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라고 해서 감히 그 엄청난 고통의 크기 가늠할 수나 있을까?
신이라고 해서 감히 그 엄청난 고통의 크기 가늠할 수나 있을까?
  • 김범진
  • 승인 2014.04.29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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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진의 문화 뒷마당> 영화 ‘방황하는 칼날’ 그리고 세월호

여객선 세월호 침몰 참사로 인해 대한민국이 비통에 잠겨 있다. 한두 명도 아닌 수백여명의 생때같은 아이들이 이름조차 흉악스런 ‘맹골수도’ 한가운데에 잠겨버렸다. 어른이란 탈을 쓴 악마의 짓거리나 다름없는 방송 하나만을 믿고 가라앉는 배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어른들을 기다린 그 아이들의 영전에 무엇을 빌고 무엇을 잘못했다고 해야 하나. 너무도 죄스럽다.

신이 만들어 놓은 단어가 있다고 한다. 남편을 먼저 보낸 여자들에겐 ‘미망인’, 아내를 먼저 보낸 남편에게 ‘홀아비’, 부모를 먼저 보낸 아이들에게 ‘고아’란 단어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이 세상 어떤 언어권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는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나. 신조차도 그 고통의 크기를 가늠키 어려워 만들지 못했다고 하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를 가리키는 단어 말이다. 이 처절하고 극악한 고통을 지금 대한민국의 부모 수 백 여명이 하루, 한 시간, 아니 1분, 그것도 아닌 찰나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그것은 살아가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신조차도 가늠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이런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본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지금의 이 고통을 예감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부모 관객들의 가슴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가끔씩은 누구나 쓸데없는 상상을 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고통스런, 또는 힘든 순간을 잊기 위해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하며 반대로 지금의 순간을 중화시키는 몹쓸 짓 말이다. ‘만약 부모가 돌아가셨어도 이렇게 힘들까’ ‘내 아내, 혹은 남편이 죽어도 이렇게 힘들까’ 라고. 하지만 그 안에 자식에 대한 얘기는 결코 넣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 내용을 ‘방황하는 칼날’은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영화는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일본 소설계의 사회파 거장으로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코가 쓴 이 소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청소년 범죄에 대한 관대함을 지적한다. 2008년 첫 출간 당시 일본에서도 청소년 범죄의 심각성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집단 왕따’로 통하는 ‘이지메’의 종주국으로서 일본의 청소년 범죄는 그 악성이 자자하다. 성폭력,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며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하지만 청소년이란 이유만으로 가벼운 처벌이 이어졌다. ‘방황하는 칼날’은 바로 그 사건의 중심에서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를 질문한다. 단지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을 비난하지도, 그 범죄를 단죄하는 대상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다.

이미 여러 언론을 통해 드러난 영화의 핵심은 이렇다.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상현(정재영)은 성실한 직장인이다. 휴일도 없고, 야근은 밥 먹듯 한다. 몇 년 전 먼저 떠난 아내를 대신해 딸 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신념으로만 살아가는 앞뒤 꽉 막힌 직장인이다. 아무리 불공평한 일을 당해도 싫은 소리 하나 못한다. 그런 그를 직장 동료들은 ‘멍청이’라 욕한다. 하지만 상현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웃음으로 넘길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진다. 딸이 죽었다. 믿지 않았다. 경찰서에 갔다. 그는 “왜 바쁜 사람에게 이런 장난 전화를 하느냐”며 화를 낸다. 이미 딸이 죽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일 뿐이다. 눈앞에 죽은 딸의 시신을 본 뒤 오열한다. 왜 내 딸이 죽었을까.

