지 그냥 잡아당겨서 따야 하는지 도대체 어리둥절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저 들고만 있다가 할머니를 만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불쑥 내밀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 좀 보소, 집게손가락으로 요구르트 병 가운데를 콕 찍더니 그대로 입에 대고 호르륵 마셔 버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 그렇지 참,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요구르트 하나를 마실 수 있었다. 그렇게 짐을 싸서 내려온 지도 나흘이나 지난 지금, 나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고 또 듣는다. 가슴이 압축된 공기 같다는 느낌인 채로.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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