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산수유가 꽃봉오리를 터뜨리긴 했지만 아직 봄은 아니다. 사람이 손으로 쉽게 포획할 수 없는 동물을 제외한 곤충이나 파충류 계급들은 아직 저 깊은 곳에서 때를 기다려야만 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게 뭐냐. 아침이면 연못에 얼음이 손 시리게 얼어붙어 있곤 하는 이 계절에 그만 개구리를 깨워놓고 말았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뒤뜰에 수북이 쌓인 낙엽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놓았다고 말하면 구차한 변명일까. 

겨울이면 가끔 들리는 낙엽 소리가 들을만했다. 뒤뜰에 떨어진 감나무 잎이며 참나무 잎이며 은행잎 같은 것들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까닭이 그것이었다. 내가 워낙 게을러서 미처 치우지도 못하고 방치해두었다고 가끔 속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흉보기도 하지만 정말로 뭘 모르는 사람들이다.

낙엽을 쓰레기라고, 그래서 얼른 치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권하고 싶다. 바람도 없고 눈도 내리지 않고 비도 없는 날 혼자서 가만히 낙엽을 밟아보시라. 외롭다고 투정을 부리던 당신의 영혼이 아마 슬픈 이야기를 듣고 난 뒤의 그것처럼 축축해진 목소리로 괜찮아, 이젠 괜찮아 하고 속삭여 줄 것이다.

낙엽은 사람만 밟는 게 아니다. 까치서부터 참새, 박새 등등 각종 새들이 낙엽 위를 걸어 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낙엽을 부리로 젖혀가며 날개를 포롱포롱 파닥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는 새들의 그 낙엽 밟는 소리는 눈을 감고 가만히 방에 앉아서 들어야 한다. 그러면 저기 어디 멀리서 누군가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때로 그 소리는 무장괴한이 살금살금 다가오는 것 같아서 두 귀가 그만 쫑긋이 선다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어떤 때 그 소리는 ‘봄처녀 제오시네’하는 노랫말과 짝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내 가슴에 서정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지기도 한다.

바람이 낙엽을 밟고 있을 때는 또 어떤가. 이때의 낙엽은 훨씬 더 감성적으로 부드러워진 소리 아니 음악소리를 낸다. 바람이 적당한 세기로 불면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서로 앞다퉈 몸을 뒤척이며 뭐라고 자꾸 소리를 내는데 그 고도로 집약된 소리는 진정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내가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바람이 밟는 낙엽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듣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없이 듣고 있노라면 내가 그만 저 까마득한 어디 무슨 시원(始原) 같은 데라도 와 있는 것 같은 절대의 평온을 느끼게 된다.





해마다 겨울이면 그런 시간을 참 많이도 가져왔었다. 이제 그런 계절이 끝나간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고, 산불을 조심하라는 산림당국의 확성기 소리가 잦아진 즈음에 생각해보니 이제 그만 낙엽을 치워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만에 하나 불이라도 붙으면 봄 불은 여우불이라고, 언제 어디로 날아가서 무엇을 태워버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유, 소년기에 이미 경험을 숱하게 축적해놓고 있었다.

아니 뭐 꼭 불이 날 걱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새로 나올 각종 식물들을 위해서라도 낙엽은 이제 치워야 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갈퀴로 낙엽을 긁어 모아놓고 불을 붙였다. 불을 붙여놓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백일몽 같은 상상에 빠져 있기를 얼마나 했던가.

느닷없이 앞에서 뭔가가 펄쩍 뛴다는 느낌이다. 깜짝 놀란 마음으로 뭐냐 이거, 좌우사방을 살펴보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다. 뭐지? 뭐가 튄 거야. 어쩌고 중얼거리며 아직 흩어져 있는 낙엽들 위로 성큼 한 발을 옮겨놓는 순간 또 한 번 뭔가 펄쩍 뛴다. 개구리다.

낙엽과 거의 같은 색깔의, 움직여주지 않으면 사람이 알아보기조차 힘든 보호색을 띤 개구리가 놀라서 갈짓자 걸음으로 우왕좌왕하다가 한 번 폴짝 뛰고, 다시 우왕좌왕하다가 또 폴짝 뛰기를 되풀이한다. 그렇게 뛰고, 또 뛰기를 되풀이해 보기는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한다. 아직 잠에 취한 까닭일까? 아니 그보다는 마지막 남아 있던 힘마저 다 빠져버린 탓일 게다.



# 텃밭 삽질 중에~


개구리가 겨울잠을 자고 있는 바로 그 위에서 내가 낙엽을 태우고 있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아직 봄은 멀었다고 쿨쿨 자고 있던 개구리가 느닷없이 위쪽이 따뜻해지는가 싶더니 더워지고, 이어서 뜨거워지니까 엄마야 이게 뭐냐 하고 정신없이 땅을 박차고 나온 것일 게다.