이 부분부터 ‘방황하는 칼날’은 여느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 억관(이성민)은 앞서 한 청소년 범죄를 담당하면서 피의자 청소년을 강압 조사한 죄로 내사과 직원들로부터 ‘쓰레기’란 말을 듣는다. 이성민이란 배우의 존재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캐릭터 억관의 사연이 눈에 보였는지, 그 있음직한 사연은 공개되지 않았다. 아무튼 억관은 상현의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또 다시 청소년 범죄다. 지지부진한 조사 과정에 상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억관에게 전한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게 최선입니까” 그런 상현의 질문에 억관 역시 억장이 무너진다. 그는 그냥 “집에 돌아가서 계십시오”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그렇게 돌아선 상현에게 우연히 어떤 인물이 범인의 소재를 핸드폰 문자로 알린다. 상현은 그곳으로 무엇에라도 이끌린 듯 달려간다. 그리고 범인 일당 중 한 명인 한 청소년을 어떤 발단으로 인해 무참히 살해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정당화 돼서도 안된다. 하지만 자식을 빼앗은 사람이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어린이든 내 눈 앞에 있다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옳을까. 해외 토픽에나 나올 법한 “죄를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면 안된다”며 용서를 해야 옳을까.

결국 상현은 순식간에 살인 사건 용의자로 돌아서게 된다. 억관 역시 후배 형사들에게 이를 고지한다. 하지만 억관의 파트너이자 후배 현수는 상현의 심정을 이해하고 동조한다. 이에 억관은 자신의 처지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울분을 토해내며 화를 낸다. 탁자에 함께 앉아 밥을 먹던 중 숟가락을 내 던지며 “그냥 밥 좀 먹자”고 화를 내는 장면 속에서의 이성민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어보라.

상현은 또 다른 범인의 발자취를 찾아서 경찰의 추격을 피한 채 강원도 대관령의 눈밭으로 향한다. 서릿발이 내린 끝없는 설원과 그곳을 가득 메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자작나무 숲은 꼭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눈밭에서 정신을 잃으며 쓰러진 상현은 순간 죽은 딸의 환영을 본다. 딸은 말린다. “이제 됐다”고. 하지만 상현은 터져 나오는 울음과 슬픔을 삼키며 고개를 젓는다. “여기서 멈추면 넌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느냐”면서.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대립 구도로 이어진 여타의 추격전 외피를 가진 ‘방황하는 칼날’이지만, 속내는 많이 다르다. 상현을 막기 위한 억관의 심정 또한 처절하다. 그를 살리고 싶어 한다. 누구보다 상현의 심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아니 어느 누구라도 상현의 심정을 이해해야 옳다. 자식을 죽인 범인이 눈앞에 있다. 그를 용서해야 옳은 가. 아니면 법의 정당한 심판을 받게 해야 옳은 가. 영화 속에선 이 부분마저 무의미하다는 대사가 한 마디 나온다. 결국 어느 정도는 상현의 손을 들어준다. 부정 모정을 넘어선 정의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를 묻는다.

마지막 순간 상현은 나머지 범인 한 명과 만나게 된다. 총을 겨눈 채 그 범인에게 다가선다. 그와 동시에 억관 역시 그 장소에 나타난다. 억관은 소리친다. “그래도 살아서 끝까지 살아서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니냐. 우리가 꼭 죄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상현은 외친다. 아니 피를 토한다. 아니 살은 뜯어내고 단장의 고통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처절함을 드러낸다. “난 단 한 순간도 내 딸을 죽인 범인과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가 없다”라고.

마지막 장면에서 억관은 후배 형사 현수에게 말한다. “17년 동안 왜 형사는 피해자 가족에게 매번 같은 말만 하는지 모르겠다. ‘참으라고’”라며. 그리고 눈앞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농구를 하는 한 학생을 바라본다. “저 놈은 게임팩 하나 때문에 자기 친구를 무참히 때려죽였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 죄값을 다 받았다고 한다. 죽은 친구가 저놈에겐 하나의 발판을 마련해 준 거지”라고. 후배를 바라보며 일어서는 억관은 말한다. “끝까지 지켜봐야.”

세월호 참사로 인해 비통함에 젖어 있을 모든 부모님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서 끝까지 희망을 끈을 놓지 않은 채 기다리고 기다렸을 학생들에게도 전합니다. “힘없고 무기력한 어른이라서 너무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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