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옆자리 비어있니?”
“혹시... 옆자리 비어있니?”
  • 승인 2014.03.2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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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대학원에서의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약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고, 또 누군가와는 기대했던 바와 달리 조금씩 서먹해지고, 그러는 동안 슬슬 앞으로 내가 속할 ‘무리’들의 윤곽이 흐릿하게나마 잡히기 시작했다.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교정 곳곳에 조용히 봄이 움트고,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연한 봄 날씨라 코트를 입기가 제법 곤란해졌다.

봄이 오는 것처럼 조용히, 모든 게 낯설던 이곳에도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익숙한 것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다. 익숙한 사람, 익숙한 길, 익숙한 풍경, 익숙한 일정.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매번 새롭다. 학부 때보다 몇 배는 넓은 교정에서 길을 잃은 게 수번이고, 혼자 정보 없이 식당을 찾았다가 실패한 것 또한 수번이고,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못 외워 실수한 적도 수번이었다.

단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날 기다리고 있는 무리가 생기다니,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이제 겨우 시작한 뿐인지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걱정이 어찌 없을 수 있겠냐 만은, 좋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힘이 난다. 봄이 오고 이곳에 전설적인 무더위가 시작될 즈음이면, 나도 완전히 적응을 마치고, 누군가들과 더불어 우리 앞에 펼쳐진 어려운 과제들에 맞서 싸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고 있다.





대학원에 생각보다 내 또래가 많지 않아, 또래 여자아이 두 명과 친해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보름이라는 시간이 짧지만은 않았던지, 그 여자아이 두 명은 따로 둘만의 무리를 꽤 견고하게 구축한 모양이다. 친해지기 어렵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노력을 아예 하지 않아서는 친해지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 명의 여자애들과 따로 시간을 맞춰 차를 한잔 하면서, 머릿속으로 두 명을 내 자취방에 초대할 계획을 세운다. 점심이라도 해서 같이 먹으면 허물없이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보름 전에 이 친구들에게 제대로 친근하게 굴었다면 이미 꽤 친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약간 억울한 감도 있다. 수업시간이나 생활패턴, 처해진 상황이 다른 사람들은 서로에게 호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와는 달리 조금씩 서먹해졌다. 지금 약간 서먹해 졌다고 해서 그때 우리가 나눴던 교류가 불필요하다거나 후회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인원도 적고 해서 어떤 식으로든 모두와 친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일 테니까.

하지만 이 여자애 둘이 두 사람만으로 ‘무리’를 완성하기 전에 이 친구들에게 먼저, 그리고 성심껏 다가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처해진 상황이나, 나이, 성별, 수업과 생활패턴 등 많은 부분이 겹치는 친구들에게 아직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약간 섭섭하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들을 통찰 할 수 있었다면 편하지 않았을까.
중고등학교는 여중, 여고를 나왔다. 남중, 남고의 경우는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여자중고등학교의 새 학기가 시작되는 첫 날 교실의 풍경은 그야말로 살벌한 탐색전 그 자체다. 여학생들은 한 학년 동안 같이 붙어 다닐 무리가 그 첫 날 절반정도 결정된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 첫날, 첫 급식의 파트너는 거의 한 학기 정도는 계속 같이 급식을 먹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니 다들 매의 눈으로 학우들을 탐색한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던 친구는 없는지, 건너 건너 아는 친구는 없는지, 인상이 좋아 보이거나, 나와 성향이 비슷해 보이는 친구는 없는지, 그렇게 적당한 친구를 마음속으로 선정한 후에는, “혹시 옆자리 비었어?” 하는 조심스러운 말로 한 학년 단짝과의 관계가 시작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여자아이들이란 소년들에 비해 제법 복잡한 편이라 그렇게 시작한 관계에도 여러 가지 변수가 많다. 어렵게 고른 그 친구가 보다 친한 다른 무리가 이미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성격이 기대와 다른 경우도 있고, 어쩌다 보니 무리의 인원이 홀수인지라 누가 짝 없이 다닐 것인가 하는 문제로 조용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래서 여학교의 새 학기 첫날은 이 모든 변수를 이겨내고 단짝, 그리고 내가 속할 무리를 반드시 만들고 말겠다는 결의로 어쩌면 살벌하기까지 한 눈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도 결국 한 학기 정도가 지나고 나면, 절반정도는 처음의 그 무리를 유지하는 반면, 나머지 절반정도는 마음 맞는 무리를 새로이 형성한다. 후자의 친구들은 전자의 친구들에 비해 다소 노력도 기울여야하고 약간의 마음고생도 불가피하다. 소녀들은 어떤 때엔 약간 모진 구석이 있어, 어떤 무리에서 도태되거나 거부되어 마음고생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이렇게 저렇게 우리 무리나 다른 무리에 그 친구들을 편입 시켜주는 일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다들 결국 자신의 무리를 찾긴 하지만,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지금 뿐만 아니라, 좀 더 소녀였던 시절부터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정말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인간(人間)일 수 있다고 하던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완전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되고, 그 무리 안에서 소통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소속감의 결여는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삶 여기저기에 타격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보다 의존적인 사람과, 보다 덜 의존적인 사람이 있을 뿐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건 거의 존재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완전히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서 타인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게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 신선의 경지쯤 되는 것 아닌가. 일반적으로는 사람은 무리에 소속되어 삶을 함께 향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무리라는 개념은 개인에게 정말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자신의 삶의 배경이며,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나’의 범주를 결정한다. 사람이 어떤 무리에 속하고자 결정할 때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내가 고른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게 될 때, 모든 일들이 계획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때로 그것이 마음 아프고, 신경 쓰이고, 심심치 않게 무리가 해체되어 버리곤 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생각처럼 생활패턴이 공유되지 않을 수도 있고,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고, 전체적으로 자신의 무리에 기대하는 방향성에서 차이를 보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모든 변수들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 안목을 믿으며, 운을 빌어보는 밖에.

그렇지만 내 삶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간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운을 빌어보는 것뿐이라는 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정말 운을 비는 것이 전부인가. 인간관계라는 것은 오로지 ‘남’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이 결정하는 것이다. 관계를 맺은 타인이 내가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길 기대하는 것이 나의 손을 벗어난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에 대한 부분만이 남는다.

좋은 무리,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은 우리들은 타인을 향해 날카로운 기준을 세운다. 성격, 외모, 취향, 배경, 상황, 가치관, 생활패턴…. 눈치와 탐색 온갖 사전지식과 노하우를 총 동원해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점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나의 무리로서 함께할 사람을 고르는 데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정작 내 무리에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노력은 지나치게 소홀하지 않은가.

나의 모든 인간관계와 무리 안에는 언제나,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괜찮은 타인을 고른다 하더라도 내가 속한 무리는 좋은 무리이기 힘들 수밖에 없다. 일종의 미션처럼 내 앞에 높인 두 명의 여학우들. 나는 그 친구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따져보기에 앞서, 내가 정말 그 친구들의 무리에 ‘필요한’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나는 그들의 무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사람인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노력해야만 하겠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해본다. 내가 그들에게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들은 그런 나에게 역시 좋은 사람이 되어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내가 좋은 인간관계를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타인을 재고 따지는 것보다, 내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지나간 일에 대해 ‘미리 알았다면’ 하며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생산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법학전문대학원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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