그런데 뛰쳐나온 그곳이 불길 속이다. 불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돌아서서 밖으로 다시 뛰쳐나오긴 했지만, 그 동안에 에너지가 모두 소진돼 버린 까닭에 더 이상은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도 움직여야 한다. 사력을 다해서,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동원해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긴 했지만, 이제 앞길이 막막하다.

살아날 수 있을까. 불길 속으로 들어갔던 까닭에 온 몸이 재투성이가 되어버린 저 개구리가 생명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개구리 자신의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이었다. 매화나무 밑에 부드러운 땅을 파고 다시 잠자리를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내 마음은 영 불편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꿈에 개구리가 나타나서 왜 그랬어, 왜 그랬어, 할 것만 같다.
예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더러 있기는 했었다. 겨울이 겨울답잖게 따뜻한 날이면 마당으로 나와서 뭔가가 자꾸 하고 싶어진다. 호미를 들고 시금치 사이의 독새풀 같은 것들을 뽑아내기도 하고, 봄이 오면 상추며 쑥갓 같은 것들을 심겠다고 삽으로 미리서 땅을 파기도 한다. 그럴 때면 으레 한두 마리씩의 개구리나 도롱뇽 혹은 두꺼비 같은 녀석들이 흙 속에서 뒤집어지곤 했다.

손을 대면 얼음처럼 차가운 녀석들이, 눈은 뜬 것도 아니고 감은 것도 아닌 마치 무슨 엷은 막이라도 씌워놓은 것처럼 뿌연한 상태인 채로, 지금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조차 모르는 채 가만히, 우두커니, 아무런 표정도 동작도 없이 그저 앉아만 있는 그 모습은 뭐라고나 할까, 도무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만 같은 그 처연하게 무방비한 상태 앞에서 나는 매번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어 버리곤 했었다.



# 불에서 뛰쳐나온 재투성이의 개구리


그런데 신기한 것은,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신기한 것은 그렇게도 자주 겨울철에 삽질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 번도 삽날에 개구리나 도롱뇽이 찍혀 살해당하거나 상해를 입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랬던 내가 이번에는 전혀 엉뚱하게도 낙엽을 태운다고 개구리를 살아서 잠자는 상태인 채로 불에 태워버릴 뻔한 것이었다. 

상고해보면 소년 시절의 나는 참 많이도 개구리를 때려잡았었다. 집에서 기르는 오리 먹이로 한다고, 혹은 끓여서 돼지 먹이로 한다고 때려잡기도 했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때려죽인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길을 걷던 중에 개구리를 만나면 옆에 아무 것이나 돌멩이 같은 것을 들고 던져서 죽여 놓고는 두 다리를 바르르 떠는 모습을 보며 기쁘다고 박수를 쳤고, 회초리 같은 들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찰싹 때려놓고는 사지를 뒤틀어대며 고통스러워하는 개구리의 그 모습이 또한 재미있다고 박수를 치기도 했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 와서 새삼 개구리 한 마리를 불에 태워 죽일 뻔했다고 속상해하며 에이 참, 에이 참, 소리를 연발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인가. 

그러고 보니 그렇다. 오늘에야 뭔가를 발견했다는 느낌, 아니 생각이 든다. 살아 있는 수많은 것들과 함께 하는 농촌 살림을 이십여 년 가까이 하고 나니 내가 이게 참 가슴에 눈물이 많이 축적되어졌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도 물론 개구리 등의 살아 있는 것들과 함께 하긴 했지만, 그때는 나를 관리 감독하는 어른들만 주변에 꽉 차 있었을 뿐이었고, 그래서 내가 주관적으로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이 기껏 개구리를 때려잡는 정도였던 것은 아니었을는지.



# 예전에는 매우 징그러웠지만...


그런데 이제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의 그것과 유사한 환경을 접하고 보니 이게 때려잡아야 할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한다는 감정이 우선하게 되었다는, 제대로 된 성찰인지 여부는 잘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런 생각이 든다. 뿐만이 아니다. 내 정서를 건드리는 대상이면 무엇이든 깊은 생각도 성찰도 없이 내쳐버리는 등으로 모난 데가 많았던 성격이 둥글어졌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적이 없어졌다고나 할까. 아주 없어졌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예전에 비해 엄청 많이 줄었다. 예전에는 징그럽다고, 무섭다고, 혹은 못생겼다고 인상 찡그리며 돌아서거나, 걷어 차버리거나, 혹은 눈 질끈 감고 흙을 던져 묻어버리거나 했던 각종 벌레들이며, 곤충들이며, 파충류 같은 것들이 요즘은 만나면 그저 반갑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련만 신기해서 한참씩 들여다보기도 한다.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뭔가 새로운 것이 보인다.

그 새로운 것이 뭐냐고 누군가 내게 갑자기 묻는다면 나는 아마 질문을 한 사람의 눈빛에 드러나는 진정성 여부에 따라 아무 할 말이 없다고 입을 꾹 다물어 버리거나, 조만간 논문 한 편을 써서 보여주겠다는 등의 기염을 토하게 될 것이다. 논문이 뭐 엄청나게 진지할 필요가 있으랴. 내가 살고 있는 집 주변을 가볍게 스케치만 해도 까짓 논문쯤이야 백 편도 넘게 나올 것이다.

집터가 오래된 시골집은 울타리 쪽으로 고목이 있어서 올려다보는 재미도 좋고 들여다보는 재미도 썩 옹골지다. 각종 새들이 날아와서 지지구지지구 노래를 불러주는 것은 기본이고, 능소화나 담쟁이 같은 넝쿨 식물들이 고목의 우둘투둘한 껍질에 여린 발톱을 새기며 올라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는 뭐랄까, 도무지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깊고 장구하다.

왜냐하면 그 재미는 하루 이틀은커녕 한두 달에 완료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내일도 봐야 하며 모레도 봐야 하고, 한 달 뒤에도 보고 석 달 뒤에도 봐야지만 그나마 겨우 그 생명의 살아가는 방식을 어렴풋이나마 알겠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 시간과의 싸움이 아니라 시간과의 완벽한 동거가 아니고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이다.

우리 집 울타리를 구성하는 식물은 무궁화와 대나무를 기본으로 해서 그 사이사이로 거대한 감나무 두 그루와 참나무 두 그루가 있다. 은행나무도 빠질 수 없다는  듯 수컷 한 그루가 있고, 벽오동이 또 한 그루, 벽오동만 있어서 되겠느냐는 듯이 백오동 한 그루가 또 있고, 동백나무와 매화나무, 엄나무와 오갈피나무, 단풍나무와 차나무 등등 그 이름을 다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모두가 그 성질이 제각각이어서 민주주의란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느닷없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 요즘은 땅강아지도 제법 보인다.


나무들 자체로만 성질이 제각각인 것은 물론 아니다. 이파리의 생김새부터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맺고 익어가는 과정까지, 그 각각의 다름을 얘기하기로 하자면 그야말로 논문을 몇십 편 쓴다 해도 모자랄 지경이라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낙엽에 대해서만은 제법 아는 체를 해볼 수도 있다.

낙엽, 단풍나무 이파리나 무궁화나무 같은 녀석들은 낙엽이라 부를 만한 게 사실상 거의 없다. 이 녀석들은 단풍의 계절이 지나서 땅에 떨어졌다 하면 그때부터 즉각 땅과 동화되어 간다. 비나 눈이 한 번 흠뻑 쏟아지고 나면 땅에 납작 붙어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즈음에는 아예 그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을 때까지 남아있는 낙엽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은행잎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은행잎은 보는 느낌이 좋다. 피부에 와 닿는 감각도 썩 괜찮다. 생김새도 둥글하게 삼각형 태를 내고 있는데다가 성깔 또한 아무 날카로움이 없어서 밟혀도 소리를 내지 않고 다만 발바닥으로 어렴풋이 부드러운 느낌을 전해줄 뿐이다.

참나무 이파리 마른 것은 생김새도 날씬하고 바람결에 나는 모양도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쭉쭉 뻗어나가고 하는 것이 어떤 때는 까칠한 여인을 연상케 한다. 공기 중에 습기가 제법 있을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지만 햇빛이 짱짱한 날에는 금방 자기 몸을 부스러뜨려 버릴 듯이 까랑까랑한 소리를 내는 것 또한 개성 만점의 전문직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날씨가 흐리거나 맑거나 아무 때나 건들면 소리를 내는 감나무 이파리 마른 것은 뭐랄까, 이 녀석은 보고 또 보고 만져보고 또 만져봐도 일편단심 민들레도 아닌 것이 한결같은 느낌에 한결같은 소리를 내는데 삼돌이나 덕봉이 혹은 대근이란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대나무 이파리들은 살아있는 한에서만 소리를 낸다. 땅에 떨어진 녀석들은 바람이 불면 움직이고 바람이 안 불면 가만히 엎드려 있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오직 살아 있을 때만 소리를 내는 대나무 이파리는, 글쎄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로 하여금 잠들어 있는 개구리를 깨워놓게 한 것은 대나무 이파리가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도 아니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 한 편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전북 고창으로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김수복의 시골 살림 이야기’란 제목으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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